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78화 (178/271)

178 : 투자자 시사회

***

-예매했어요. 다음 주 수요일 오후 7시 반. 강변.

지연이에게서 온 깨톡.

다음 주에 개봉하는 고마음이 출연한 영화를 자기가 예매했다는 이야기다.

원래 예매는 내가 하려고 했다.

내가 선배고 먼저 보자고 하기도 했고.

그런데 지연이는 저번에 내가 밥 샀다며, 자기가 예매한다고 고집을 부려서 어쩔 수 없이 알겠다고 했다.

뭐 내가 팝콘 사면 되겠지. 아니, 영화 보고 나면 늦은 저녁 먹어야겠네. 저녁 사면 되겠다. 팝콘도 사고, 저녁도 사고. 그렇게.

그나저나 진짜 영화관 오랜만이네. 작년만 해도 한 달에 최소 두 번은 갔었는데.

지수가 영화를 좋아했었다.

꼭 영화뿐만 아니라 연극, 뮤지컬, 발레, 오페라, 클래식 공연 할 것 없이 어지간한 문화 콘텐츠에는 다 관심이 있었다.

예술의 전당도 많이 갔었더랬지. 거기 구내식당 맛있는데. 특히 양식이.

아무튼, 그러한 문화 활동 중에서 영화를 보러 제일 많이 갔다. 그나마 싸고, 접근성도 높고.

우리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영화를 선택했다.

무엇을 보겠다고 결정하고 극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영화 볼까?’ 그렇게 말이 나오면 무조건 영화관으로 무작정 갔다.

그렇게 영화관에 가서 현재 상영작 중 제목과 출연 배우, 포스터만 보고, 이거다! 하고 느낌이 오는 작품을 지수가 즉흥적으로 골랐다.

내 의견을 묻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반영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수랑 함께한다는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좋았으니까.

지수가 현장에서 감으로 찍은 영화를 바로 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보통 한 시간에서 길게는 두서너 시간까지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지수와 나는 다들 행복한 표정을 한 사람들이 오가는 영화관에 앉아서, 달콤한 팝콘 향을 맡으며, 상영 시간까지 우리가 볼 영화가 어떤 내용일지, 출연하는 배우가 어떤 연기를 할지를 추리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아무튼, 그렇게 감으로 영화를 골랐으니 성공률은 한 1:5:2:2 정도였다.

진짜, 하나도 기대 안 했는데, 영혼까지 스며드는 명작이 1,

‘음. 뭐 나름 재미있네.’ 하는 평작이 5,

‘아, 진짜 망했어. 신지수, 너 때문에 망했어.’ 하는 망작이 2, 돈 아까워 울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개똥망작이 2.

사실 개똥망작이라 해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같이 감독 욕을 하면서 돌아가는 길은 행복했었다.

흠. 그 녀석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

“진짜네….”

신지수는 포스터를 보면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1년 전, 한국에서 개봉했던 영화의 포스터가 걸려 있었다.

괜찮으면 영화나 보러 가자. 그렇게 권유한 사람은 사촌 동생이었다.

캐나다 최대의 영화관 프랜차이즈인 시네마플렉스에서는 개봉한 지 반년에서 1년 정도 지난 영화를 기본요금의 4분의 1 가격으로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마침 자기가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재개봉을 했다며 신지수에게 보러 가자고 권유를 한 것이다.

알고 있었다. 사촌 동생이 자신에게 왜 그런 권유를 했는지, 신지수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캐나다에 도착한 지 한 달 하고 며칠이 지났다. 그 40여 일 동안 신지수는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유학을 위한 준비에는 많은 행정절차가 뒤따랐다. 이모와 이모부가 도와주고는 있지만, 대부분 신지수가 직접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었다.

일정이 없는 날에는 공부에 매달렸다. 당장 다음 학기부터 수업을 들어야 하기에, 최대한 영어 실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핑계로,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열심히 공부에 매달렸다.

