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 내일 체력을 대출해봅니다 (1)
학사일정에 ‘언제부터 언제까지 기말고사입니다.’라고 쓰여있지는 않지만, 매년 이맘때쯤 캠퍼스에는 보기 드문 진풍경이 펼쳐진다.
여학생들은 화장은커녕,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얼굴로 머리 질끈 묶고서 영혼 없는 좀비처럼 걸어 다니고 있다. 남자애들은 현자타임이라도 온 얼굴로 ‘군대나 가야겠다….’ 같은 말을 끝도 없이 중얼거리고 있고.
‘후후후. 고작 저 정도로 힘들어하다니. 귀여운 녀석들이군.’이라는 표정을 한 대학원생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우울한 시기이다.
물론 나도 우울하다. 지금까지 시험을 다 말아먹었거든.
작년에는 이 정도로 우울하지는 않았다. 공부 열심히 했거든.
당시 여자친구 지수랑 내기를 했었다.
누가 더 학점 잘 받는지, 진 사람이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로.
그래. ‘무엇이든 소원 한 가지 들어주기!’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나는 영혼을 불사를 수 있었다.
결과는? 당연히 내가 이겼다.
내가 말한 소원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후후후.
아무튼, 작년에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기에 시험 끝나고 나오면 뭔가 뿌듯하고, 후련하고 그런 기분이 들었더랬다.
시험 조졌다고 울상인 애들에게 ‘길고 긴 인생에서 그깟 학점이 뭐가 중요하냐.’ 같은 소리도 할 수 있었고.
그런데 올해는? 내가 딱 시험 조졌다고 울상인 그 꼴이다.
작년에는 참 몹쓸 짓을 했구나. 지금 누가 나에게 와서 ‘인생에서 그깟 학점이 뭐가 중요하냐?’ 같은 소리 하면 바로 오른손 훅으로 턱 돌려버린다.
에효. 뭐 이미 조진 건 조진 거고, 아직 두 과목 남아있으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지.
어떻게? 뭐, 방법은 하나뿐이다.
철야. 오직 철야만이 있을 뿐이다.
따뜻한 집? 포근한 침대? 달콤한 잠? 그런 건 시험 기간에는 전부 사치일 뿐이다. 원래 시험 기간에는 물 대신 에너지 드링크로 연명하며 내일 쓸 체력을 오늘 미리 땡겨다 쓰는 거다.
***
점심시간이었지만, 지금은 밥보다 잠이 더 고팠다.
과방 소파에서 잠깐 눈이라도 붙여야겠다는 생각으로 과방 문을 열었는데, 박찬희와 이중훈이 내가 누울 소파에 앉아 있다.
소파에 나란히, 어깨를 딱 붙이고 앉아 욕망이 가득한 시선으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다.
이어폰도 한 쪽씩 나눠 끼고서 말이지.
“뭐 하냐?”
내가 그렇게 물었지만, 저 녀석들은 내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다는 듯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있다.
“뭐 보냐? 야동 보냐? 니들 아무리 상식이 없는 짐승 같은 놈들이라고 해도, 학교에서, 그것도 시험 기간에 야동 같은 게 보고 싶냐?”
나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그 녀석들에게 다가가서 핸드폰을 바라봤다.
뭐야? 야동은 아니네?
녀석들이 보고 있는 건 영화 예고편이다.
뭐야. 이 녀석들 영화광이었어? 시험 기간에 예고편까지 찾아볼 정도로 영화를 좋아하는 놈들이었어? 그렇게 교양 있는 놈들이 아닌데?
그런 생각으로 녀석들이 보는 영상을 보니 뭔지 알겠다.
그거네. 고마음 신작 예고편이었네.
***
고마음,
대한민국의 여배우. 아니, 정확히 말하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 여배우.
아직 스물네 살밖에 안 된 어린 나이임에도, 아름답고 매력 있는 여배우들이 넘쳐난다는 영화판에서 명실상부 첫 번째라고 인정받고 있는 배우가 바로 고마음이다.
아직 엄마 손을 잡고 다녀야 할 여섯 살의 나이에 아역 데뷔. 그렇게 출연한 영화가 대한민국 영화사 역사상 네 번째 1천만 관객 작품이 되었다.
물론 아역이자 조연인 여섯 살 꼬마 숙녀의 연기가 천만 관객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니지.
그렇지만, 어딘가 모르게 꼬옥 안아주고 싶은, ‘국민 막내여동생’이라는 이명이 붙은 꼬마 아이의 이름이 ‘고마음’이라는 사실을 전 국민이 알게 되었다.
