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 은혜갚는 연대보증
***
어김없이 점심시간은 찾아왔고, 중요한 의식인 점심 식사를 위해서 승환이와 학생 식당에 왔다.
오늘의 학생 식당 한식 메뉴는 강된장 비빔밥!
건강에도 좋은 강된장 비빔밥은 나도 좋아하지만, 오늘은 타락하고 싶은 기분이니까 돈가스 정식이다!
자리에 앉아 어제 변호사 만났다. 니네 아버지 회사 사람도 같이. 정현식이라고 하더라.
그렇게 알려주자 젓가락으로 열심히 비빔밥을 비비던 박승환이 놀란 눈으로 그렇게 물어본다.
“삼촌을 만났다고?”
“그분이 삼촌이셔?”
“…진짜 삼촌은 아니고.”
삼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조금 얼버무리더니, 그 중년 남자분에 대해 설명해준다.
승환이 아버님의 일종의 파트너 같은 분이라고. 두 분이 젊었을 때부터 함께했고, 지금까지 같이 일하고 계시고.
그리고 그분이 그분이란다. 처음 제이슨 마약 구매 증거 사진 전달해 준 사람.
용역 깡패 장영호랑 담판 지으러 갔을 때 전화했던 분도 그분이고, 박승환 어릴 적에, 친구 돕겠다고 아버님 찾아갔을 때 도움 준 분도 그분이고. 그리고 윤기훈 그 녀석 키워보겠다고 데려간 분도 그분이셨다네.
“우리 학교 나오셨다고 안 했냐? 그분?”
내가 물었다. 그런 이야기 했었던 것 같은데.
“어. 우리 학교 선배님이시다. 91학번.”
“…대선배님이셨네.”
“넌 죽었다. 그 삼촌이 얼마나 악랄한데. 조만간 집합이다. 92부터 우리 바로 위 학번 선배까지.”
박승환이 그렇게 개소리를 한다.
한국대가 무슨 해병대도 아니고, 무슨 집합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니, 그리고 예전에 윤기훈이 데려간다고 했을 때, 그 삼촌분은 아버지와는 달리 본성이 선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라서 기훈이를 무슨 인간 흉기 같은 걸로 키우지는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냐? 니 입으로?
아니, 그건 넘어가고. 아무튼, 다음에 또 뵙게 되면 예의를 차려야겠다. 연장자이시며 선배님이시니 조금 더 깍듯하게, 그렇게. 어제 뭐 실수한 거 없지?
“그나저나 삼촌이 왜?”
승환이가 비빔밥을 뜨며 그렇게 묻는다.
“아, 다른 게 아니고….”
나도 돈가스를 썰면서 어제 들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변호사는 제이슨은 집행유예로 나올 것 같지만 그 집안은 풍비박산 났고, 덤으로 정당도 하나 같이 날아갈 것 같다고 이야기해 줬고, 니네 삼촌은 우리 말썽꾸러기 제이슨이 다시 약을 할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뭐 그런 내용이었다.
대학생들이 학생 식당에서 돈가스 정식을 먹으면서 하기에 적절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밥 먹으면서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잘됐네.”
박승환의 반응이다.
“잘된 건가?”
“잘된 거지. 모든 것은 계획대로. 다음 계획이 뭐였지? 이제 제이슨이 현생 안녕~ 이세계 환생을 기도하며 트럭에 몸을 던지는 거였나? 그나저나, 왜 불쌍해?”
“아니.”
“우리 한수라면 그 트럭을 직접 운전할 생각을 해야지. 불쌍해하면 안 되지.”
“고작 제이슨 정도로 손 더럽히고 싶지는 않은데.”
“그런데 왜 그래?”
“뭐가?”
“표정.”
“표정?”
“어.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
승환이가 그렇게 물어본다.
역시 예리한 녀석, 사람의 심리를 잘 캐치해 낸다.
녀석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 것이, 사실 조금은 마음에 어둠이 껴있는 상태였다.