핑계였다. 스스로에게 여유를 주고 싶지 않았다. 뒤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약해질까 봐. 한 번이라도 틈이 생기면, 그 틈 사이로 버텨낼 수 없는 감정이 쏟아져 들어올까 봐. 그렇게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런 신지수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지쳐 쓰러질까 봐. 앞으로 넘어야 할 고비가 많은데, 벌써부터 저렇게 전력으로 달리는 사촌 언니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진짜로 철 지난 영화가 보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화를 보자고 영화관에 가자고 권유한 데에는 분명 그런 생각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그래서 권유를 받아들이고 영화관에 왔고, 그리고 지금 그 포스터를 보고 있는 것이다.

“언니, 이 영화 한국에서도 개봉했었어?”

“…응.”

신지수는 포스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그와 봤던 영화였으니까.

“어땠어? 흥행했어? 못 했을 것 같은데? 여기서도 워낙 컬트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감독이라서.”

사촌 여동생은 일부러 분위기를 띄우려는 듯 그렇게 계속 신지수에게 말을 건넸다.

그런 사촌 여동생의 말에 신지수는 대답하지 못했다.

‘아! 망했어요! 개애망했어요! 신지수 선수가 이번에도 개똥망 영화를 골랐어요!’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약 올리던 한수의 모습이 마치 어제의 기억처럼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

“이번 주 토요일이요?”

“네. 오후 5시인데, 시간 괜찮으세요?”

서현 씨가 나에게 그렇게 물어본다.

“네. 시간은 괜찮은데….”

나는 그렇게 대답을 주저했다.

이유가 있었다.

토요일 오후 5시. 그 시간을 비워둘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면 당연히 오케이.

주말에 적어도 하루는 서로를 위해 시간을 비워두기로 계약이 되어 있으니까.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한, 주말에는 따로 약속을 안 잡아둔다. 약속을 잡아도 일단 서현 씨에게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지.

그런 관점에서 따지면 당연히 ‘시간은 비워두겠습니다! 저를 마음대로 가져다 쓰십시오!’라고 하고 싶지만 그런 말이 안 나온다.

왜냐하면 서현 씨가 시간을 비워줄 수 있냐고 물어본 이유가 ‘업무적’인 이유였으니까.

서현 씨는 토요일에 시사회에 같이 가 줄 수 있냐고 물었다. 그렇다. 다음 주에 개봉하는 영화, 바로 ‘고마음’이 출연하는 바로 그 영화의 시사회에 말이다.

뭐, 지연이와 그 영화를 보기로 미리 약속해서 껄끄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영화 그까이꺼 두 번 보면 되지. 두 번 본다고 해서 뭐 안 될 것 없지. 없는데….

문제는 서현 씨가 가자는 시사회가 그냥 시사회가 아니라 ‘투자자 시사회’라는 부분이다.

나도 이번에 알았는데, 시사회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시사회만 있는 게 아니더라.

일단 기술 시사회라는 게 있단다. 감독을 포함해 제작진과 배우, 투자자가 전부 모여서 완성된 영화를 보고 의견을 나누기 위한 자리. 저 장면은 짜르고, 요 씬은 더 넣고 하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최종 상영본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는 시사회라고.

배급 시사회라는 것도 있는데, 말 그대로 배급사, 판권 관계자 등이 모여 영화를 보고, ‘잘 팔리겠죠? 상영관 왕창 주세요.’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한 시사회란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언론 시사회, 기레기, 아니 기자님들 모셔다가 ‘우리 영화 기사 잘 써주세용.’ 하고 싸바싸바 하는 거랑, 마케팅 목적으로 관객들 초청해서 하는 관객 시사회가 있고.

그럼 이번 주 토요일에 서현 씨가 참석해야 하는 투자자 시사회는 뭐냐 하면….

투자자들 중에서 큰손들만 모셔다가 ‘여러분의 귀한 돈으로 저희가 이렇게 영화를 잘 만들었습니다. 보시고 다음에도 화끈하게 투자 부탁드리겠습니다.’ 하며 굽신굽신하는 일종의 접대라고. 언론에서 말하는 그 VIP 시사회가 아니라, 진짜 몇몇 소수의 사람들만 참석하는 리얼 VIP 시사회 되시겠다.

