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73화 (173/271)

173 : 내일 체력을 대출해봅니다 (2)

***

누가 그랬다. 새벽 3시라는 시간은 사람을 가장 감성적으로 만든다고. 썸 타고 있으면 그 시간에 ‘자니?’라고 보내라고.

하지만 그 새벽 3시가 시험 기간이라면? 그것도 며칠째 도서관에서 날밤 까는 시험 기간의 새벽 3시라면?

감성적? 웃기는 소리. 가장 본능에 충실한 시간이다.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책상의 머리를 박는 사람들이 나오는 시간이고, 도대체 이 망할 학점이라는 것이 뭐길래 사람을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러한 분노를 정신력으로 승화하기 위해 카페인을 충전하기 위한 시간이고.

지금 나처럼 말이지.

나는 도서관 광장 앞에 서 있다. 그런 내 손에는 시험 기간 동안 24시간 열리는 카페에서 사 온 커피가 들려있다.

연유가 들어간 콜드브루에 투 샷 추가. 오늘의 약이다.

기본적으로 차가운 물로 오랜 시간 우려내는 콜드브루는 짧은 시간에 열과 압력으로 추출하는 에스프레소 샷보다 카페인 함량이 높다. 적게는 1.5배에서 많게는 4배까지.

카페인 덩어리라는 이야기지.

그런 고카페인 콜드브루에 우유를 농축해 만든 연유를 넣는다. 100g에 300칼로리가 넘어가는 고농축 과당을 첨가하는 거다. 그러면 고카페인+고과당 음료가 만들어진다.

거기에 에스프레소 샷을 추가하면?

카페 메이드 붕붕드링크가 만들어지는 거다.

‘누가 이런 끔찍한 혼종을 만들어냈단 말인가!’ 소리가 절로 나오는 이 물건을 현직 카페 알바인 나로서는 커피라고 부르지 않겠다.

카페인에 액상과당을 더하고, 거기에 또 카페인을 첨가한 이 혼종은 약이지.

아니, 독이다. 독인데, 약처럼 사용하는 거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손에 든 컵을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쓰고 달고, 또 쓰고, 달고, 그래서 역하고.

하지만 에너지가 한 방에 훅하고 올라온다.

가짜 에너지다. 충분한 수면과 제대로 된 식사에서 나오는 진짜 에너지가 아니라, 몸에서 억지로 쥐어 짜내는 가짜 에너지다.

술이랑 비슷하다. 술이 주는 행복이 가짜 행복이다.

술을 마시면 측중격핵에서 행복을 관장하는 엔도르핀 분비가 증가한다. 엔도르핀 분비가 증가하면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단지 술 먹었다는 이유만으로 만족감이 커지는 거다.

세상 즐거울 일 없고, 행복한 일 없는 사람들이 자꾸 술에 의존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 가짜 만족감, 가짜 행복이다.

지금 내 몸에서 ‘오오오오!’ 소리치며 올라오는 에너지도 가짜 에너지다.

내일의 체력이고, 모레의 정신력이다.

하지만 어쩌냐. 가져다 써야지. 당장 시험이 코앞인데.

나는 그렇게 합리화를 하면서 다시 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런 내 눈에, 도서관 안에서 이중훈과 박찬희가 좀비 같은 걸음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게 보인다.

손에 비닐봉지가 들려있는 걸 보니 컵라면이라도 먹을 생각인가 보다.

“혹시 약 없냐?”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이중훈이 나에게 그렇게 물어본다.

“약? 무슨 약.”

“각성제 같은 거. 암페타민 들어있는 거면 아무거나 다 좋은데.”

이중훈이 그런 개소리를 한다.

“이거나 마셔라.”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 손에 들린 컵을 건네주었다.

이중훈은 컵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신 다음 얼굴을 찡그린다.

“…뭐야 이게?”

“콜드브루에 연유와 투 샷 추가.”

내 말을 들은 이중훈은 독배를 원샷 하기 전 살짝 혀로 찍어 먹어본 소크라테스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또 한 모금 더 마신다.

그리고는.

“약보다 나을지도.”

그렇게 중얼거린다.

“…너도 약 먹어봤냐?”

내가 이중훈에게 물었다.

이중훈이 말한 약, 소위 ‘집중력 올려주는 약’으로 소문난 약.

정확히는 각성제, ADHD 치료용 암페타민과 덱스트로암페타민의 혼합제제.

