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79화 (179/271)

179 : “혹시 정직원 관심 없니?”

***

작년 여름방학 때는 아주 부지런하게 살았었더랬다.

전날 아무리 늦게 잠들어도, 오전 10시에는 일어났었더랬다. 방학이라 수업도 없었지만, 일어나면 재빨리 씻고, 선크림을 비롯해 얼굴에 이것저것 찍어 바르고, 옷도 신경 써서 입고, 늦어도 점심시간이 되기 이전에 하숙집에서 나왔었더랬다.

지수랑 놀겠다고 말이지.

그렇게 만나서, 뭐 특별한 걸 안 해도 즐거웠었더랬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카페에 앉아서 몇 시간씩 수다를 떨었고,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종점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이상한 이름의 간판 찾기 같은 걸 하면서 즐거워했었다.

특별한 것도 많이 했었다. 수도권의 놀이동산은 이때 다 가봤었고, 티브이에서만 보던 어트랙션도 이때 다 타봤었다. 워터파크는 진짜 좋았었다.

꼭 지수랑만 놀았던 것도 아니었다. 일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친구들 다 같이 모여 놀았다. 술도 마시고, 보드게임카페도 가고. 바다도 가고.

그런데 올해 여름방학은 정반대의 상황이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는 웬만해서는 집 밖으로 잘 나가지를 않고 있다.

나간다고 해봤자, 집 근처 편의점이나 공원, 그것도 기름 번들번들한 얼굴로, 반바지에 쓰레빠 찍찍 끌고서, 잠깐 다녀오는 정도? 그 정도 였다.

히키코모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고, 활동량이 이렇게 줄어든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데이트할 여자 친구가 없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

데이트 비슷한 걸 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뭐, 서현 씨라든가, 지연이라든가.

서현 씨는 일단 같은 집에서 살고 있으니, 따로 데이트를 위해 준비를 할 필요가 없지. 뭐 준비할 필요가 없는 건 둘째 치고, 일단 서현 씨는 직장인이니 평일 낮 한가한 시간에 카페에서 수다를 떤다는가, 목적지 없이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의미 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불가능하고.

그리고 지연이는….

불러내려면 언제든 불러낼 수는 있지만… 좀 그렇다.

지연이가 싫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싫기는커녕, 요즘 그 녀석의 존재감이 자꾸….

흠. 아무튼 지연이는 좀 그렇다. 아, 씨. 나도 요즘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아무튼, 데이트할 상대가 없다는 것이 첫 번째.

두 번째는 무언가 심적으로 조금 지쳤다고 할까?

생각해봐라. 지난 학기 시작하고 단 하루도 이벤트 없이 그냥 넘어간 날이 없다.

지수에게 까이면서 올 한 해를 시작했지, 그 상태에서 할아버지에게 가업을 이으라는 이야기를 듣고, 서현 씨 만나고, 이사하고…. 학교생활도 버라이어티했지. 축제야 그렇다고 쳐도, 지연이 스토커 사건부터 이어진 초대형 이벤트. 거기에 승환이랑 창회 연계 퀘스트도 있었지.

아휴. 지금 생각하면 진짜 지난 학기는 뭐 정신없이 흘러갔네.

아무튼, 그렇게 계속 이벤트와 연계 퀘스트가 끊이질 않았으니 심적으로 지치는 것도 당연한 이야기다.

마지막 이벤트가 기말이었지. 그때 시험공부 한다고, 몸과 마음을 불싸지른 것도 있고 해서 그런지, 방학하고 나서는 번아웃 된 것처럼 한동안 계속 늘어져만 있었다.

프린스랑 점심 먹겠다고, 한 번 나갔다 오긴 했네. 그거 말고는 나가지를 않았다. 친구 놈들이 나오라고 해도 안 나갔다.

솔직히 몸이 좀 근질근질한 감도 없지 않지만, 당분간은 좀 여유를 가지고 쉬고 싶다.

하지만 지금 나는 외출 준비를 하고 있다.

오늘 목요일이거든. 목요일은 카페 알바가 있는 날이고.

카페는 서비스 업종인데, 기름 번들번들한 얼굴로, 반바지에 쓰레빠 찍찍 끌면서 알바하러 갈 수는 없잖아. 점장 누나가 날 아무리 편애한다고 해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는 거지.

그리고 오랜만에 번화가 나가는데, 그냥 나갈 수는 없잖아?

얼굴에 뭐라도 찍어 발라야지, 라는 생각으로 로션을 치덕치덕 바르고 있는 중이다.

