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76화 (176/271)

176 : 주행거리 30만 구아방

고향 선배 중 직업군인의 길을 선택한 형이 한 명 있다. 그 형이 군대에는 그런 말이 있다고 했다.

대위에서 소령이 되면 열 가지가 바뀌고, 소령에서 중령이 되면 백 가지가 바뀌고, 중령에서 대령이 되면 천 가지가 바뀌고, 대령에서 별을 달게 되면 만 가지가 바뀐다고.

연금도 연금이지만, 그 열 가지, 백 가지, 천 가지, 만 가지 바뀌는 것 때문에 군인들이 진급에 목숨을 거는 거라고.

백 가지, 천 가지까지는 아니지만,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이 되면 똑같이 학생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지만, 상당히 많은 것이 바뀐다. 뭐, 성인이 되었으니 술, 담배를 마음껏 할 수 있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고.

우선 수업 시간표를 내 마음대로 짤 수 있다.

물론 완전 100%!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시간표를 짜겠다!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등학교 때처럼 1교시부터 8교시까지 꽉 들어찬 시간표에 비하면 확실히 자유도가 높지.

예를 들어, 나는 작년 2학기 같은 경우 아침 수업을 전부 빼버렸다. 제일 빠른 수업 시작 시각이 11시가 되도록 시간표를 짰다.

왜?

늦잠 자고 싶어서.

대학생이 되었는데 고등학교 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졸린 눈 비비며 학교 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결과는?

졸린 눈 비비며 11시 수업 들으러 갔다.

충분한 수면을 위해서는 언제 자느냐가 중요한 거지, 언제 일어나는 것인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교훈을 얻었다.

수업 요일을 조정하는 방법도 있다.

예를 들어 찔끔찔끔 주 5일 학교 나올 거, 잘 몰아버리면 주 4일로 시간표를 짤 수 있다.

진짜 한번 죽어보자는 생각으로 점심 먹을 시간도 없이 몰아버리면 주 3일만 학교 나오는 것도 가능하다.

근데 이 방법은 부작용이 있다. 정말 강철 같은 의지가 아니고서는 버텨내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어 이번 학기에 내가 목요일에 점심밥 먹을 시간도 없는 그 시간표가 나왔지. 연강과 연강과 연강의 퍼레이드.

물론 내가 주 3일 해보겠다고 그런 건 아니고, 학기 초 수강 신청 기간에 지수랑 깨지고 멘탈 나가서 벤치에 앉아 질질 짜다가 그래도 수강 신청은 해야지. 그런 생각으로 수강 신청 기간 마지막에 대충 클릭질을 했더니 그 사달이 난 거다.

목요일에 지옥의 연강, 그런데 학교에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 다 가야 해.

아마 개교 이래 가장 멍청한 시간표였을 거다.

내가 그런 삽질을 했다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아무튼, 수업을 몰면 과제나 시험 같은 부분에 있어서도 부담이 가중된다. 부담이 더하기나 곱하기가 아니라 제곱이 되는 거다.

학교 안 오는 다른 날에 열심히 미리미리 해버리면 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사람이 그게 되냐고. 안 되지. 그렇게 성실한 사람이면 애초에 주 3일 수업 같은 건 생각도 안 하지.

아무튼,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학교 편하게 다니겠다고 수업 몰았다간 지옥 가는 급행열차를 타게 될 수도 있다.

대학 와서 좋은 거 이야기하다가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빠져버렸다. 아무튼 수업 내 마음대로 짜는 거 좋다. 이거 하나.

그리고 또 좋은 게 뭐냐면 수업을 빼먹어도 된다는 거다.

뭐 수업 안 들어간다고 누가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학점 빵꾸 나는 것만 감수할 수 있다면 매시간이 공강이고, 매일매일이 휴일이지.