당시 영화판에서는 혜성처럼 등장한 여섯 살 연기 천재의 미래에 대해 관심이 많았나 보다. 지금도 ‘아역배우 고마음’이라고 검색하면 당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의 미래를 점치고 있었다.
대한민국 대표 아역에서 출발해 미래 한국 영화계의 재목이 될 것이라는 전망, 아니면, 다른 아역들처럼 그 이미지에 매몰되어 은막 뒤로 사라질 것이라는 예상.
서로 정반대의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두 의견의 공통점도 있었다.
청소년 시절의 연기 경력이 중요하다는 것. 그것이 공통된 의견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영화 전문 기자라는 사람들의 무책임한 기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여섯 살 연기 천재 고마음은 모습을 감추었다.
‘천만 영화에 출연한 아역’이라는 타이틀만을 남겨두고, 철저히 대중들에게서 모습을 감춘 것이다.
당연히 대중들은 빠르게 그 이름을 잊어갔다. 그렇게 14년이 흐르고, 사람들은 신인배우 ‘고마음’을 만나게 된다.
대한민국에서 로맨틱코메디라면 둘째가라면 서럽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로코 전문 감독의 신작 주연에 스무 살 고마음이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다.
당연히 ‘국민 막내여동생, 성인 연기로 은막 복귀’ 같은 자극적인 기사가 인터넷을 달궜다.
그런 낚시성 기사가 아니었더라도 고마음의 복귀는 충분히 이슈가 되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고마음’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대중이 처음으로 보인 반응은 호기심이었다.
이름은 남아있지만, 어떻게 생겼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14년 전의 꼬마 아이가 스무 살이 되었다? 과연 얼마나 예쁘게 컸을까?
고작 그 정도의 호기심이었다.
그 정도의 호기심에 대한 대답은 8백만 관객 동원과 대한민국 영화사 사상 최초 ‘신인상과 여우주연상 동시 수상’이었다.
그해 겨울은 ‘고마음’이라는 이름이 온 나라를 휩쓸고 다녔다. 국민 막내여동생은 국민 짝사랑녀가 되어 있었다.
고작 스무 살에 불과한 신인 여배우가 대중들에게 안긴 충격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녀의 두 번째 영화가 개봉되었고, 그해 한국 영화 중에서 유일한 해외 영화제 초청작이 되었다.
상영이 끝난 후, 고마음에 대한 인상을 묻는 질문에 심사위원장은 ‘tristitiam qui non potest abire(빠져나올 수 없는 슬픔).’이라는 한 문장을 남겼고, 그 한 문장은 고마음이라는 이름을 전 세계 영화계에 각인 시켰다.
그 이후, 그녀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여배우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녀석들이 보고 있던 영상은 그런 고마음이 세 번째로 출연한 영화의 예고편이었다.
***
녀석들은 영화도 아니고, 예고편을 무슨 성화(聖?)라도 보는 듯 집중해서 보고 있다.
“진짜, 이름 잘 지었어. 태어나줘서 고맙지 않냐?”
1분 30초 길이의 예고편이 끝나자 이중훈이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말한다.
고마음이 니 여자친구냐? 태어나줘서 고맙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박찬희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재생 버튼을 누른다.
이 자식들, 1분 30초짜리 예고편을 몇 번이나 돌려볼 생각인 거냐?
그런 생각을 했지만, 나도 말없이 예고편을 봤다.
확실히 예쁘긴 하네. 아니, 예쁘다는 말로는 뭔가 부족하다.
작은 화면으로 보는 짧은 예고편인데도, 심사위원장이 극찬했다는 그녀 특유의 슬픔이 화면 너머로 은은하게 배어 나온다.
영화 촬영을 제외하면 대외 활동이 거의 없는 그녀이기에, 오히려 이번 영화는 개봉 전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고, 거기에 고마음 캐스팅이 확정되면 투자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소리가 충무로에 흘러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럴 것도 같다. 나 같아도 돈 있으면 투자하지 않았을까?
잠깐, 중앙그룹도 엔터 계열사 있지 않나? 혹시 투자 안 했을까?
투자자 명목으로 고마음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
예고편을 한 두어 번 더 보고, 이중훈과 박찬희가 ‘고마음이랑 결혼할 수 있다면 어디까지 가능한가?’ 같은 미친 소리를 한 30분 듣고 나서야 겨우 소파를 차지할 수 있었고, 잠깐이나마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소파에 누워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것이, 거의 두 시간 가까이 잠들어버렸다.
잠깐이나마 눈을 붙였지만 소파에서 선잠을 잤기 때문인지, 전혀 개운하지가 않다.