중앙그룹 산하 투자계열사에서 이번 고마음 영화에 투자를 많이 하셨단다. 그래서 투자자 시사회에 초청을 받았다 이거지.

원래 투자자 시사회에는 투자계열사 대표님과 글로벌전략기획실 강우현 팀장께서 참석하시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우리 훌륭하신 강우현 팀장님께서 갑작스럽게 외국에 출장을 가시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강우현 팀장 대신에 우리 서현 씨가, 정식 직급인 비서실 강서현 대리가 아닌 중앙그룹 강씨 가문 로열패밀리 자격으로 대타를 뛴다는 이야기고, 나에게도 동행을 해달라고 요청을 한 것이다.

이게 단순히 ‘영화 같이 보러 가요.’가 아닌 것이다.

오케이. 알겠어. 투자자 시사회. 그래. 뭐. 프리미엄 상영관에서 밥도 주고, 술도 주고, 감독이 ‘이런 의도로 만들었습니다.’ 설명도 해주고, 뭐 좋다. 좋은데….

문제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거기에 앉아 있느냐는 이야기지.

강우현 그 형님이야 회장님 손자인 건 둘째 치고, 이번 투자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사람이고, 서현 씨도 마찬가지로 재벌 3세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격이 있잖아.

근데, 나는 그냥 일반 대학생인데?

귀하는 뉘신가? 그런 질문 받았을 때, 무엄한지고! 어찌 감히 작은 어르신도 몰라보고! 그럴 수는 없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서현 씨 몸종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무슨 다른 일정 있으세요?”

주저하는 내게 서현 씨가 그렇게 묻는다.

“아니, 그게 아니고. 상황이 좀 애매한 것 같아서요.”

“상황이요?”

나는 서현 씨에게 내가 걱정하는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뭐, 이렇게 저렇게 말을 돌릴 필요도 없다. 똑똑한 우리 서현 씨는 내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빙긋 웃는다.

“저는 마음에 들어요.”

“뭐가요?”

“제 몸종 역할이요.”

“서현 씨 영화 보실 때, 제가 엎드려서 다리 받침 역할 해드리면 될까요?”

“그것보다 무릎베개가 좋을 것 같아요. 한수 씨 무릎 베고 누워서 영화 볼래요.”

그거 괜찮은데? 그림 나쁘지 않은데?

잠깐만. 무릎베개? 정확히는 무릎이 아니고 허벅지잖아. 허벅지는 거기…랑 너무 가까운데?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아마도 큰 관심 안 보일 거예요. 그리고 생각 외로 그런 사람 많아요.”

“그런 사람이요?”

“나이만 봐서는 그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런 사람.”

“정체를 알 수 없는데, 그런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어요?”

“보통 중국 투자자 쪽에서 온 사람이에요. 높은 분 자제들.”

아하,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 들은 적 있는 것 같다. 요즘 중국 자본 많이 들어온다고. 특히 엔터 쪽에.

“한수 씨도 어디 중국 재벌 집 막내아들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절대 입 열면 안 되겠네요.”

“아니, 그러실 필요 없어요. 많이 불편하실 것 같으면, 꼭 안 가셔도 괜찮아요.”

“서현 씨는요?”

“한수 씨 안 가시면 저도 안 가고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데, 거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냐?

“…알겠습니다. 이번 주 토요일 오후 5시.”

나는 그렇게 말했다.

그냥 안 간다 그러면 편한데, 나 편하자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뭐랄까, 다들 날 위해서 이렇게 맞춰주는데,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고나 할까? 그리고 회장님이나 서현 씨를 위해서 내가 뭐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하는 것도 맞다는 생각도 든다.

뭐 이번에 가서 할 일이야 없겠지만 가서 머릿수나 채워주는 역할 정도만 하면 되겠지.

그리고 또 궁금하기도 하고,

투자자들만을 위한 초 럭셔리 VIP 시사회.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는 그런 호기심도 있고.

나중에 다녀와서 친구 놈들에게 잘난 척해야지.

특히 고마음이라면 아주 껌벅 죽는 이중훈이나 박찬희, 그 두 녀석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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