제이슨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 다른 이유, 정확히 말하면 승환이 때문이지.
“별거 없어.”
나는 그렇게 대충 둘러댔다.
박승환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다. 뭐, 그런 눈으로 바라보면 지가 어쩔 거야.
***
오후 수업을 마치고 오랜만에 도서관으로 간다. 다음 주부터 시험이다. 기말이 코앞이다.
우리 학교는 다른 대학처럼 딱 정해진 학사일정 같은 게 없다. 언제부터 언제까지 중간고사, 언제부터 기말 이렇게 정해진 게 아니고, 각 과의 재량에 맞게 진행된다.
다행히 우리 과는 전통적인 스케줄에 따라 적당한 타이밍에 중간고사, 방학 직전 기말고사. 이렇게 정해져 있는데, 장학금 빵빵한 공대 같은 경우 한 학기에 시험을 다섯 번이나 보는 경우도 있다고 하더라. 쌤통이다! 부자 놈들아!
아무튼, 기말이 코앞이니 도서관 가서 공부해야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이미 늦은 게 사실이다. 한 주 전부터 준비해서 될 시험이 아니다. 벼락치기가 통하는 시험이 아니지.
예전 선배들 중에는 노력 하나도 안 하고, 시험 직전에 대충 책 한번 쓱 보고 가서 에이쁠 맞는 그런 괴물들이 있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기는 하는데,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다.
반액 장학금을 받아본 이 몸이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자고로 공부란 엉덩이로 하는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성과 노력을 쏟았느냐에 따라 학점이 달라지는 거다.
그런 관점에서 이번 학기는 조졌다. 제대로 조졌다. 아직 기말 안 쳤지만 확실히 알 수 있다.
진짜 버라이어티했다. 무슨 놈의 한 학기가 이렇게도 버라이어티 한 건지.
학기 초에는 지수 때문에 멘탈 나가서 개찌질 모드였지. 맨날 벤치에 앉아서 한숨이나 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구만.
그러다 고향에 가서 할아버지에게서 ‘가업을 이어라!’ 소리를 들었지. 그다음부터는?
하루하루가 진짜 정신없이 지나갔다.
서현 씨 만나고, 이사하고, 아니, 이사 당하고.
그 사람 다음에 축제. 버라이어티했지. 아아아아주 버라이어티했지. 동기 놈들이랑 다시 친해졌고, 지연이와도 가까워졌고, 진철이 형과 관련된 일도 있었고. 우리 말썽꾸러기 제이슨이 처음 사고를 친 것도 그때였고.
사고 쳤으면 반성할 것이지, 오히려 확대, 재생산해버리는 바람에 참, 나도 별꼴을 다 당했어. 입원도 해보고. 아무튼 그거 처리한다고 골치 좀 아팠네.
그래도 아주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 와중에 기훈이 녀석도 알게 되었고, 기훈이 할머니에게 곰탕도 얻어먹고. 음. 그건 뭐 좋은 결과지. 아, 돈도 벌었다. 장영호 그 양반에게 합의금 받았고, 또 제이슨에게 받을 돈도 있고. 후후후.
그 외에도 지수가 갑자기 유학을 가버렸고, 박승환의 개인사를 듣기도 했고, 갑작스럽게 창회 생일 파티를 해주기도 했고.
아직 한 학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정말 버라이어티했구나. 내 21년 인생에서 이만큼 에너지를 소모한 경우가 있었을까? 고등학교 때 맨날 싸우고 다닐 때도 올해보다 평화로웠겠다.
아무튼,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 보니 확실히 공부량이 줄기는 했다.
그래도 수업은 최대한 열심히 챙겨 들었지만, 여기는 한국대거든. 초중고 12년 동안 ‘특기는 예습, 취미는 복습입니다!’ 하는 놈들이 다 모여있거든.
조졌어. 확실히 조졌어.
