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 “할아버지를 너무 미워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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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고속도로에 막 접어든 동대구행 고속버스 안에 무표정한 얼굴의 남자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시간 전, 플랫폼에 서서 승차권을 들고서 떠나는 버스를 바라만 보고 있던 김창회였다.
처음 구입했던 탑승권은 결국 휴지 조각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주요 노선인 동대구행 노선에는 하루 배차만 55편이었고, 10분에서 20분 간격으로 버스는 계속 운행하고 있었다.
두 대를 더 보낸 김창회는 결국 세 번째 버스에 타 있었다.
그렇게 버스에 탑승했지만, 모든 결정을 다 끝낸 것은 아니었다.
아직 고민하고 있었다.
동대구 터미널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갈지, 아니면….
창회는 고개 숙여 손에 꼭 쥐고 있는 탑승권을 바라보았다.
경부고속도로는 오랜만이었다. 아니, 고향 쪽으로 향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버스를 탄 것은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바로 집을 나왔다. 옷 가방만 챙겨 그 집에서 빠져나왔다.
그날 이후 1년 8개월, 거의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할아버지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애초에 연락을 할 생각조차 없었다.
당연히 할아버지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유서 깊은 화양 김씨 종가를 이끄는 할아버지는 절대로 자신의 뜻을 굽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엄마의 목숨을 앗아간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라고는 해도, 분명히 책임을 져야 하는 화양 김씨 종가와 완전히 연을 끊어버릴 수 있을 테니까.
핏줄이라는 것이 물리적으로 의미가 있다는 것은 김창회도 인정했다. 하지면 혈족이니, 가문이니 하는 것은 그저 관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이제는 점점 그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구시대적 관념.
그 같은 구시대적 관념에 따라, 화양 김씨 종손으로서, 가문에서 선택한 여자와 결혼해 종가를 이을 후계자를 생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재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역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막대한 재산? 선거의 향방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막강한 영향력? 그런 건 김창회에게 한 줌의 가치도 없었다.
다시는 그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다시는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겠다.
고향을 떠나며 그렇게 결심했던 김창회가 지금 그쪽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다.
김창회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는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지만, 창회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너무 미워하지 마.
그렇게 말하는 엄마를 보고 있었다.
***
친구들이 떠나고, 엄마는 거실에 나란히 이불을 깔았다.
거실에 이불을 깔고 누운 것은 오랜만이었다. 엄마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더 오래전이었다.
창회가 초등학교 다닐 때, 그것도 저학년이었을 때.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지우가 무서운 꿈을 꾸고 혼자서 잠들지 못하겠다며 울어 버리면, 엄마는 거실에 이불을 깔고는 했었다.
그렇게 이불을 깔고 엄마, 창회, 그리고 지우 세 사람은 나란히 누워 잠이 들 때까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는 했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창회는 거실에서 다 같이 자는 것을 거부했었다.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나중에 엄마가 아픈 것을 알게 되고, 엄마가 집보다는 병원에 있는 시간이 더욱 많아지면서, 엄마가 그렇게 먼 곳으로 떠나고 난 이후, 창회가 가장 후회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을걸, 조금만 더 함께해줄걸.
후회해봤자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찌할 수 없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랬는데, 창회는 다시 거실에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워서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엄마가 처음 아빠랑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외할머니가 반대하셨다? 정말 심하게 반대하셨어.”
“…외할머니가?”
“응. 몰랐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니, 창회가 애초에 알고 있던 사실과 달랐다.
아빠가 엄마와 결혼하겠다고, 가문에서 선택한 여자가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유서 깊은 화양 김씨 문중은 난리가 났다.
어디서 근본 없는 집안의, 그것도 그냥 근본 없는 집안도 아니고 편모 밑에서 자란 여자를 종가의 종부★주석(宗婦 : 종갓집 맏며느리)★주석로 들일 수 없다. 절대 이 결혼은 허락할 수 없다.
할아버지를 비롯한 문중의 반대가 심했고, 그런 격렬한 반대가 혹독한 시집살이로, 그리고 엄마의 병으로까지 연결되었다.
김창회는 그렇게 알고 있었다.
“아빠 쪽에서 반대가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아빠가 그랬거든. 무조건 엄마하고 결혼할 거라고. 집안과 척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엄마와 함께하겠다고. 엄마는 그 말을 믿었어. 그래서 결심한 거야. 어떠한 반대가 있더라도 아빠와 함께 이겨내겠다고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었는데, 외할머니가 반대를 하신 거야. 허락하지 못한다고, 절대로 허락하지 않으시겠다고.”
외할머니는 선한 사람이었다. 평생 동안 남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더구나 일평생 사랑하는 딸의 행복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었다.
언제나 인자한 미소로 창회를 꼬옥 안아주던 외할머니가, 그런 외할머니가 반대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다.
“…걱정하셨구나. 엄마가 힘들까 봐. 고생할까 봐.”
“응. 워낙 유명한 집안이고, 할아버지도 워낙 유명했으니까. 할머니는 당연히 걱정되었겠지. 나중에 알았는데, 외할머니가, 나중에…. 떠나게 되면, 친정 부모 없는 딸이 의지할 곳이라고는 남지 않게 될까 봐, 그 무서운 집안에서 홀로 떨고 있을까 봐. 그게 싫으셨대. 아빠가 찾아와 무릎까지 꿇었는데, 외할머니는 안 된다고, 아빠가 부족한 게 아니라 그 집안이 두렵다고. 그러면서 끝까지 반대하셨어.”
