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 “네. 꼭 두 개씩 먹어요.”
***
과방에서 나온 나는 지연이에게 연락이 올 때까지 내가 맨날 가서 찌질거리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몸은 피곤한데, 조금 전 놀란 것 때문에 정신은 말짱하다. 옛날 생각난다.
나도 참 지수랑 재미있게 지냈었는데…
아니, 아니! 그런 걸 이야기 하는 게 아니야. 그 물리적이고 본능적이며, 원초적이고 관능적인 그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CC라는 거는, 특히 같은 전공 CC라는 건 다른 커플들보다 같이 붙어있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 말은 대부분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한다는 의미이다. 아침에 만나서 같이 밥 먹고, 같이 수업 듣고, 같이 도서관 가고, 밤이 되어 헤어질 때도 같이 집에 간다.
그런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생각해보면 작년 요맘때 덜 힘들었던 이유는 지수가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그거지.
장학금 받아서 지수에게 ‘더 이상 자세한 내용은 생략한다’는 소원을 빌어야겠다는 생각도 한몫했겠지만, 같이 밤새고, 같이 공부하고, 같이 야식 먹고, 같이 시험 보고. 그렇게 1분, 1초도 떨어져 있지 않겠다는 듯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냈기에, 그랬기에, 즐겁고 행복했었던 것이다.
오늘 찬희랑 유라의 모습을 보니 그때가 떠오른다.
지수가 그립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물론, 가끔 생각나기는 한다. 잘 지내는지 잘 적응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할 때가 있다.
지수가 나의 전부였었던 때가 분명히 있었고, 그 시간 동안 그 녀석이 내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였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 지금 우리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다고 해도, 그런 시간이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그렇기에 지수는 아마도 꽤 오랜 시간 동안 내 안에서 좀 더 특별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 거다.
아무튼 지수가 보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그때가 그립다. 불과 1년 전, 하지만 절대로 돌아갈 수 없는 그 1년 전이 갑자기 그립다.
***
벤치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던 나는 지금 셔틀버스 정류장 앞에 서 있다.
지연이로부터 시험이 끝났다고 깨톡이 왔고, 그럼 정류장으로 오라고 했다. 어차피 밥 먹으려면 학교 밖으로 나가야 하고, 그럼 버스를 타야 하니까.
그렇게 정류장에 서서 지연이를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저 멀리서 걸어오는 지연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지연이도 날 보았는지, 손을 번쩍 들고는 종종종 달려온다.
으이구. 귀여운 녀석 같으니.
그런 생각을 하며 다가오는 지연이를 보는데. 보는데….
뭐야? 저 녀석 시험 치고 온 거 아니었어?
나는 당연히 그저께 보았던 지연이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커다란 안경,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 심플한 티셔츠에 청바지 같은 기말고사용 전투복을 입은 지연이를 말이다.
그런데, 지금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지연이의 모습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전투복은 전투복인데, 기말고사용 전투복이 아니라 소개팅용 전투복에 가깝다.
그렇다고 대놓고 ‘나 소개팅 나가욤’ 하고 말하는 그런 과한 꾸밈은 아니고, ‘꾸안꾸’는 꾸안꾸인데, ‘꾸’보다 ‘안꾸’ 쪽에 조금 더 힘을 줘서 자연스러움을 배가시켰지만, 그 안꾸의 자연스러움이 여성스러움으로 승화되는 그런 모습이랄까?
간단히 말하면 예쁘다.
아니, 지연이가 원래 예쁘기는 엄청 예쁘지만, 오늘 저기서 나에게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지연이는 평소보다 조금 더 예쁘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다.
지연이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들 지연이만 바라보고 있잖아.
“오빠, 많이 기다렸죠?”
“어. 많이 기다렸어.”
내 대답에 지연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쿡 하고 웃는다.
“어디 갈까요?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내 팔짱을 낀다.
어머! 깜짝이야!
얘 대담한 거 보게!
***
화장실에서 손을 닦은 후 거울을 바라본다.
