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 GREATEST LOVE OF ALL (4)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직 잠과 현실의 경계에 반쯤 걸려 있다.
일단 의식은 수면의 표면 위로 떠올랐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깊은 잠에서 얕은 잠으로 왔다가 다시 깊은 잠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깨어버린 그런 상황이었다.
더 자고 싶다. 더 잘 수 있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억지로 눈을 떠서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8시 42분.
서현 씨와 집으로 돌아온 시간이 새벽 1시 조금 안 되어서.
바로 잠이 올 것 같지 않아 서현 씨와 캐모마일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각자 방으로 들어온 시간이 새벽 4시 넘어서.
대충 4시간 정도, 딱 렘(REM)수면 한 사이클이다.
일어나야지.
그렇게 마음먹었지만, 생각처럼 바로 몸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몸이 무겁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정신적으로 더 피곤하다.
단지 잠이 부족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어제 은근 에너지 쓰기는 많이 썼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라 평소보다 활동량이 많기도 했고, 사실 그보다는 심력 소모가 컸지.
창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술집에서 사고 안 생기게 하려고, 그리고 과연 성북동에서 내가 계획한 대로 진행이 될까? 그런 걱정을 하면서 심적 에너지를 평소보다 두세 배는 더 끌어다 쓴 것 같다.
판타지로 치면 마나 고갈 상태, 무협으로 치면 단전이 텅 비어버린 느낌이다.
그렇게 정신적으로 피곤한데, 그게 또 싫은 느낌은 아니다. 그런 피곤함 뒤에, 어떤 뿌듯함이 있다.
그래도 잘했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창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선물 같은 그런 날이었다. 그런 느낌.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다.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꽤나 괜찮은 미소를 띠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그랬으니까. 나도, 승환이도, 서현 씨도, 창회도, 어머니도. 다들 행복한 미소를 지어주었으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의 미소를 떠올리니,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제의 행복의 다른 이름은 ‘기약된 시간’이라는 슬픔이었다.
그 슬픔의 면을 억지로 가슴 한구석으로 밀어 넣어 두었는데, 정해진 시간이 다가오면서 슬픔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서서히 마음을 적셔온다.
나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마음을 잠식해오는 슬픔에 저항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 끝에 슬픔이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 어제의 그 행복은 가치가 있다고.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
계속 누워 있다가는 계속 우울해할 것 같아서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아니, 사실 일어나기도 했어야 했고.
기운을 차리겠다는 생각에 평소보다 조금 더 뜨거운 온도로 샤워를 하고, 외출용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서현 씨가 벌써 소파에 앉아 계신다.
나처럼 외출 준비를 하신 건 아니고, 잠옷에 노메이크업 상태로, 물론 우리 서현 씨야 노메이크업도 예쁘지만, 아니,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는 화장한 것보다 순수한 저 얼굴이 더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여전히 예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있다.
“지금 바로 나가실 거죠? 하지만 커피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은 되시죠?”
내가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살짝 미소 짓는 서현 씨.
그런 서현 씨를 보고 ‘아니. 바쁜데요. 시간 없는데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서현 씨는 손바닥으로 여기 앉으세요, 라는 의미로 소파를 팡팡 치고는 주방으로 간다.
주방 쪽에서 고소한 버터와 커피 향기가 은은하게 풍긴다. 미리 일어나 준비를 해두었다는 이야기다.
아침에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10시 정도에 나갈 것 같다고, 그렇게 이야기해두지도 않았는데, 서현 씨는 모두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아침에 일어나 커피와 토스트를 준비해둔 것이다.
늦게 잠든 것은 서현 씨도 마찬가지일 텐데 말이지.
***
“창회 씨에게는 힘든 하루가 되겠네요.”
세계에서 가장 예쁜 바리스타가 내려주신 완벽한 커피를 홀짝이는 나에게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한다.
“…그렇겠죠.”
창회에게는 힘든 하루가 되겠지, 아니, 오늘 하루로 끝나지는 않겠지.
얼마나 갈지 모르겠지만, 당분간은 어제의 선물 같은 하루가, 행복의 잔상이 창회 주위를 계속 맴돌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
끝이 정해진 만남, 기약된 행복, 그 끝에는 평소와 같은 하루하루가 있지만, 절대로 평소와 같은 일상처럼 느껴지지는 않겠지.
괴롭고 힘들겠지. 슬프고.
어쩌면 나는 창회에게 선물이 아닌 또 다른 슬픔을 안겨 준 것이 아닐까?
창회가 어제 느꼈을 그 행복도, 그리고 이후에 찾아올 슬픔도, 나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 서현 씨가 말한다.
“이겨낼 수 있을까요?”
“창회 씨는 단단한 사람 같았어요. 불행이나 슬픔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어요. 자양분이 될 거예요. 근육이 재합성하기 위해서 먼저 근섬유의 손상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행복도, 슬픔도 창회 씨가 더욱 단단해질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 줄 거예요.”
“…그럴까요?”
“안 그럴까요?”
“…그렇겠죠. 분명히.”
내 대답에 서현 씨는 작게 미소 짓는다.
“그리고 한수 씨도 있잖아요.”
“네?”
“한수 씨는 절대로 창회 씨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을 거잖아요. 승환 씨도, 중훈 씨도, 찬희 씨도.”
서현 씨가 날 보며 그렇게 말한다.
“창회 씨 어머니도 아셨을 거예요. 아셨기에 만나보겠다고 결정을 하셨을 거예요. 아들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고, 친구들이 곁에 있어 줄 것이고, 더욱 단단해질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에, 그렇기에 아무런 걱정 없이 만나러 오신 것일 테고요.”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그 가느다란 손으로 내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가서 잘 위로해주고 오세요. 창회 씨가 기댈 수 있도록 어깨를 내어주고 오세요.”