당연히 한국에서는 제조는커녕 수입, 유통, 판매 전부 금지다.

옛날, 아아아주 옛날 옛적, 우리 선배들의 선배들의 선배들이 학력고사라는 배틀로얄을 치르던 시절, 강남 엄마들 사이에서 ‘공부 잘하게 만들어주는 약’으로 소문이 나서 강남에 유행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옛날이야기 같지만 요즘도 암암리에 밀수되어서 들어오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고. 얼마 전에 유명 정치인의 따님께서 몰래 들여오다 걸린 것도 그 약이고.

“야. 우리 아빠가 의사다.”

이중훈이 그렇게 말한다. 의사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그런 약을 먹이겠느냐는 말이지.

뭐 실제로 세계 금융가의 중심인 월스트리트에서 근무하는 금융인들도 과도한 업무량을 처리하기 위해서 남용하고 있다고 하니 효과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안구건조증, 입 마름, 피부 건조 같은 부작용은 둘째 치고, 불안장애, 편집증, 심하면 조현병까지 갈 수도 있다고 하는데, 좋은 대학 보내겠다고 자식들 앞으로의 인생을 나락으로 밀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지.

“그러면서 왜 그딴 이야길 하는데.”

“그냥 개드립 친 거지. 근데 약보다 이게 더 부작용 클 것 같은데?”

이중훈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내가 만든 끔찍한 혼종을 한 모금 홀짝인다.

“야. 그만 마셔. 그걸로 시험까지 버텨야 해.”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이중훈은 ‘하나 더 사 와라. 돈 줄게.’ 같은 소리를 하며 계속 내 혼종을 홀짝인다.

박찬희도 옆에서 나도 한 입만. 이러고 있고.

에휴. 이 불쌍한 청춘들아.

20대의 빛나는 나이에 우리 왜 이러고 있냐.

***

끔찍한 혼종을 마셔가며 그렇게 버티고 버텨 아침 해를 보았다.

졸다, 책 보다, 세수하고, 또 혼종 만들어 마시고,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드디어 마지막 시험까지 끝났다.

48시간.

누구에게나 동일한 48시간이지만, 나에게는 마치 480년처럼 느껴지는 길고 끔찍한 시간이었다.

하얗게 불태웠다. 제대로 하얗게 불태워 버렸다.

이게, 공부도 습관이라고, 작년에는 그래도 고3 때 미친 듯 공부하던 습관이 남아있어서인지, 이틀 정도 밤새는 건 뭐 그렇게까지 힘들다는 생각은 안 들었었는데, 올해는 체감적으로 작년보다 한 열 배는 더 힘든 것 같다.

공부하겠다고 앉아 있어도, 좀만 지나면 잡생각 들고, 잡생각 들면 졸리고, 졸리면 ‘그냥 깔끔하게 자고 내일 할까?’ 하는 유혹이 찾아온다.

유혹도 그냥 ‘아몰랑. 그냥 내일 해.’ 같은 막무가내식의 유혹이 아니다.

‘자, 봐봐. 지금 졸리지? 지금 이렇게 졸린 상황에서 책을 본다고 해서 그게 머리에 들어가는 게 아니야. 너무 비효율적이지. 그러니까, 일단 자는 거야. 일단 자고, 내일 쌩쌩한 머리로 더 열심히 공부하는 거지. 그게 더 효율적이라니까?’ 같은 논리적인 유혹을 해댄다.

솔직히 졸라 솔깃한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저 유혹이라는 놈이 대한민국 기자님들이랑 비슷하다는 거지. 일단 질러는 놓는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거다.

해야 할 공부량 대비 시간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쪽 면만, 자기들이 보여주고 싶고, 이야기하고 싶은 면만 열심히 강조한다는 거지. 논리정연한 척을 하면서.

나중에 ‘야! 니 말대로 했더니, 망했잖아! 시간 개부족해서 결국 끝까지 정리도 다 못했잖아!’ 소리 해봤자, ‘나는 방향만 제시했을 뿐이지. 선택은 님이 하셨음. 아몰랑.’ 이러겠지.

그리고 단순하게 잠을 자라는 유혹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또 다른 유혹도 있었다.

신력. 할아버지에게 받은 신묘한 그 능력, 나만이 사용할 수 있는 그 능력을 사용하라는 아아아아아주 달콤한 유혹.

까놓고 말해서, 내가 알아내겠다고 한다면, 이번 시험 문제가 뭔지 알아내겠다고만 한다면 알게 되었을 것이다.