소파라서 그런 것도 있고 뭔가 꿈도 꾼 것 같은데, 무슨 꿈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건 야한 꿈은 아니고, 어쩐지 그리운 그런 느낌만 살짝 남아있다는 거. 뭔가, 한복이 나온 것 같기도 한 것 같은데….
뭐 아무튼 그래도 개운하지는 않지만, 그것도 잠은 잠이라고 수면욕은 줄어들고 또 다른 욕구인 식욕을 느끼기 시작했다.
성욕이야 뭐, 맨날 함께하는 거고….
성욕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식욕은 당장 해소할 수 있으니,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학생 식당으로 갔다.
탄수화물이다. 잠든 두뇌를 다시 회전시키기 위해서는 탄수화물이 필요하다.
확실히 점심시간이 많이 지나서 그런지 학생 식당이 조용하다.
우거지갈비탕을 받아 들고 대충 적당히 앉아 추노꾼 대길이처럼 막 우걱우걱 먹으려고 하는 찰나!
“오빠도 이제야 점심?”
그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지연이다.
화장 안 한 얼굴,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 그리고 커다란 안경.
“오빠, 좀만 기다려줘요. 저도 금방 밥 받아 올게요.”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밥을 받으러 종종종 뛰어간다.
하아. 저 녀석. 저거.
반칙 아냐?
왜 예쁜데?
시험 기간인데 왜 너만 예쁜 건데?
***
지연이는 금방 음식을 받아왔다. 나랑 똑같은 우거지갈비탕.
아, 배고프다. 그렇게 말하고는 밥을 국에 말아버린다.
녀석. 국밥 먹을 줄 아는구나. 역시 배운 여자.
“그나저나 너 원래 안경 썼었어? 먹고 말해. 다 씹고 말해!”
내가 지연이에게 묻자, 입안 가득 음식물을 우물거리던 지연이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본다.
그리고는 열심히 우물우물하더니 꿀떡 넘기고는 히, 하고 웃는다.
하지 마. 심장에 나빠. 그거.
“아니요. 저 안경 안 써요. 눈 좋아요. 양쪽 다 1.5, 1.5.”
그러면서 엣헴 하고 등을 편다.
“근데 웬 안경?”
“아, 이거 보안경이요. 청색광 막아준다고 해서. 아무래도 시험 기간에는 컴퓨터도 많이 보고, 인공적인 빛 아래에서 책을 많이 봐야 하니까 아빠가 써보라고 해서요.”
유 선생님께서?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나는 꿀꺽 삼켰다.
큰일 날 뻔했네.
공식적으로 나는 지연이가 유 선생님의 영애인 거 모르는 상태다. 그렇게 유 선생님과 합의를 보았다.
“이상해요?”
“어. 이상해.”
“어떤데요?”
“평소보다 더 귀여워.”
내 말에 지연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오빠는 참’ 그런 소리를 하며 숟가락을 들어 올린다.
놀리는 건 일단 나중에 하고, 밥부터 먹자. 그렇게 나도 밥을 먹는데, 지연이가 물어본다.
“오빠는 몇 과목 남았어요?”
“두 개. 둘 다 전공.”
내 말에 지연이가 불쌍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너는?”
“저도 두 개요. 근데 다 교양이에요.”
1학년 교양은 껌이지. 그건 시험도 아니지.
하지만 그런 말을 할 정도로 분별없는 인간은 아니다.
“그러면 언제 끝나요?”
“내일모레. 너는?”
“저도요. 5시에 마지막 시험이요.”
“나는, 4시.”
그러니까 지연이의 눈이 반짝 빛난다.
“오빠, 그럼 그날 저녁 같이 드실래요?”
저녁? 저녁을 먹자고?
아니. 안 되겠는데?
너랑 같이 밥을 먹고 싶지 않다는 말은 아니고, 내가 이틀 철야를 할 생각이거든? 당연히 그날 내 상태가 엉망진창일 것 같거든. 옷도 안 갈아입었을 거고, 몸도 마음도 엉망진창이 되어 있을 테니까. 밥이 넘어갈 상황이 아닐 거야. 잠이 더 고플 것 같은데?
그리고 너랑 저녁 먹으려면 내가 한 시간 기다려야 하잖아!
하지만 내 대답은.
“그럴까? 저녁 같이 먹을까?”
나도 모르겠다. 왜 이렇게 말했는지.
“넵! 맛있는 거 먹어요. 시험 끝난 기념으로 진짜 맛있는 거 먹어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하고는 보는 사람이 행복해지는 미소를 짓는다.
저거 때문이다. 저 미소 때문이다.
저 미소를 보여줄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그러자고 대답한 것이다.
아….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