***

2000년대 초반, 주 5일제를 시행한다고 했을 때, 한반도에 난리가 났었다고 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비롯해 경제 관련 단체에서는 아직 주5일 근무는 우리나라 경제 여건상 시기상조이고, 결국 기업경쟁력, 국가경쟁력 약화로 이어지게 된다고 우려의 성명을 발표하고 했단다.

당시 언론에서도 ‘삶의 질 높이려다 삶의 터전 잃는다’ 같은 기사로 열심히 지원사격을 했지만, 정부의 강력한 정책 추진으로 결국 주 5일 제도는 시행되었다.

결과는? 기업도 안 망했고 나라도 안 망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항상 그랬다.

1970년대 미국에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는 법이 입법 예고되었을 때도, 그렇게 되면 기업 다 망하고 대량실업 사태가 터진다고 했는데도 기업도 미국 경제도 안 망했다.

1960년대 여성과 흑인에게 동등한 임금을 주라고 했을 때도, 1938년에 주당 40시간 근무를 법적으로 명시했을 때도, 1924년도에 아동에 대한 노동착취를 금지했을 때도, 1915년도에 노조원에 대한 일방적인 해고를 금지했을 때도, 1912년에 노동착취금지법이 처음 나왔을 때도, 1800년 중반에 노동자의 파업이 법적으로 정당한 권리임을 인정받았을 때도.

기업 망하고 나라 망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기업들은 엄청나게 성장했고, 나라의 경제규모도 엄청나게 커졌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하면, 정부 차원에서 대학생들에게 방학 기간 동안 알바를 쉴 수 있게 해주는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

수업은 물론, 알바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진정한 방학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뭐. 나도 안다. 개소리라는 거.

오늘 유난히 힘들어서 그런 뻘 생각이 떠올랐다.

사실 오늘 알바 하러 나올 때까지만 해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름 상쾌한 기분도 들었다.

오랜만에 씻고, 얼굴에도 로션 좀 찍어 바르고, 꼬까옷도 입고 번화가 나왔더니, 뭔가 생기가 돌아오는 그런 느낌이 들었고.

카페 도착해서 앞치마 질끈 동여맬 때까지만 해도, ‘그래, 사람이 이렇게 활동적으로 살아야지. 맨날 늘어져만 있으면 정신까지 늘어진다니까?’ 같은 생각을 했었는데…. 그랬는데….

‘우리 한수가 목요일 저녁 파트 알바였지?’라고 말하듯 진상 손님놈들께서 너무 많이 찾아와주셨다.

왜 옛말에 그런 말이 있잖아. 귀신 이야기를 하면 귀신이 오고, 호랑이 이야기를 하면 호랑이가 온다고.

저번에 지연이에게 ‘카페 진상 손님, 그 실체에 대한 특강’을 진행해서 그런지, 오늘은 진짜 다양하게도 찾아오셨다.

아니, 진상뿐만이 아니다. 오늘은 사기꾼까지 등장하셨다.

한창 바쁜 시간에, 어디 꽃집 이름 붙어있는 앞치마를 두른 아저씨가 난(蘭) 화분 하나를 들고 와서는 “사장님이 이거 여기로 배달해달라고 하셨어요. 20만 원입니다. 빨리 주세요. 여기 앞에 주차해놔서 빨리 빼야 해요!” 같은 소리를 하는 거다.

어디 어리바리한 신입 같았으면 바로 돈 꺼내줬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1년 동안 진상 손님 놈들에게 단련 받은 나는 그런 쪼렙이 아니란 말이지.

손님들이 줄을 서 있는 상황에도 침착하게, ‘우리는 직영이라 사장이라는 인물이 없고, 점장 누나가 최고 대빵인데, 이게 무슨 멍멍이 소린가?’ 하는 의문을 떠올렸고, 만들어야 할 음료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상황에서도 아저씨에게 차근차근 캐물었더니, ‘아, 여기가 아닌가?’ 그딴 소리를 하면서 비실비실 사라져버린다.

나가는 그 양반 품에 안긴 화분을 보니, 딱 봐도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풀떼기 하나가 심어져 있다. 성의 없네. 차라리 플라스틱으로 만든 조화(造花:가짜 꽃)가 더 그럴싸해 보이겠다.

점장 누나에게 이야기했더니, 가끔 온단다. 저런 사람 예전부터 있었다고, 자기도 몇 번 만났다고.

아무튼, 진상에, 사기꾼에, 별꼴을 다 당하다 보니, ‘방학 기간 대학생 알바 금지법’ 같은 미친 생각이 떠오른 거다.