아침 일찍 학교 와서 수업 듣겠다는 친구 다섯 명 꼬셔서 바로 피시방 가서 ‘점심밥 쏘기’ 롤 달리고, 점심에 중국요리에 낮술 마시고, 알딸딸한 상태로 또 피시방 갔다가 밤에 또 술 마시러 가도 된다는 이야기다.

나도 박승환, 그 악마가 ‘대학생이 되었는데, 언제까지 고등학생의 마음으로 살 텐가!’ 하는 유혹에 못 이겨 한번 해봤는데 좋았다. 진짜 행복했다. 뭔가 하루를 충실하게 보낸 그런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렇게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지는 거고.

마지막으로 대학생이 되어서 바뀐 게 무엇이냐 하면, 시험 끝나는 그 순간이 바로 방학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중고등학교 때 생각해봐라. 시험 끝났는데, 수업도 안 하는데 괜히 학생들 학교에 불러다가 붙잡아놓고 괴롭히잖아.

쌤들도 수업하기 싫으니까 쓸데없는 이야기 하거나, 자습하라고 하거나.

수능 끝나고도 그랬지. 수능 끝나고도 학교 오라고. 안 오면 불이익 줄 거라고.

가봤자 그거 꼴랑 오전 수업, 아니, 수업도 아니지, 오전 동안 알아서 놀라고 할 거면서 학교는 꼭 오라고 하고.

그런데 대학은 그런 게 없다. 그냥 시험 끝이 학기 끝, 방학 시작이다.

방학도 겁나 길지. 7월 초에서 늦으면 9월 초까지. 시험만 일찍 끝나면 풀로 두 달이다.

무리하면 ‘60일간의 세계 일주’도 가능하다. 아니, 필리어스 포그처럼 돈을 질질 흘리면서 다니면 60일이 뭐야. 일등석 타고 일주일에 끝나지.

아무튼, 나는 모든 시험을 끝냈고-결과는 일단 넘어가고- 본격적인 방학에 돌입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학교에 나와 있다.

왜냐면 호출을 받았으니까.

***

“아, 미안해요.”

정지수 박사. a.k.a 한국대 프린스. 차기 심리학전공 교수 임용 1순위이시자 방송가에서는 ‘얼굴 천재 심리학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오면서 그렇게 사과한다.

아니, 방학인데도 학교에 나오라고 불러놓고서는 이게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박사님 시간만 중요하고, 저 같은 학부생 시간은 별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니시겠지요?

그렇게 말했다가는 한국대 프린스 비공식 팬클럽 ‘왕자님 수호대’에게 뼈와 살이 분리되겠지?

“아닙니다.”

“많이 기다렸죠?”

“아니요. 금방 왔습니다.”

실제로도 많이 안 기다렸다. 한 10분 정도?

“일단 갈까요?”

한국대 프린스가 그렇게 말하며 나를 주차장 쪽으로 안내한다.

차 타고 가는 거야? 학교 근처가 아니고? 부담되는데?

***

내가 왜 방학인데도 학교에 나와 프린스를 만났느냐? 호출을 받았으니까.

며칠 전 아침에 서현 씨 출근시키고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는데 프린스로부터 문자가 왔다.

혹시 시간 괜찮으면 이번 주에 점심 식사 어떠하냐고.

그 문자를 보면서, 프린스께서 문자를 잘못 보내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백번 양보해서 프린스와 내가 점심을 같이 먹을 사이까지는 아니지.

아, 그렇다고 우리가 완전히 모르는 사이는 아니다. 통성명도 했고, 전화번호도 교환했으니, 꼭 따지자면 ‘아는 사이’ 정도는 된다.

공식적으로 프린스와 나 사이에는 네 번의 만남이 있었다.

첫 번째는 내가 알바하는 카페에 프린스가 손님으로 찾아오셨더랬지. 그냥 커피만 받아서 갈 줄 알았는데, 프린스께서 ‘혹시 우리 학교에서 보지 않았나요?’라고 질문을 해왔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프린스가 수업 듣던 학생 누구랑 착각을 한 건데, 아무튼, 그 착각 덕분에 처음으로 프린스와 안면을 텄다.