거울 너머에 ‘이틀 밤샌 대학생입니다.’라고 말하는 얼굴을 한 내가 서 있다.
진짜 수면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한 거다. 고작 이틀 밤샜다고, 피부 건조해진 거 봐라.
아우. 한 다섯 살은 더 먹어 보이네. 자기 전에 팩 하고 자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손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얕게 떡 진 머리가 내 손길에 따라 부드럽게 웨이브를 만들어낸다.
이거 하난 좋네.
그렇게 대충 정리를 하고, 손을 닦고,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여기가 어디냐 하면 교대역, 그러니까 지연이 집 근처의 초밥집이다.
몇 달 전, 지연이가 사물함을 착각해서 미안하다고 밥을 사겠다고 했던 그 초밥집. 바로 거기다.
내가 여기로 오자고 했다.
첫 번째 이유는 나 편하자고.
지연이랑 밥 먹고 ‘자, 배를 채우는 식사라는 행위가 끝났으니 이제 각자 갈 길 가자꾸나. 빠이!’ 할 수는 없는 거다. 밥 먹었으면 커피도 한잔해야겠지.
아니, 커피는 더 이상은 NAVER. 이틀 동안 한 달 치 카페인을 위장에 쏟아부었더니 카페인 소리만 들어도 욕지기가 올라온다.
아무튼 커피든 차든 뭐든 마시기는 마셔야 할 테고, 그리고 또 바래다줘야지.
솔직히 인정하자. 이거 데이트 비슷한 거다. 그러니까 바래다주는 게 기본 코스에 들어있는 거다.
자, 이런 상황에서, 학교에서 출발해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 후에 밥 먹고, 차 마시고, 또 이동해서 지연이를 바래다주기 위해 교대역까지 간다?
솔직히 피곤하다. 바래다주는 게 싫다는 게 아니고, 물리적으로 피곤한 건 피곤한 거다.
하지만, 애초에 저녁을 교대역에서 먹는다면? 지하철 한 번만 타면, 밥 먹고 차 마시고 데려다주고를 한 방에 끝낼 수 있다.
그렇게 지연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그다음에는?
택시 타고 집에 가면 된다. 2호선 타고 빙 돌 필요도 없이, 성수대교 건너면 금방이다.
깔끔하잖아. 아주 깔끔하다고. 그런 계산으로 ‘지연아, 저번에 거기 초밥집 갈까? 너네 집 근처, 거기 맛있었는데.’라는 그림을 그린 거다.
아, 물론 단순히 나 편하자고 여기로 오자고 한 것만도 아니다. 여기 음식도 아주 훌륭했다는 계산도 있다.
물론 그때는 초밥 열두 피스에 만오천 원짜리 런치 먹었었는데, 점심때만 파는 메뉴라 당연히 저녁 시간인 지금은 안 되니, 특별히 1인당 5만 원이나 하는 오마카세를 주문했다.
이 정도 사줄 돈은 있다.
그리고 김창회 생일에 100만 원을 태웠는데, 우리 지연이를 위해서 10만 원을 아까워할까?
특선을 주문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우연히 순번이 되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방을 배정받았다.
그리 크지 않은 밀폐된 공간에 지연이와 단둘이 앉아 있으니 이거 좀 어색하구만.
뭐 싫다는 건 아니고.
“어땠어요? 이번 시험?”
지연이가 물어본다.
“음. 처음 두 개는 개애애애애망했고, 수요일에 본 세 번째, 네 번째는 좀 덜 망했고, 마지막 두 개는 그럭저럭. 지연 씨는?”
“음. 뭐 저는 전부 다 그럭저럭?”
“그럭저럭 4.3?”
“아니요. 저 그 정도로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
“4.3 받으면 이상한 사람이야?”
“이상하지 않을까요?”
“이상하지. 확실히.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났다. 너 우리 학번 과탑이 누군지 알아?”
“아니요. 누군데요?”
“창회.”
“창회 선배요? 진짜요?”