그 순한 외할머니가 왜 그렇게 강하게 반대했는지. 창회는 이해할 수 있었다.
좋은 곳으로, 부잣집으로 시집가기를 원하셨다면, 외할머니는 그렇게까지 반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먹고살 걱정 없는 부잣집 며느리가 아닌, 행복한 결혼을 해주길 바라셨던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어떻게 했게?”
“…어떻게 했는데?”
“아빠에게 그랬어. 결혼 못 하겠다고. 그만하자고. 여기까지 하자고.”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두 눈에 옅은 슬픔이 깃든다.
아주 오래전, 퇴색되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시간이 흐른 기억이었지만, 아직 그날의 기억은 엄마에게 아픔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엄마는 다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아빠를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아빠를 위해서라면 세상 모든 것을 다 포기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할머니는 포기 못 하겠더라고. 나 행복하자고, 나 혼자 행복하자고 외할머니 눈에 눈물 나게는 못하겠는 거야. 그래서 아빠에게 그만하자고, 이제 그만하자고. 그렇게 말했어.”
김창회는 이 이야기의 끝을 알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결혼을 했고, 그 축복의 증거인 창회가 태어났다는 것은? 분명, 갈등을 해소하는 계기가 있었다는 의미다.
“…그랬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가 찾아오신 거야. 다른 사람들 모르게, 아빠도 모르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아니, 들었다고 해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할아버지가 외할머니를 찾아갔다고? 다른 사람들 모르게? 다른 사람도 아닌, 그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찾아오셔서 그러셨어. 친딸처럼 대하겠다는 약속은 못 하겠다고. 노력으로 가능하다면 약속드리겠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 준 천륜이고, 아무리 사람의 노력한다고 해서 천륜은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기에, 친아버지처럼, 친딸 대하듯 하겠다는 약속은 못 드리겠다. 그 대신 손님으로, 귀한 손님으로 생각하겠다.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렇게 말했다고? 할아버지가?”
“응. 외할머니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지만 확실한 어조로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리고 나에게도 약속해주셨어. 부당하게 대우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종갓집의 살림을 살아야 하는 종부나 무조건 종손을 낳아야 하는 며느리가 아닌, 한 사람의 가족으로, 아들의 반려가 아닌 가족으로 대하겠다고, 절대 서럽다는 생각 들지 않게 하겠다고. 그렇게 약속해 주셨어.”
김창회는 머릿속에 할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고집스러운 얼굴, 600년이 넘는 유서 깊은 종가의 전통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 무서운 얼굴의 할아버지가 외할머니 앞에서 그렇게 약속하는 모습을 떠올렸다.
어색했다. 그 할아버지가 누군가에게 찾아가 부탁을 하는 모습이 어색했다. 아니, 어색한 정도가 아니라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색한데, 분명 어색한데, 그런데도 외할머니에게 ‘귀한 손님으로 생각하겠다.’ 그렇게 말하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창회의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그려낼 수 있었다.
“…그래서 외할머니가 허락해 주신 거야?”
엄마는 작게 미소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외할머니는 결국 허락해 주셨어. 아마도 할아버지가 다녀가신 영향이 컸겠지. 그쪽 집안에서도 반대가 조금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허락한다고 하신 후, 군말이 쏙 다 들어가더라고. 그래서 결혼할 수 있었어.”
“…그래서. 할아버지가 약속을 지켰어?”
그렇게 묻는 김창회의 목소리는 어딘가 퉁명스러웠다.
김창회의 기억 속 엄마는 행복하지 않았다.
화양 김씨 종가의 맏며느리로, 언제나 가문의 무게가 엄마의 가녀린 두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별로 힘들지는 않았어. 물론 그 큰 집에서 신혼생활 하는 게 아빠와 알콩달콩 두 사람만 사는 것보다는 불편했지. 아무래도 가족들도 많고. 그치만, 적어도 할아버지가 약속했던 것처럼 시집살이가 서럽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엄마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거든.”
“아무도 없었다고?”
“응. 사실 처음에 한 번 있었어. 창회는 잘 모르는 고모할머니가 처음에 새 식구 기강 잡겠다고 뭐라고 한마디 하셨거든. 근데, 할아버지가 그분을 엄청 혼내신 거야. 어디 종부에게 그런 말을 함부로 하냐고 그러시면서. 그때부터 아무도 엄마에게 뭐라고 못 했어.”
“…그 집 사람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 하는지도 모르잖아.”
창회의 말에 엄마가 작게 웃는다.
‘대단한데?’ 그런 의미가 담긴 엄마의 미소였다. 창회가 좋아하는 엄마의 미소였다.
“응. 모르지.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엄마 앞에서는 안 그러잖아. 그럼 된 거지. 그리고 엄마, 시집올 때 마음 굳게 먹고 왔었거든. 그렇게 생각했던 거에 비하면 진짜 아무 일도 없어서 좋았어. 친정도 자주 갔고. 적어도 일주일에 하루는 친정에 갔었거든. 할아버지 명령으로.”
“…할아버지가 그런 명령을 했다고?”
“응. 정확히는 내가 아니고 아빠에게. 장모님도 어머님이다. 자주 찾아뵈어 건강하신지 지켜보거라. 그렇게.”
김창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엄마가 말해주는 할아버지와 자신이 아는 할아버지가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그랬다고? 그 할아버지가 그랬다고?
“엄마는 괜찮았어.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엄마는 행복했었어. 아빠와 결혼할 수 있어서, 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어서. 그때까지는….”
“그때….”
“그래.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엄마의 눈빛이 다시 슬픔으로 젖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