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 : 서울(경부)-동대구
***
이야기하다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밥 사겠다는 창회에게 싫다고, 꺼지라고 말해주고 집으로 복귀했다.
일단 내가 김창회라면 지금 밥 같은 거 안 먹고 싶을 거다. 적어도 오늘은 하루종일 그럴 거다. 밥이 넘어가겠냐고.
그리고 우리 서현 씨가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창회 따위와 밥을 먹을 이유가 없지. 후딱 집으로 가서 우리 서현 씨와 놀아야지. 평상시와 같은 토요일을 보내야지.
서현 씨와 텔레파시가 통했는지, 점심 안 드시고 날 기다리고 계셨다.
텔레파시 같은 게 아니다. 같은 마음인 거지. 천생연분 후후후.
아무튼, 차 키도 반납하고, 서현 씨와 늦은 점심을 챙겨 먹고, 성수 카페거리에서 차를 마시고, 서울숲을 산책하고,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 들고 와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캐모마일을 마시며 영화 한 편을 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 들었다.
겉으로만 본다면 ‘김창회’ 연계 퀘스트를 모두 끝내고 여유롭고 행복한 토요일을 보상으로 받은 것 같지만, 사실 모든 퀘스트가 전부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MMORPG 해본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모든 연계 퀘스트는 보고로 끝난다. 보고가 끝나야지만 쥐꼬리만 한 경험치하고, 쓰레기 같은 아이템을 던져주며 ‘퀘스트 끝. 수고했엉’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거다.
보상으로 경험치도 아이템도 없지만, 저번에 진철이 형의 아버님 때처럼 이번에도 할아버지에게 최종 보고를 해야 이 퀘스트가 끝이 나는 것이다.
서현 씨와 여유롭고 행복한 토요일 오후를 보내면서 마음 한편으로, 내일 할아버지를 만나러 가겠다. 그런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고. 그래서 서현 씨에게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조금은 무거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뭐…. 할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벌 받을까 봐, 벌 받는다면 어떤 벌을 받을지가 두려워서 마음이 무거웠던 것은 아니다.
아니, 사실 조금 걱정되기도 하는데… 뭐, 설마 죽이기야 하겠어?
기껏해야 저번처럼 능력을 제한당하거나 머리 빡빡 깎고 고향 집에 처박히는 정도겠지.
사실 능력 제한이야, 뭐 그다지 걱정 안 된다.
신력을 가지고 내가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했다면, 아마 능력 제한은 커다란 크리티컬이 되겠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거든.
그래. 솔직히 나도 사람이고, 남자고, 그것도 젊은 남자고…, 신력으로 막 이런저런 욕망을 현실화하는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갑자기 ‘팟’ 하고 떠오르는 생각은 나도 어찌할 수 없다. 이건 인정해야 한다. 생각이 팟! 하고 떠올랐는데, 그걸 어떻게 해?
음란마귀야 물러나라, 훠이훠이~ 그러면서 애써 지워 내려 노력하기는 하지만, 아예 생각조차 하지 말라는 건 가혹하지. 진짜로 너무 가혹하지.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신력이 없다고 해도 나는 뭐 아쉬울 것이 없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건가?
이렇게 페널티가 계속 누적되다가 나중에 아예 작은 어르신 자리에서 쫓겨나는 거 아닌가 몰라.
알고 보니 할아버지가 감춰둔 손자가 또 있었고. ‘도저히 너는 재목이 아니다’ 그런 말 듣고 호적에서 파이는 거지.
능력 잃고 어르신 못 되는 건 둘째 치고, 우리 서현 씨에게 버림받을 것 같은데?
오늘처럼 산책도 못 하고, 커피도 못 마시고, 같이 하하호호 웃으면서 맛있는 저녁도 못 만들어 먹고. 캐모마일에 영화도 이젠 안녕.
지연이는? 지연이는 내 곁에 있어 주려나?
우리 착한 지연이는 내가 작은 어르신인 거 모르잖아. 모르면서 날 좋아해 주는 거잖아.
아니지. 유 선생님이 반대하시겠지? 작은 어르신이어도 안 된다고 하시는데, 작은 어르신도 아니고, 그냥 일반인인데?
아니지. 그냥 일반인은 아니고 폐세자급 일반인인데… 딸을 주시겠나?
망상이 한번 시작되니 거침없이 막 나가네.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할아버지가 신력을 거두어도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머리 깎이는 건?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안 갈 거다.
우리 할아버지, 어울리지 않게 개인의 이성적 사고 판단과 권리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내가 어릴 때도, ‘할아버지가 시키니까 그냥 해!’ 그렇게 말한 적 한 번도 없었다.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했을 때와 안 했을 때의 결과를 솔직히 말해주면서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이미 성인이 된 손자의 머리를 밀어버린다고?
