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75화 (175/271)

175 : 취미는 독서

“그나저나 이제 방학이네요. 오빠 이번 방학 때 뭐 하세요?”

“나? 글쎄. 아직 특별하게 생각한 건 없는데?”

진짜다. 아직 아무것도 생각해둔 것 없다.

“작년 여름방학 때는 뭐 하셨는데요?”

“작년에?”

작년에는 놀았지.

지수랑.

알바할 때 빼고는 지수랑 매일 만나서 매일 놀았다. 친구들 모아서 바다에 놀러도 갔다 왔고, 지수랑 단둘이서 부산에도 놀러 갔었고.

지수가 부모님이랑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로 여름휴가 갔던 5일, 내가 고향에 다녀온 하루를 제외하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지수랑 함께 있었다.

“그냥. 뭐 알바하고, 친구들 만나서 놀고, 그랬어.”

“어디 갔다 오기도 했어요?”

“어. 속초에… 애들이랑. 다 같이.”

“와. 재미있었겠네요.”

“힘들었다는 기억밖에 안 나. 사람은 너무 많지, 물가는 너무 비싸지, 펜션 비용 아껴서 술 먹겠다고 텐트 쳤는데, 덥고 습하고. 거기다 창회 그 자식 덩치는 또 얼마나 크냐. 비좁고, 아우.”

“오빠들끼리만 갔어요?”

“아니. 여자애들도 있었어. 최유라나 뭐.”

“지수 언니도?”

“어. 지수도 있었고.”

뭐, 숨길 이야기도 아닌데, 주저하게 된다.

“재미있었겠네요. 부러워요.”

“부럽긴. 힘들었다니까. 그나저나, 우리 지연 씨는 이번 방학 계획이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음. 저는 이번에 알바를 해볼까 하고요,”

“알바?”

“네. 부끄러운 이야긴데 저 솔직히 알바 한 번도 안 해봤거든요.”

“그게 뭐가 부끄러워.”

한국대에 그런 애들 많다. 알바 같은 거 한 번도 안 해본 애들.

고2 때까지 질풍노도의 시기를 살아온 나나 되니까, 학생 때 전단지도 돌려보고, 햄버거도 만들어보고, 가끔 오토바이 타고 치킨도 배달해보고 그런 거지. 공부만 하는 녀석들은 ‘우리 아들, 뭐 필요한 거 없어? 공부만 열심히 해.’ 같은 우쭈쭈나 받을 줄 알았지, 알바를 하겠다는 생각 한 녀석이 없을 거다.

대학교 들어와서는? 마찬가지다. 과보호 속에서 자란 녀석들이 정글과 같은 알바의 세계에서 최저임금 받아 가면서 버티기가 쉽지 않지.

그러니까 한국대생이 알바한다면 백에 구십구가 과외다.

사실 과외 좋지. 고등학교 내신 쪽은 따로 수업 준비를 할 필요도 없다. 다들 기본 실력이 있으니까. 수능 과외는 힘을 좀 주기는 해야 한다. 평가원 모의평가 킬러 문항 같은 건 준비를 하기는 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뭐 못 할 정도는 아니다.

무엇보다 시간당 페이가 세다. 최저임금?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 이렇게 되는 거다.

생긴 것만 보면 ‘저래도 손재주는 있겠지?’ 소리가 절로 나오는 박찬희도 다른 알바 안 하고 과외 하잖아.

그렇다니까. 다들 온실 속 화초야.

“부끄럽죠. 성인이 되었는데, 아직 부모님께 용돈 타 쓰고.”

지연아, 그거 부끄러운 거 아니야. 서른 넘고도 부모님께 용돈 받아 쓰는 사람 얼마나 많은지 아니?

“그래서 무슨 알바 하려고? 과외? 그거 만만하게 보면 큰일 난다.”

“네? 왜 큰일 나는데요?”

“기 싸움에서 밀리면 지옥문 열리는 거임.”

“기 싸움이요?”

“너도 알지? 고3 때 애들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야만적인지.”

고3 애들이 얼마나 장난 아닌데. 지들 수험생이라고 잘난 척은 드럽게 하면서 공부는 또 안 해요. 공부를 안 하니까 당장은 편한데, 또 우울해져. 우울해지면 그 짜증을 괜히 주변 사람들에게 풀어. 근데 또 고3이라고 다들 우쭈쭈 해줘. 그러니까 이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거지.