사실 뭐, 대단한 이벤트도 아니다. 그냥 착각이었으니까. 그러고 넘어갔으면 그냥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끝났을 텐데, 두 번째 만남이 바로 다음 날 연이어 이루어지면서, 우연처럼 넘어갔을 첫 번째 만남이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도 유 선생님 연구실에서 말이지.

따지면, 그날도 우연인 것이, 조교 형이 바쁘다고 유 선생님 우편물을 대신 가져다 달라고 부탁을 했고, 별생각 없이 유 선생님 연구실에 갔는데, 거기에 프린스가 있었던 거다.

24시간도 안 지난 시점에서 프린스가 날 알아봤고, ‘오늘 또 보네요.’라고 했고, 유 선생님 소개로 정식으로 인사를 하게 되었다. 정식으로 통성명을 하게 된 거지. ‘안녕하세요. 한수입니다.’ 그렇게.

세 번째 만남은 우리 말썽꾸러기 제이슨 때문에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흡연구역에 담배 피우러 갔다가 거기서 우연히 만났다.

이건 진짜 우연 중의 우연인 것이, 내가 딱 그 타이밍에 담배를 피우러 간 것도 그렇지만, 프린스가 그 병원 상담센터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도 우연이고, 마침 그날 회의가 있던 것도 우연이고, 또 그 시간에 딱 마주친 것도 우연이다.

확률로 계산하면 로또 뺨 때릴 것 같은데?

그때, 프린스가 그랬다. 퇴원하면 퇴원 기념으로 밥 산다고.

빈말이라고 생각했다. ‘어. 그래. 언제 밥 한번 먹자.’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빈말 베스트 3 아니던가.

그리고 네 번째, 내가 장영호를 어째야 하나, 그런 생각 하고 있을 때, 또 우연처럼 등장하신 프린스께서 ‘답은 언제나 문제 주위에 있다.’와 같은 조언을 해주고는 진짜 밥 먹자며, 다음 주에 날 잡자며 전화번호를 받아 갔다.

당황했었다. 빈말인 줄 알았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고?

아무튼, 그렇게 약속을 잡았는데, 결국 밥은 먹지 못했다.

심리학계의 떠오르는 신성, 차기 심리학 교수 1순위이신 프린스께서 갑자기 은사님의 명령으로 학회 참석을 위해 미쿡에 가셔야 하셔야 했으니까.

역시 프린스, 스케일이 달라.

물론 나에게는 미안하다고, 다음에 꼭 밥 같이 먹자고, 그렇게 양해를 구하기는 했다.

그 이후 나는 완전 까먹고 있었다. 그 4주 모임인지 뭔지, 그것도 있고, 승환이 녀석 헛소리하는 거 들어주고, 창회 생일도 있었고.

그렇게 까먹고 있었는데, 프린스께서는 ‘밥 한번 먹자.’라는 약속을 기억하고 계셨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오늘로 날이 잡혔고, 바쁘신 프린스 대신 한가한 내가 학교에 오게 된 거고.

학교에서 만나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학교나 근처에서 대충 먹을 줄 알았다.

그랬는데, 지금 나는 프린스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과천 쪽으로 가고 있다. 진짜 맛있는 곳이 있다고, 꼭 소개해주고 싶은 곳이 있다며.

이거 부담되는데. 아니, 프린스라서가 아니라, 남자 둘이서 차 타고 맛있는 거 먹겠다고 멀리까지 가는 거 이상하잖아. 나만 이상한가?

그나저나 프린스, 소박한 차 타고 다니시네.

프린스 정도면 삼각별은 아니더라도 아우지 정도는 타고 다닐 것 같은 이미진데, 뚜껑 열리는 카브리올레나 적어도 문 두 개 달린 쿠페 같은 거.