아, 진짜 못 해 먹겠다. 월요일로 바꿔야겠다. 병진이 형에게는 미안하지만 난 월요일로 도망쳐야겠어.

휴식 시간에 탈의실에 앉아서 그렇게 결심을 하고, 다시 카운터로 돌아왔는데!

“한수야, 혹시 너 월요일은 시간이 어때?”

점장 누나가 타이밍 좋게 그렇게 물어본다.

“월요일이요?”

뭐야? 우리 점장 누나 독심술사야? 사이코메트리스트(psychometrist)야?

“응. 혹시 월요일도 같이 해줄 수 있어?”

“목요일에서 월요일로 옮기는 게 아니고… 월요일도요?”

내가 그렇게 묻자, 점장 누나가 병진이 형을 바라본다.

나도 병진이 형을 바라본다.

자본주의 서비스 업종 기본 패시브인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손님을 상대하고 있지만, 계산대 아래 숨겨놓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우리 병진이 형.

점장 누나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다.

‘저 불쌍한 병진이를 두고 혼자서 월요일로 도망가겠다고?’

내 대답은 이거다.

“네.”

점장 누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하시죠. 제가 당분간 월요일, 목요일 같이 할게요. 당!분!간! 그 대신 목요일에 사람을 뽑아주세요. 예쁜 여자 알바라면 병진이 형도 불만 없을 거예요.”

내 말에 점장 누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은 생각이다. 그런 느낌이다.

병진이 형. 점장 누나는 형을 남자로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그냥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불쌍한 병진이 형.

“그나저나 월요일은 갑자기 왜요?”

***

점장 누나의 설명에 따르면 앞으로 매주 월요일에는 본사에 들어가게 되었단다. 본사에서 데스크 업무를 보게 되었다고.

직영점 점장을 본사에서 호출했다? 데스크 업무를 보라고 했다? 그 말은?

승진한다는 이야기다.

우리 점장 누나가 조만간 점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본사로 들어가 지역을 총괄하는 수퍼바이저가 되신다는 이야기다.

뭐, 내가 점장 누나랑 친해서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 점장 누나 솔직히 능력 있다.

알바로 시작해서 정직원이 되고, 단기간에 이 손님많은 지점 점장까지 오를 정도로 능력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을 그냥 현장 점장으로만 쓴다? 회사에 마이너스다.

회사도 바보가 아닌갑다. 점장 누나 올려서 쓰려는 거 보니.

아무튼, 당장 수퍼바이저가 되어서 우리 곁을 떠나는 건 아니고, 한 반년 정도 후에 인사이동 시기가 되면 그때 정식으로 발령이 나고, 수퍼바이저가 되는가 보다. 그때까지는 점장과 본사 업무를 병행하고.

그런데 월요일에 자기가 없으니까, 믿을 만한 사람에게 월요일 마감을 맡기고 싶은데 그게 나라는 거지.

후후후. 우리 점장 누나, 사람 볼 줄 아시네.

그나저나 점장 누나가 본사로 간다?

나도 그 타이밍 맞춰 그만둬야겠다.

안 그래도 그만둘 각 보고 있었는데, 타이밍 예술이네.

앞으로 반년이라….

“그러면 다음 점장은요?”

“일단 본사에서 내려올 거야.”

“일단?”

“병진이에게 정직원 제안하려고.”

나는 다시 병진이 형을 바라보았다. 또 다른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해탈한 얼굴로.

“정직원 되면, 좀 덜 바쁜 지점으로 보내서 일 좀 가르치고, 1년 정도 후에 다시 여기로 오면 될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진이 형이라면 믿을 만하지. 점장을 맡겨도 될 것 같다.

물론 그 전에 내가 그만두니까 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월요일부터 나오면 되겠죠?”

“아, 그리고 부탁할 거 또 있다.”

“네? 뭔데요?”

“다음 주 월요일에 알바가 새로 들어오거든. 교육도 부탁할게.”

“알바요?”

“응.”

“경력?”

“신입.”

“남자?”

“여자.”

“예뻐요?”

“어어어엄청.”

점장 누나가 그렇게 말하며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하이, 참. 어쩔 수 없네요.”

“역시, 믿을 사람은 우리 한수뿐이네. 한수야, 혹시 정직원 관심 없니?”

“없는데요.”

“점장 시켜줄게.”

“싫은데요.”

싫다. 당연히 싫지.

카페 일은 좋다. 손님이 싫다. 진상 손님이 싫다. 서비스업은 나하고 안 맞아.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예쁜 신입 알바라 이거지?

오케이. 이 오빠가 처음부터 끝까지 잘 가르쳐 줄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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