지연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녀석들을 처음에 확 휘어잡아야 해. 그게 최우선이다. 만약 실패했다? 그럼 엄마라도 휘어잡아야 해. 어머님도 못 휘어잡았다? 그럼 안 하느니만 못 하지.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야.”

“그렇구나. 하지만 괜찮아요. 저는 과외 안 할 거니까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과외 아니면 뭐 할 건데?”

“서비스업 해보고 싶어요. 카페 같은 거.”

“카페?”

“네. 카페. 바리스타.”

그러면서 라떼를 만드는 시늉을 한다.

나는 말없이 지연이를 바라보다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등허리를 꼿꼿이 피고 목을 가볍게 푼다.

자, 지금부터 카페 알바 일타강사가 진행하는 ‘진상손님학 개론’ 시작 합니다!

***

지연이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나도 안타깝다. 우리 지연이의 순백의 영혼에 내가 현실이라는 잿가루를 떨어트린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제 지연이 너도 알 때가 되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그림자가 생긴다는 사실을 말이지.

“…아무튼, 마감 시간 직전에 술 처먹고 단체로 와서 ‘그거. 그거 있잖아. 내가 맨날 먹는 거. 그거. 그거 가져오라고!’ 이딴 소리 하면 CCTV 전원 뽑은 다음 구석에 몰아놓고 때리고 싶다니까. 이런 사람은 사회적으로 손실을 가져오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이 사람을 때리는 것이 사회정의 구현이지 않을까? 그런 명분이 막 떠올라.”

“저는 ‘그거 가져와!’보다, 카운터 앞에서 ‘음, 뭐 먹을까.’ 하면서 5분 정도 서 있는 사람이 더 싫을 것 같아요.”

역시 똑똑한 지연이. 수업 잘 들었구나.

“그건 심한 것도 아니에요. 정말, 우리 지연이 영혼에 스크래치 날까 봐 말 못 해주는 게 더 많다니까요. 차라리 과외를 해. 남자애들 말고, 여자애들. 여자애들 중에서 좀 순한 애들 있잖아. 지연이 너처럼 착한 심성을 타고난 그런 애를 찾아. 찾아서 과외를 하는 거야. 그래. 내가 찾아줄게. 카페는 안 된다. 절대로!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카페는 절대로 네이버!”

“그런데도 왜 오빠는 계속 하고 있어요?”

“아니. 나는 그냥….”

“그냥?”

사실 그 전에는 생계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고, 지금은 관성으로 계속하고 있지만, 중앙그룹이 내 뒤를 탄탄히 받치고 있어 조만간 그만둘까 말까 고민 중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지.

“…의리?”

“의리요?”

“어. 병진이 형이라고 나랑 같이 알바하는 형이 있는데, 그 인간이 얼마나 답답한 인간이냐 하면 말이지….”

미안해 형. 오늘 형 욕 좀 할게.

***

밥도 먹었고, 차도 마셨고, 그다음은? 집까지 모셔다드려야지.

드디어 오늘 마지막 일정이 끝나가고 있다.

뭐, 그렇다고 힘들다거나 싫다든가, 그런 건 아니다. 솔직히 시험 끝났을 때는 지연이고 뭐고 당장 집에 가서 눕고 싶었는데, 막상 노니까 또 즐겁다.

솔직히 즐겁기도 하고. 초여름에서 한여름으로 넘어가는 7월 초의 밤바람도 좋고.

“뭔가 좀 기분이 이상해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작년 수능 끝나고도 살짝 이런 기분 느꼈었거든요. 진짜 대학 가겠다고 열심히 공부했는데, 합격하니까 뭔가 허무하달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달까? 그래도 그때는 대학 생활이 어떨까? 그런 기대감도 있고, 입학하고 나서는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방학이라고 하니까, 당분간 학교 안 간다고 하니까 살짝 허무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요.”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나는 그냥 수능 끝났다고 방학이라고 그저 신났는데.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너무 없어 보이잖아.

“그럴 때 필요한 게 취미생활이지.”

나는 이렇게 말한다.

“취미요?”

“그럼. 건전한 취미생활이 삶을 얼마나 윤택하게 해주는데.”

이건 내가 이야기했지만 좀 꼰대 같다.

“오빠 취미는 뭔데요?”

“독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지연이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 녀석 보게?

“참나, 나 책방 손자라니까.”

진짜다. 읽을 만한 책만 있으면 한 일주일 정도는 밖으로 안 나가고 집 안에서 책만 보면서 있을 수 있다.