근데 이 양반 차, 국산 준중형차다. 그것도 15년 전에 나온 수동 모델.

일명 구아방.

그 90년대 나온 그 진짜 구우우우우우우우우우아방이는 아니고, 붕어처럼 생겼다는 이야기 듣는 조금 구형 아방이.

계기판을 슬쩍 보니 총 주행거리가 30만에 육박한다. 아니, 국산 준중형이 30만km나 달릴 수가 있나?

“놀랍죠?”

“…네?”

“이 차가 30만이나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계기판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프린스가 그렇게 말한다.

“아, 네.”

나는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괜히 실례되는 행동한 것 같은데.

“다들 그래요. 처음 이 차를 타면 계기판부터 보죠.”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프린스가 그렇게 말해준다.

“…관리를 잘하셨나 봅니다.”

내 말에 프린스가 싱긋 웃는다. 그렇게 웃으니 무슨 광고 같다.

“얼마 전에 정기 검사를 받았는데, 검사원분께서 그러시더라고요. 차 진짜 잘 뽑았다고.”

그렇게 말하며 기특하다는 듯 손바닥으로 핸들을 툭툭 친다.

“언제 구입하신 건데요?”

“그게, 학부 2학년 다닐 때였으니까….”

“신차로 구입하신 거예요?”

“알바비 모아놓은 거 전부 다 쏟아부었죠. 그때만 해도 대학생이 이 정도 차 타고 다니는 경우는 없었어요. 친구들도 보통 지금은 안 나오는 경차를 중고로 구입하는 정도였는데, 저는 이 차에 꽂혀서 그냥 질러버렸죠. 제대로 허세 부렸죠.”

그렇게 말하며 또 싱긋.

자동차 회사 뭐 하냐? 당장 프린스 데려다가 광고 찍어라. 안 팔리는 재고차 다 팔 수 있다고!

“처음에는 유지한다고 조금 힘들었는데, 그래도 생각 외로 돈 많이 안 들었어요. 검사원 말처럼 잘 뽑았는지, 엔진과 미션은 소모품만 갈아줬지, 다른 부분에서는 말썽부린 적 한 번도 없고, 참, 여러모로 고마운 차예요. 후배님도 혹시 차 있나요?”

“아니요. 저는 아직.”

있기는 했었어요. 삼각별 GT랬나? 2억 넘어간다고 했는데, 제가 잘난 척한다고 안 받아버렸어요.

그게 지금 어디 갔는지 모르겠고, 가끔씩 서현 씨 차를 빌려 쓰기는 하는데, 그것도 삼각별 달려 있고. 근데 제 차는 아니니까, 공식적으로 제 명의의 차는 없습니다.

뭐 이런 이야기를 굳이 할 필요는 없겠지.

“차는 성인 남성의 장난감이라고들 하는데, 저는 장난감이라기보다 첫사랑하고 비슷한 것 같아요. 장난감은 시간이 지나면 관심에서도 멀어지고, 결국에는 버려지지만, 첫사랑은 오히려 그 반대니까요. 같이 보낸 시간, 쌓은 추억에 비례해서 존재가치가 계속 커지죠. 솔직히 차를 바꿀까 하는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에요. 확실히 요즘 차들은 디자인도 좋고, 편의 옵션도 훌륭하고. 그래서 바꿔볼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이 녀석이랑 여기저기 다닌 거 생각하면, 아직 멀쩡한데 바꾸는 게 이 친구에게 못 할 짓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타다 보니 지금까지 타게 되었네요. 아무튼 첫 차는 돈 생각하지 말고 마음에 드는 녀석으로 하세요. 무조건 자기 눈에 예쁜 것으로.”

씨바, 개멋져!

안 그래도 개잘생긴 사람이 개오래된 차를 운전하는 것도 개간지 나는데, 거기에 첫사랑을 대입한다고?

이건 반칙이지. 그냥 반칙도 아니고 치트급 반칙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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