에이. 설마. 없다. 그런 일은 없다.
…없겠지?
아무튼, 내일 할아버지를 만나러 간다.
할아버지에게 보고하러. 아니, 혼나러.
사실 그게 모든 이유는 아니었다.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할아버지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사실 그 이유가 더 컸다.
***
일요일 아침, 서현 씨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아침 식사를 하고, 승환이에게 혹시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내 컴퓨터 하드를 물리적으로 소각해달라는 깨톡을 보낸 후 나는 고속버스 터미널로 갔다.
지난주에도 여기에 왔었지. 지우 만나러.
그렇게 지우를 만나서 밥을 먹고, 창회 생일을 챙겨주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게 불과 일주일 전이다.
일주일인데 고작 7일인데, 체감상으로는 훨씬 더 오래전 같다.
아인슈타인이 그랬지. 세상에 절대적 시간은 없다고. 모든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라고.
뭐, 내가 말하고 싶은 것처럼 ‘바쁘게 살면 시간이 겁나 길게 느껴진다’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아무튼 같은 일주일인데, 상대적으로 길게 느껴졌다.
겁나 바쁜 아인슈타인을 상상하며 대합실에서 시간을 때우다 출발 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버스에 올랐다.
고속버스 한두 번 타본 것도 아닌데, 문이 닫히고 버스가 플랫폼에서 후진하는 그 순간이 나는 이상하게 좋더라.
뭔가, ‘여행의 시작’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아무튼, 후진하는 버스 안에서 그런 작은 흥분을 느끼며 창밖을 보는데….
어라? 저 자식이 저기 왜 있어?
터미널 플랫폼에 내가 아는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다.
창회였다.
***
김창회는 몇 미터 밖에서 한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바닥을 응시하면서 그저 천천히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 그의 손에는 버스표가 들려 있었다.
말없이 바닥만을 바라보며 그렇게 걷던 김창회는 어느 플랫폼 앞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버스 안내판에 보이는 행선지를 확인했다.
서울 경부-동대구.
버스 전면에 붙어있는 안내판에는 그런 글자가 점멸하고 있었다.
김창회는 잠시 안내판을 바라보다가 손에 쥔 탑승권을 들어 확인했다.
서울(경부)-동대구.
버스 안내판과 같은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김창회는 손에 쥔 티켓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버스에 시선을 주었다.
예정된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5분. 이미 많은 사람들이 탑승해 있었다.
김창회는 그렇게 그 자리에 서서, 버스를, 버스 안에 탄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버스 회사 직원이 버스 안에 올라가서 인원을 확인하고, 기사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을 때까지, 김창회는 버스 앞에 서서 버스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예정된 출발 시간이 되어 버스 기사가 안전벨트를 체결하고, 출입문이 닫히고, 버스가 천천히 뒤로 후진할 때까지, 김창회는 그렇게 플랫폼에 서서 버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
꽉 막힌 서울을 지나, 경부고속도로에 접어든 고속버스는 버스전용차선에 들어서고 나서야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꽉 막혀있는 다른 차선과 달리 버스전용차선은 ‘고속도로’라는 이름에 걸맞게 뻥 뚫려 있다. 진짜 누가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버스전용차선 생각한 사람은 상 줘야 한다.
그렇게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조금 전 터미널에서 보았던 김창회 닮은 사람을 떠올렸다.
아니, 김창회 닮은 사람이 아니지. 김창회였다.
그 터질 듯한 근육, 특유의 팔자걸음, 짐승의 분위기. 그런 인간 흉기가 이 세상에 또 있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있을 리가 없다. 있어서는 안 된다.
김창회다. 분명 그 자식이다. 김창회가 터미널에 있었다.
왜일까? 설마 날 미행한 것은 아니겠지?
아니지. 그건 확실히 아니었다.
김창회는 땅을 보며 걷고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고민하는 듯. 그런 시선과 걸음으로 플랫폼을 특유의 팔자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날 미행했다면 숨었겠지. 아니면 날 바라보고 있었거나.
그런데 숨지도 않고, 날 바라보지도 않고, 고개를 처박은 채 땅만 보면서 걷고 있다?
그 말은?
창회가 터미널을 찾은 이유는 나와 관계가 없다고 보는 것이 맞겠지.
뭐 창회라고 고속터미널에 못 온다는 법은 없잖아.
그나저나 그 자식 어디 가려고 그러나?
뭐, 김창회에게 물어보면 간단한데, ‘야. 나 터미널에서 너 봤다. 어디 가냐?’ 이렇게 물어보면 되는데 그러고 싶지가 않다.