중3 여름방학 때 할아버지 컬렉션 중 하나인 고려원 《영웅문》 3부작 본다고 일주일 동안 밖으로 한 발도 안 나간 적도 있었다.

그때 고향 친구들 사이에, ‘드디어 한수가 할아버지에게 맞아 죽었다’ 같은 소문이 났었더랬지.

“맞다. 그랬죠. 할아버님 서점 하신다고.”

“실망인데. 이거. 우리 지연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요?”

“감성이 풍부한 문학 소년이요.”

눈도 깜빡 안 하고 그렇게 거짓말을 한다.

“영화는 어때요? 영화도 자주 보세요?”

“영화? 아니, 확실히 영화를 그렇게 많이 보는 편은 아닌 듯?”

“왜요? 영화관 손자하고 사이가 안 좋았어요?”

“영화관이 없어. 우리 동네.”

없다. 일단 행정구역상 ‘시(市)’이기는 하지만, 사실 시보다는 읍이 더 잘 어울리는 동네이기도 하고.

옛날에, 한 80년대 후반, 90년대 초반에 그 즈음에는 영화관 비슷한 거는 있었다고 들었다.

5공화국 정권의 3S 정책(Sports, Sex, Screen) 덕분에 에로영화 붐이 일었고, 노골적인 제목의 에로영화 두 편 동시 상영하면 동네 아저씨들이 아줌마들 몰래 보러 가곤 했다고.

하지만 내 기억에 영화관은 없다.

“뭐 영화관이 없는 것도 그렇고, 영화는 연달아 여러편은 좀 피곤하지 않아? 영상에, 소리에, 감각을 전부 동원해서 집중해야 하니까. 한 편 정도는 괜찮은데, 여러 편을 한꺼번에 보면 좀 지친달까? 책은 하루에 몇 권씩 봐도 괜찮은데.”

“하루에 몇 권씩이나 볼 수 있어요?”

볼 수 있지. 정독하는 것만 아니면, 소설 같은 건 두어 시간이면 한 권 보잖아.

“확실히 책방 손자 맞네요. 독서 취미 인정.”

지연이가 그렇게 말해준다.

“우리 지연 씨는 책보다는 영화?”

“네. 저도 책을 좋아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둘 중의 하나 고르라면 영화.”

“그래?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데?”

“액션이요. 화려한 액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아니요. 총기는 좀 별로요. 몸으로, 주먹으로 직접 하는 액션이 좋아요.”

그러면서 허공에다 대고 가볍게 주먹질을 한다.

너, 그거 누가 가르쳤어? 이렇게 예쁜 옷 입고, 누가 그렇게 귀엽게 주먹질하라고 가르쳤어?

“〈아저씨〉 같은 거?”

“〈아저씨〉 좋아요. 재미있었어요. 대사도 재미있고.”

“어떤 대사? 몽땅 씹어 먹어줄게. 그런 거?”

“원빈 말고, 거기 나오는 경찰 있거든요. 내가 예수다. 널 걷게 해줄 거거든. 그런 대사요.”

“…오빠랑 봤지?”

지연이에게 드래곤퀘스트와 파이널판타지를 알려준 오빠, 순수한 지연이를 오그리마로 끌고 들어간 그 나쁜 오빠.

“네. 오빠랑 〈레이드〉도 같이 봤어요.”

“레이드?”

“못 들어보셨어요? 인도네시아 영환데.”

“인도네시아… 혹시, 건물에서 쌈박질하는, 액션 엄청 잔인하다는 그 영화?”

“네. 잔인한 것보다 좀 어지러워요. 카메라를 너무 흔들어서. 그것 빼고는 액션은 참 좋았는데.”

아니, 도대체, 지연이 오빠라는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여동생에게 그런 영화를 보여주는 걸까?

“그리고 저 고마음 영화도 좋아해요.”

“고마음?”

“네. 그 슬픔이 좋아요. 과하지 않은, 하지만 어쩐지 마음을 저미는 그 슬픔이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다행이다. 그래도 우리 지연이 마음속에 아직 소녀의 감성이 살아 있었구나.

“며칠 뒤에 고마음 영화 하나 개봉하는 것 같은데, 같이 보러 갈래?”

“네. 좋아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하며 활짝 웃는다.

그 미소를 보면서 지연이가 영화 배우가 되었다면 고마음의 대척점에 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이렇게 행복하다는 마음이 들게 해주니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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