뭐 확정된 조짐이라고 해도,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지. D 받을 거 C 받고, C 받을 거 C쁠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B는 기대 안 한다. 그거는 욕심이지.
아무튼 그런 마음으로 도서관으로 간다. 가면 다 있을 거다. 이중훈, 박찬희, 최유라, 김창회. 다 있을 거다.
박승환? 그 자식은 없다. 도서관에 가는 꼴을 못 봤다. 아니, 공부하는 꼴을 못 봤다.
잠깐만. 그러고 보면 그 자식 공부 안 하는데, 학고도 안 받는 거 보면 혹시 그 전설로만 내려오는 그 부류의 인간?
잔머리 굴리는 거 보면 확실히 머리가 좋기는 한 것 같은데…. 머리 좋은 거랑 학점은 전혀 상관없는데?
그러고 보면 김창회도 없겠네. 그 자식 오늘도 안 보였더랬지.
혹시 고향 갔다가 ‘어디 집안을 이을 장손이 밖에서 쏘다니고 있단 말이더냐! 내 오늘 천둥벌거숭이 같은 네놈에게 호된 맛을 보여줘야겠구나! 여봐라! 이놈을 당장 매우 쳐라!’ 같은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겠지? 멍석말이 당한 다음에 손발 꽁꽁 묶여서 어디 광 같은 데 처박혀 있고.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김창횐데. 그 김창회를 멍석 만다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주머니에 들어있는 휴대폰이 울린다.
어이쿠야. 진동으로 바꾼다는 거 또 깜빡했네. 도서관 갔다가 쌍욕 처먹을 뻔했다.
그러면서 휴대폰을 확인하니, 김창회의 이름이 떠 있었다.
***
학교 근처 카페, 나는 맞은편에서 커피를 홀짝이는 김창회를 노려보고 있다.
아무튼 도움이 안 된다. 친구 놈들이라는 것들이 말이지. 공부해야겠다고 딱 마음먹은 순간에 타이밍 좋게 이 자식이 방해를 한다.
평소 같았으면, ‘미친놈아. 당장 다음 주가 시험이야! 기말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당장 꺼지라고 했겠지만, 오늘은 상황이 좀 다르긴 하지.
“잘 다녀왔냐?”
내 질문에 김창회가 고개를 끄덕인다.
허이구. 부끄러워하네? 덩치는 산만 한 놈이 부끄러워한다.
“수술 끝나는 거 보고 올라온 거고?”
“음.”
“경과는?”
“뭐. 큰 수술은 아니라서.”
“다행이네.”
“그래.”
김창회는 그렇게 말하고 컵을 들어 커피를 마신다. 그렇게 커피를 마시고 한참을 뜸 들이더니 대뜸.
“…뭐 필요한 거 없냐?”
갑자기 그렇게 묻는다.
“필요한 거?”
“음.”
“…학점?”
내가 말했다.
내 말이 김창회가 작게 웃는다.
평소에 보지 못한 김창회에게 내가 묻는다.
“은혜를 갚으시겠다?”
“…뭐.”
그러면서 머리를 긁는다.
“그러면 나중에 연대보증이나 함 서주든가.”
내가 말했다.
“그래. 나중에 필요할 때….”
“에라이. 이 미친놈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여 김창회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어쭈, 이 자식 봐라. 주먹 튕겨내는 거 보게? 힘 안 빼? 힘 안 빼냐?
“야, 임마. 연대보증 서달라는 소리를 들으면 일단 턱부터 돌려버려야지. 나중에 필요할 때 말하라고? 이 자식아. 연대보증은 가족끼리도 안 서주는 거야. 나중에 지우 남편이 찾아와서 ‘형님, 이번에 제가 사업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지우 얼굴 봐서, 연대보증 한 번 서 주십시오’ 같은 소리 하면 그 자리에서 목을 졸라버려야 한다고! 아오. 진짜 이 철없는 자식. 그리고, 다음 주 시험이야. 다음 주 시험이라고. 도서관 가서 공부할 귀한 시간 빼서 만나줬더니 헛소리하고 있네. 아오, 진짜.”