아니, 시험 문제를 알아낼 필요도 없다. 시험장 들어가서 ‘답은 뭐냐’ 하면 절대 내 의지를 곡해하지 않는 신력이 답을 알려줬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교수님이 나에게는 A+’ 이래 버리면 백지를 내도 된다. 그건 아닌가?

아무튼, 능력만 쓰면, 도서관에 처박혀서 꼬질꼬질한 상태로 카페인 과다 충전해가면서 밤을 지새울 필요가 없단 말이지.

하지만 당연히 안 했다.

솔직히 비겁하잖아.

도서관에 있는 다른 학우들, 저렇게 눈에 핏발 터져가면서 열심히 공부하는데, 내가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서 얍삽하게 ‘저는 이만 자러 갑니다. 고생들 하세요오~’ 이 지랄을 할 수는 없잖아.

롤스 형이 그랬다. 좋은 집에서 태어난 것, 즉 재능을 받고 태어난 것은 자연적 사실이고, 재능으로 벌어들인 부를 분해하는 것은 사회적 규칙이라고.

좀 넓게 해석하면 재능은 자신만의 것이 아니고, 그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해서도 안 된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롤스 교수의 정의론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나는 누구처럼 ‘니들 부모를 원망해. 좋은 집에서 태어난 것도 재능이야!’ 같은 미친 소리를 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 쌩으로 버티는 수밖에.

아무튼 토막잠으로 자면서 결국 이틀 밤 동안 영혼과 체력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 결과는?

당연히 아직 모르지. 모른다. 성적이 나와봐야 알지.

하지만 성적과 관계없이 조금은 개운한 그런 기분이 든다.

노력했고, 시험 문제를 보고도 당황하지 않았다. 답안도 나름 나쁘지 않게 써냈다는 생각도 든다.

뭐, 성적이야 어찌 되었든, 일단 노력했고 보람을 느꼈다면, 이게 진짜 만족감이다. 술이 주는 가짜 행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행복이지.

잘했어. 한수. 아주 칭찬해.

***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집에 가고 싶다. 흔들리는 지하철 말고 택시 뒷좌석에 앉아 가고 싶다.

이대로 집에 가서 이틀 동안 입고 있던 옷 다 벗어서 세탁기에 던져놓고, 시원하게 샤워 때리고 그대로 침대에 눕고 싶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48시간 동안 자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지연이와의 약속이 있었으니까.

지연이가 시험 끝내고 나올 때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다. 아니, 한 시간도 안 남았네.

과방 소파에 잠깐이라도 자두자. 그런 생각으로 과방 문을 열었는데….

내가 누우려는 소파에 이미 누가 앉아 있었다. 박찬희였다.

최유라도 함께….

아니, 앉아 있을 수 있지. 앉아 있을 수 있다. 과방 소파인데, 누구나 다 앉을 수 있지.

근데 문제는 두 사람의 자세다.

나란히 앉아 있는데, 허벅지가 밀착해 있다. 무게중심이 서로를 향해 있다는 말이다.

무게중심이 가깝다는 의미는 뭐다?

뭔가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은밀한 공간에서 남녀가 단둘이 남아있을 때, 할 수 있는 그런 무언가를 말이다.

유치원생도 아니고 뽀뽀 같은 걸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테고, 최소 키스다.

척추동물의 입 안에 있는 길고 부드럽고 촉촉한 근육 덩어리,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혀’라고 부르는 그 흉측한 것을 이용해, 설왕설래, 說往說來 아니고 舌往舌來 했다는 이야기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찬희 입술이다. 평소처럼 쩍쩍 갈라진 논바닥 같은 입술이 아니라, 물기 잔뜩 머금은 갯벌처럼 촉촉하다.

또 다른 증거도 있다. 찬희 놈의 왼손이다.

위치가 어색하다. 문이 열리기 전에 저 손의 위치가 다른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다. 적어도 뒷짐은 아니라는 것에 내 전 재산을 걸 수 있다.

이 녀석들이! 신성한 과방에서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냐!

그렇게 소리쳐주고 싶지만, 그 신성한 과방에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요것도 하고 조것도 한 내가 뭐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고.

“어! 방해해서 미안.”

나는 그렇게 말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

거참. 민망하구만.

나중에 애를 낳으면 꼭 방문 열기 전에 노크하는 습관을 들여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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