“놀랐지? 나도 얼마 전에 알았다니까. 솔직히 지금도 못 믿겠어. 아무리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해도 김창회가 과탑이라니.”
“그럼 창회 선배가 4.3인 거네요?”
“그렇겠지? 그 자식 이번 시험은 조졌으면 좋겠다.”
우리는 대학생에게는 엄청나게 비싼 5만 원짜리 초밥 오마카세를 먹으면서, 우울한 시험 이야기를 했다.
막 시험을 마친 대학생답게 말이지.
***
밥을 먹고 나온 우리는 근처의 카페-역시 사물함 사건을 계기로 지연이랑 처음 단둘이 만났던 그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나는 커피 같은 자본주의의 똥물을 주문하지 않았다.
시험 기간 동안 커피와 액상과당을 얼마나 때려 부었는지, 신경계가 아직까지 빠릿하게 깨어있는 느낌이다.
이럴 때는 허브차 계열이 좋기는 하지만, 안 그래도 피곤 수치가 높은데 캐모마일 같은 거 마셨다가는 바로 낙다운 될 것 같으니, 만만한 생과일 스무디로 주문했다. 대따 셔도 괜찮으니까 설탕하고 시럽 빼달라고 백번 강조하는 것도 빼먹지 않고.
지연이도 늦은 밤이라 그런지 디카페인 라떼를 선택했다.
“그거 디카페인이라고 해도 카페인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0에서 7mg 정도의 카페인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입니다.”
내가 카페 알바답게 또 아는 척을 한다.
“우와. 그럼 일반 커피에는 카페인이 얼마나 들어가는데요?”
역시 우리 착한 지연이는 또 이렇게 잘 받아준다.
“70에서 많게는 150.”
“그럼 많아봤자 10분의 1이네요.”
“그치. 10분의 1. 아주 미미한 수치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카페인이 전혀 안 들어가는 건 아니지. 접두사 ‘De’가 붙어있으면 ‘카페인 없어용’처럼 오해하기 딱 좋잖아. 그러니 사실 디카페인 커피에는 카페인 조금은 들어있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안 그러지. ‘카페인 없어용’ 그런 척을 하는 거지.”
“제로 칼로리랑 비슷하네요.”
그런 씨잘데기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식후의 포만감과 여유로움을 만끽한다.
너무 피곤해 아타락시아 상태는 아닌 것 같지만, 아무튼 시험도 끝났고, 이 여유가 참 좋다.
“그나저나 오빠. 오늘 잘 먹었어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 꾸벅 숙인다. 오늘 저녁 내가 샀거든.
지연이가 산다는 거, 웃기지 말라고 하며 내가 체크카드 한번 긁어버렸다.
부가세까지 11만 원이나 하는 저녁을 후배에게, 그것도 지연이에게 얻어먹을 수는 없지.
“어땠어요?”
지연이가 묻는다.
“솔직히?”
“네. 솔직히.”
“솔직히 난 잘 모르겠더라고.”
만오천 원에 열두 피스가 나오는 런치를 먹을 때는 ‘이 정도면 진짜 가성비 최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늘 먹은 5만 원짜리 오마카세랑 그때 먹은 런치랑 차이를 모르겠다.
아, 물론 종류도 더 다양하고, 생선의 질도 더 높다고 하는데, 조금 알 것 같기도 한데, 참치는 확실히 기름지고 부드러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알바 하는 대학생 입장에서 가성비를 생각 안 할 수가 없고. 가성비의 관점에서 따진다면 좀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1인당 5만 원이면 형님네 정육식당에서 배가 터질 때까지 고기를 먹을 수 있는데 말이지.
“저도요. 맛은 있는데, 너무 비싼 것 같아요.”
지연이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렇게 말한다.
“다음에는 런치 먹자. 두 개 먹자. 너랑 나랑 런치 두 개씩 먹어도 6만 원밖에 안 해.”
“네. 꼭 두 개씩 먹어요.”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는 지연이.
인간적으로 이 녀석 진짜 너무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