내가 그렇게 말하자 김창회는 부끄럽다는 표정을 한다.
안다. 창회는 그렇게 생각했겠지. 고맙다. 그런 말로는 부족하다고. 그래서 그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고. 뭐 그런 생각.
“고마우면 밥 사. 시험 끝나고.”
내가 그렇게 마무리 지었다.
“그래. 밥 살게.”
“비싼 거.”
“그래. 비싼 밥 살게.”
박찬희에게 비싼 거 얻어먹고, 김창회에게 비싼 거 얻어먹고. 좋아.
이렇게 마무리하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갈까, 잠시 고민했는데, 그만두기로 했다.
이상하게 학교 밖으로 나오면 다시 들어가고 싶지가 않단 말이지. 그것도 그렇고, 김창회 저 자식이 보기 드문 표정을 하고 있다.
마치 내 이야기를 들어줘. 그런 표정이랄까?
그래. 내가 들어줘야지. 할아버지랑 화해한 이야기 내가 들어줄게.
“도서관 가서 공부할라고 했는데, 괜히 기분만 잡쳤어. 가자. 밥이나 먹으러. 오늘은 내가 산다.”
내가 김창회의 어깨를 때리며 그렇게 말했다.
참나. 내가 이렇게 속이 깊은 사람이다. 짜식들, 그런 것도 모르고 말야.
***
창회랑 밥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 안에서 나는 피곤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김창회 그 자식 짜증 나.
아니, 망할 놈이, 지가 이야기하고 싶다고 사람 불러냈으면, 그럼 시원하게 이야기하든가.
할아버지 만났고, 고향 집에 갔고, 오랜만에 고모들도 봤고, 산소도 가서 인사도 드렸고, 월요일 저녁에 올라올까 하다가 결국 화요일에 할아버지 수술받는 거 다 보고 올라왔다.
그냥 그렇게 이야기하면 되잖아.
근데 누가 김창회 아니라고, 말을 하다가 말아.
내가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꼭 이렇게 추임새를 넣어줘야 이야기가 이어지고, 그렇게 이어져도 또 멈추고, 또 내가 해달라는 모양새를 취하고.
아오, 답답해. 속 터지는 줄 알았네.
솔직히 이번 일은 사안도 사안이고, 나도 좀 궁금하기도 했고, 그래서 내가 참고 들어줬다. 다른 놈 같았으면 ‘한 번에 이야기해! 기승전결 모두 다!’ 그러면서 바로 하이킥 날아갔다.
창회니까 일단 참았다.
아무튼, 뭐 결론적으로 생각보다 잘 풀렸다. 그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창회를 보니까 창회 할아버님도 상황이 바뀌었다고,
‘아이고 우리 귀한 손주. 타지에서 얼마나 걱정 많았어? 이제부터 이 할애비가 우리 손주를 보살필 터이니 걱정 말거라.’와 같은 말씀을 하실 분도 아닌 것 같고, 당분간은 지금 자취방에서 평소와 다름없이 지내겠지만, 앞으로 학비나 생활비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잘 되었지. 잘 되었다.
잘 된 건 잘 된 거고, 피곤하다. 그놈 이야기 들어준다고 피곤하다.
집에 가서 후딱 씻고 자야지. 아니, 피곤하니까 캐모마일 마시면서 우리 서현 씨랑 이야기하다가 자야지.
그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해진다.
에피쿠로스학파에서는 신체에 고통이 없고, 영혼에 걱정이 없는 상태를 최고 행복인 아타락시아라고 했지.
어디선가 그런 말도 들었더랬다. 특별한 일 없는 일상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면 조금 철이 든 것이라고.
조금 철이 들었나?
철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으로 가는 지하철에 앉아서, 지금과 같은 나날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고 작게 소망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