뭔가 정확히 말하면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달까?
아니, 그런 느낌도 느낌이지만, 사실 뭔가 짐작 가는 것도 있었다.
혹시 그거 아닐까?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베팅하라면 전 재산과 손모가지는 안 되겠지만 밥 한 끼 정도 걸어도 괜찮을 것 같아.
아니지. 애초에 나부터가 과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존재인데, 내 촉에 전 재산과 손모가지 한번 걸어봐도 되지 않을까? 걸어볼까?
그런 뻘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울리는 깨톡 소리.
깨톡!
깜짝이야!
공공장소에서는 진동모드로 해놨어야 했는데, 까먹고 있었네.
나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진동모드로 바꾸고 나서야 메시지를 확인했다.
창회 여동생, 지우에게서 온 깨톡이었다.
***
깨톡창을 열자, 그저께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꼬깔모자를 쓰고 있는 김창회와 우둔살 케이크를 중심으로 서른 명의 사람이 모여 찍은 김창회 생일 파티 단체 사진.
그 밑으로 고맙다고, 꼭 보답하겠다는 지우의 깨톡이 이어진다.
그리고 맨 아래에 방금 전 도착한 따끈따끈한 메시지.
-오빠 안녕하세요? 혹시 통화 가능하세요?
‘아니. 지금은 좀 그런데. 지금 고속버스 안이거든. 무슨 일인데? 급한 거야?’
-아니요. 그러면 깨톡은 괜찮으신가요?
‘응. 깨톡은 괜찮아.’
-혹시 어제 우리 오빠 만나셨어요?
지우가 그렇게 물어본다.
설마… 창회가 이야기했나?
나 엄마 만났어. 한수가 만나게 해줬어. 그런 이야기 말이지.
내가 아는 김창회라면 아무리 여동생이라도 그런 이야기는 안 했을 것 같은데.
‘어. 어제 오전에. 만나서 커피 마셨는데?’
-혹시 그때 우리 오빠가 뭐 특별한 이야기 안 했어요?
있었다. 특별한 이야기뿐이었지.
‘어떤 특별한 이야기? 그런 건 없었는데?’
-그렇군요.
그리고는 잠시 동안 깨톡창이 조용하다.
뭐지? 무슨 일이 있었나? 조금 전 터미널에서 창회를 봤던 것도 그렇고, 갑작스러운 지우의 깨톡도 그렇고.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느낌인데?
조금 지난 후, 지우에게 그런 깨톡이 온다.
-그러면 혹시 오빠에게 우리 할아버지 이야기하셨어요?
역시 그 이야긴가?
‘응. 다음 주 화요일에 수술하신다고. 그렇게 전달해줬어.’
-그랬군요……. 사실 오빠에게서 오늘 아침에 전화가 왔었어요. 할아버지 입원한 병원 어디냐고.
역시 이거였네.
‘그래서? 알려줬어?’
-네. 지금 대구에 계시거든요. 경북대학교 병원. 그래서 대구 경북대학교 병원에 계시다. 그렇게 말했더니, 알겠다 하고는 그냥 전화 끊더라고요. 다시 전화해도 받지도 않고, 깨톡 보내도 답도 없고. 내려오겠다는 건지, 모르겠어서요. 혹시 오빠에게는 무슨 말 한 거 없나 싶어서 깨톡 보내봤어요.
퍼즐이 다 맞춰졌다. 어떻게 된 건지 이제 확실히 알겠다.
‘내려갈 거야. 그 녀석.’
-네? 어떻게 아세요?
‘터미널에서 봤거든. 조금 전에.’
-만나셨다고요?
‘아니. 만난 건 아니고. 나는 먼저 버스 타고 있는데, 플랫폼에서 김창회가 지나가더라고. 그래서 저 녀석이 갑자기 터미널에는 뭔 일인가 했더니. 내려가려고 그랬던 거였네.’
-아…….
‘부끄러운가 보다. 전화 안 받는 거 보니.’
-우리 오빠가 또 한 부끄러움 해요. 그나저나 내려올 거면 빨리 내려오면 좋겠는데, 학교 복귀하려면 2시에는 출발해야 하는데.
‘그렇게 깨톡 보내봐. 답은 없어도 분명 부지런히 움직일 테니까.’
-넵! 그래야 되겠어요. 감사합니다. 진짜 한수 오빠에게는 갚아야 할 빚이 점점 많아지네요.
‘천천히 갚아도 괜찮아. 법정이율로 계산하고 있으니까.’
-얼만데요?
‘연 5%. 복리입니다.’
-복리면 법정이율 아닌… 빨리 갚겠습니다!
그 메시지와 동시에 귀여운 이모티콘이 뿅 하고 화면에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