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66화 (166/271)

166 : “진짜. …어쩔 수 없네.”

결혼 후 3년 만에 창회가 태어났다.

애초에 손이 귀한 집안에서 첫 아이가 태어났고, 아들이었다. 그렇게 보물 같은 장손이 첫 돌을 맞이할 즈음, 또 다른 기쁜 소식이 들려왔다. 둘째의 임신.

집 안에는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고 했다. 엄하디엄한 그 할아버지마저도 미소 짓고 다녔다고 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때 그날이 찾아왔다.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5중 충돌사고.

졸음운전 중이던 화물차가 서행하던 차량들을 그대로 덮쳐버렸다.

사상자 아홉 명, 유일한 경상자였던 트럭 운전수를 제외하고 다섯 명이 목숨을 잃고, 세 명이 치명적인 중상을 입었다.

중상자 세 명 중 한 명, 삼 일간 중환자실에서 생과 사의 사투를 벌이다 결국 여섯 번째 사망자가 된 사람이 바로 김창회의 아빠였다.

“…어떻게 장례를 치렀는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아빠를 보내고,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른 채 그저 방에만 있었어. 밥도 안 먹고, 잠도 못 자고, 눈물도 흘리지 못하고서 그저 앉아만 있었어. 그때 처음 그런 생각이 들더라. 살고 싶지 않다고.”

“….”

“우리 창회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지, 엄마 배 속에는 지우가 있었지. 그런데도 엄마는 살고 싶지 않았어.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창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거의 보여준 적 없는 슬픈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미안해. 엄마가 그런 생각 해서… 미안해.”

김창회는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를 만날 수 있다면 죽어도 좋다고 생각한 적 있는 창회는 이해할 수 있었다.

“벗어나고 싶었어. 아빠의 흔적이 묻어있는 그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종가의 맏며느리라는 무거운 굴레도, 아빠가 계셨을 때만 해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도저히 그 무게를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았어. 장례 기간 내내 사람들이 그랬어. 힘내라고. 그래도 창회가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종가의 며느리니까 앞으로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라고. 엄마는 아빠를 사랑해서 결혼한 거지, 아빠가 종갓집 장손이라서, 부자라서, 지역의 명가라서 결혼한 것은 아니었거든. 엄마는 그런 것들이 무서웠어. 아니, 싫었어. 그래서 도망치고 싶었어. 어떤 방법으로든 그 집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어.”

엄마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창회의 마음속에는, 절망의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엄마의 마음이 천천히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어쩔 수가 없다고. 돌아갈 수 없다고. 이제 화양 김씨 종가의 종부로서 평생을 살아야 할 것이라고.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할아버지만 빼고.”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남들 모르게 말씀하셨어. 친정에 가 있으라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친정에 가 있으라고.”

“외가에?”

“힘들 거라고, 사람들이 힘들게 할 거라고. 그러니까 지우를 낳고, 몸을 추스를 때까지 외할머니에게 가 있으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 물론 우리 아들도 데려가고, 힘들 것 같으면 두고 가도 잘 보살펴 줄 테니 걱정 말고.”

역시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알고 있던 이야기와 달랐다.

엄마를 보내던 그때, 늦은 새벽, 목소리를 낮춰 속삭이던 말들.

그 노인네가 죽인 거야. 이놈의 뼈대 있는 가문이 며느리를 잡아먹은 거야. 그랬다며? 막 남편을 잃은 며느리에게 이 가문에 뼈를 묻어야 한다고. 종가의 종부로서, 종손을 잘 키우는 것만 생각하라고, 떠날 수 없다고,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이 집안을 떠날 수 없다고. 죽어도 떠나야 한다면, 아들을 두고 가라고.

눈 감은 채로 잠든 척을 하면서, 김창회는 그 말을 듣고 있었다.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김창회의 머릿속에 다시 할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날카로운 눈빛, 한일자로 굳게 닫힌 입술, 미간에 잡힌 주름.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항상 떠오르는 얼굴이었다.

“지우를 낳고… 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어. 따로 집을 마련해 주시겠다고, 우리 아들이랑 지우랑 같이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해 주시겠다고, 생활비도, 집안일을 도울 사람도 구해주시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셨어. 가문이라는 이름에, 종가라는 이름에 얽매일 필요 없다고, 당신께서는 그러실 수 없겠지만, 엄마까지 그 무게에 짓눌릴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하셨어.”

“우리가 이사 간 거는 한참 나중이었는데…?”

창회가 본가에서, 그 집에서 나올 수 있었던 시기는 창회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이었다.

창회가 다닐 초등학교와 본가 사이에 큰 도로가 있어 위험하고, 거리가 멀다는 핑계로 겨우 그 집에서 나올 수 있었다.

만약 할아버지의 말이 사실이었다면, 아빠가 돌아가신 직후,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 집에서 나오는 데 어찌해서 7년이나 걸린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엄마가 싫다고 했어. 나가지 않겠다고, 계속 그 집에서 살겠다고 했어. 그랬는데, 할아버지가 억지로 내보내신 거야. 등교하기 위험하고, 거리가 멀다고. 할아버지가 억지로 내보내신 거야.”

엄마는 남으려 했고, 할아버지는 내보내려 하셨다고? 그 반대가 아니고?

“왜?”

“응?”

“…왜 그 집에 남았던 거야? 그 전에도 나갈 수 있었는데….”

“그 집에 남은 게 아니야. 할아버지 곁에 있었던 거지.”

“…왜?”

“나만 슬픈 게 아니구나. 할아버지도 나만큼 슬프구나. 아니, 누가 더 슬프고 덜 슬프고를 따질 수는 없겠지. 하지만 남편을 잃은 엄마만큼, 아들을 잃은 할아버지도 슬프겠구나. 할아버지의 눈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할아버지 곁에 있어야겠다. 그런 마음이 들었어.”

“할아버지를 위로해 주려고…?”

“아니. 엄마가 위로 받으려고.”

“….”

“같은 사람을 잃고, 같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되었거든. 그리고 할아버지랑 같이 지내는 거, 사실은 하나도 안 힘들었거든. 창회도 알지? 할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절대로 본인의 감정을 드러내시지를 않잖아.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그렇게 분명하게 말해주시면 편할 텐데, 그런 부분이 없으니까. 다들 할아버지 무서워하고. 근데 엄마는 알았거든. 할아버지 기분 좋구나, 저 반찬은 마음에 드시는구나, 오늘은 조금 우울하시구나, 오늘은 약주 한잔하고 싶으시구나. 그런 거 알겠더라고. 그러니까 할아버지가 무섭지 않았고. 할아버지도 아셨거든. 오늘 엄마가 기분이 좋구나, 오늘은 좀 우울하구나, 뭐가 먹고 싶구나, 이모들이랑 여행 가고 싶구나, 그런 거. 할아버지는 귀신같이 그런 걸 아시더라.”

그렇게 말하는 엄마는 미소 짓고 있었다.

창회는 그런 엄마의 미소에서 한 점의 거짓도 찾아낼 수 없었다.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고마웠어. 엄마의 편이 되어주어서. 우리 창회와 지우 잘 키워줘서.”

창회는 아무 말 없이 엄마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그때도 할아버지 엄청 우셨다.”

“…그때?”

“응. …엄마가 먼저 떠났을 때.”

“….”

“우리 아들. 엄마 생일 기억해?”

“…2월 20일.”

“우리 아들 기억하고 있네? 매년 그날 할아버지 엄마 찾아오신다?”

“…산소에?”

“응. 남들 몰래 혼자 오셨다 가셔. 초콜릿 사 오셔. 창회는 엄마가 초콜릿 좋아하는 거 모르지?”

창회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못했다. 엄마가 초콜릿을 먹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초콜릿이 있다면 창회와 여동생이 다 먹어치웠다.

“혹시 기억나? 할아버지 오실 때마다 초콜릿 사 오셨던 거? 그거 사실 엄마도 같이 먹으라고 가져오신 거야. 엄마도 초콜릿 좋아해. 우리 창회와 지우는 그런 것도 모르고, 엄마 줄 생각도 안 하고 자기들끼리 다 먹어버렸지만.”

엄마는 그렇게 말하고 작게 웃는다.

창회의 머릿속에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현관문이 열리고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면, 어린 창회와 지우는 현관에 서서 허리를 폴더폰처럼 접어 공손하게 인사를 올려야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할아버지 손에 들린 봉투, 비싼 초콜릿이 담긴 봉투를 바라보곤 했었다.

“할아버지. 너무 미워하지 마.”

엄마가 창회에게 말했다.

“나중에. 후회할 거야. 많이 후회할 거야. 그러니까 할아버지 이제 미워하지 마.”

엄마가 창회의 눈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

버스를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던 김창회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렇게 심호흡을 했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뻐근했다.

창회는 손을 들어 눈가를 훔쳤다.

물기는 손등을 타고 사라졌지만, 감정은 여전히 김창회의 가슴 안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창회는 휴지를 꺼내려 가방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가방 맨 위에 놓여있는 봉투를 보았다.

어제, 한수가 테이블에 놓고 간 봉투였다.

-할아버지께서 지우에게 이맘때쯤 주시는 특별용돈이라고 하더라. 뭐 어떤 용도인지는 설명 안 해도 잘 알겠지.

봉투를 내려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5만 원짜리 스무 장, 백만 원 고대로 들어있다. 10원 하나 빼지 않고 지우에게 받은 그대로. 원래 배달 수수료 30% 떼야 하는데, 이번에 특별히 봐줬다. 나중에 딴말하지 말고 세어봐. 이거 가지고 월세를 내든, 헬스장에 가져다 바치든, 보충제를 직구하든, 고급 닭찌찌살을 사 처먹든, 홍삼 사 들고 고향 가든 니 마음대로 해라.

툭툭 던지는 말투로 그렇게 말하는 친구의 표정은 말투처럼 귀찮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창회는 알고 있었다. 친구가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아. 그리고 니네 할아버지 다음 주 화요일 수술 받으신다더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우 말로는 큰 수술은 아니라고 하는데. 뭐, 아무튼, 난 다 전달했다. 학교에서 보자.

그렇게 말하고 떠나는 친구의 뒷모습을 놀란 눈으로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뒷모습을 떠올리니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뒷모습이 고마워서, 든든해서,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엄마가 진실을 말해주었다. 친구가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지금 자신이 버스를 타고 있는 이유였다.

어쩔 수 없네.

김창회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을 때, 가방에 들어있던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김창회는 핸드폰을 꺼냈다.

깨톡이 와 있었다. 지우에게서 온 깨톡이었다.

-오빠. 나 오늘 무슨 일이 있어도 3시에는 버스 타야 돼. 무조건! 그러니까 동생 예쁜 얼굴 보려면 버스 내려서 괜히 쓸데없는 고민 하면서 시간 버리지 말고 바로 택시 타고 와. 병원 어딘지 알지? 6동 9층 특1실이야!

그렇게 쓰여 있었다.

창회는 동생에게서 온 깨톡을 읽었다. 반복해서 몇 번을 읽었다.

그렇게 몇 번을 읽고는 작게 중얼거렸다.

“진짜. …어쩔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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