그렇게 말하는 서현 씨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서현 씨 차를 빌려서 다시 성북동 할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11시를 몇 분 남겨두고 있었다.
11시.
아침을 먹고, 하룻밤으로는 부족한 이야기를 나누고, 끝내고 싶지 않은 작별 인사를 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다.
차고에 차를 주차하고 정원으로 올라온 나는 현관으로 다가가는 대신, 정원 한쪽에 놓여있는 벤치에 앉았다.
현관에서 약 20여 미터 정도 떨어진 벤치에 앉아, 할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머문다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 그리고, 어제 두 번째 여기 왔을 때, 둘 다 해가 진 시간이었다.
어둠 속에서 바라본 건물과 정원은 위압감을 주었다. 어쩌면 선입견이 작용했을지도 모르겠지만, 특유의 위압감이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세 번째라 익숙해서일까? 토요일 오전 따뜻한 햇살의 온기 때문일까?
아니면, 어제의 그 기억 덕분일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따뜻한 햇살과 기분 좋은 바람 덕분에 마음에 스며 들어왔던 슬픔의 감정이 조금씩 휘발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또 다른 종류의 행복감을 느끼기를 10여 분.
드디어 현관문이 열리고, 창회가 모습을 보였다.
나는 벤치에 앉아 있는 그 자세 그대로 창회를 바라보고 있다.
현관문을 열고 나온 창회는 몸을 돌려 현관 안쪽을 바라본다.
그렇게 현관문 앞에서 한참 동안을 서서, 차마 자기 손으로 문을 닫을 수 없다는 듯, 안쪽을 바라보던 창회는 마지막으로 손을 한번 흔들고 천천히 문을 닫는다.
현관문은 이미 닫혔지만, 손잡이를 놓지 못한 채, 그렇게 서 있다.
나는 그런 창회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다.
***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던 창회는 결국 손잡이를 놓았고, 그리고는 천천히 걸어 나온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걷던 창회와 내 시선이 마주친다.
나는 창회에게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고, 창회도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천천히 내가 앉아 있는 벤치로 다가온다.
그렇게 다가오다 걸음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린다. 집을 바라본다.
창회 시선 끝에는 커다란 거실 창문이 있다.
거실의 거대한 통창 너머로 거실의 모습이 보인다. 5년 전 창회 집 거실이 아닌, 현재 성북동 할아버지 집 거실의 모습이 보인다.
현관문 너머에는 더 이상 예전 자신이 살던 그 집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한 창회는 고개를 돌린다.
그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걸려 있다.
쓸쓸한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온 창회는 벤치에 앉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잘 잤냐?”
나도 창회와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응.”
“아침은?”
“먹었어.”
“뭐 먹었는데?”
“김치콩나물국.”
“맛있었겠네.”
“맛있었어.”
“그래. 맛있었겠네.”
나도 안다.
그 김치콩나물국이 얼마나 맛있는지. 이제는 나도 잘 알고 있다.
“…저 문은, 더 이상 안 열리겠지?”
창회가 묻는다.
“그래.”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창회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생각은 했는데…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어.”
“그래. 물어보지 않을 수 없지.”
거기까지 말한 우리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 동안을, 아무런 말 없이 쾌청한 토요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
사현 씨에게 차를 빌린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일단 성북동의 언덕길을 오르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처음이야 멋모르고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서 걸어 올라갔지만, 토요일 아침부터 지하철에서 내려서 그 언덕길을 또 오르고 싶지가 않았다.
뭐, 첫 번째 이유만 있었다면, 택시 타고 와도 된다.
그런데, 두 번째 이유, 김창회를 집에까지 편하게 데려다주기 위해서는 차가 필요했다.
창회가 뭐 여자친구도 아니고 집까지 모셔다드리고 그럴 필요는 없지만, 아니, 평소였다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그래도 생일이라고 접대를 했는데, 기왕 하는 거면 풀코스로 해주자. 뭐 그런 마음이랄까?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창회를 태우고 창회 자취방이 있는 면목동으로 왔다. 사가정역 근처에 주차하고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창회에게 설명해줄 것이 남아 있으니까. 아니, 창회가 물어볼 것이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지.
카페에 들어와 주문을 하고, 음료를 받고, 자리에 앉고, 말없이 서로의 음료를 홀짝이기를 몇 분 후.
“…환상 같은 건 아니지?”
창회가 드디어 묻는다.
“환상?”
“엄마. 우리 집. 일종의 마법이나 환상 같은… 그런 건 아니지?”
내 눈을 똑바로 주시하고서, 그렇게 묻는다.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예상대로였다.
미리 생각해보았다. 창회가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
그리고 내가 창회라면 지금의 질문을 가장 먼저 물어보겠다고 예상했었다.
“진짜.”
내가 말했다.
“진짜 너네 집. 중3 때 살던 진짜 그 집. 마법으로 만들어낸 환상이나 환각 같은 거 아니야. 진짜 니네 집. 그리고 진짜 너희 어머니.”
그렇게 대답을 들었지만, 창회는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다.
날 바라보는 그 눈빛이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달라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누구보다 니가 더 잘 알잖아. 진짜 너희 어머니인지, 아니면 만들어진 가짜 환상인지. 너는 알 수 있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라면. 분명히.”
그제야 창회의 고개가 위아래로 작게 흔들린다.
“그래. 알 수 있지. 나는….”
창회는 그렇게 중얼거린다.
당연하지.
엄마를 알아보지 못하는 아들은 없다.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엄마가 없는 것처럼.
“그래.”
나에게 대답을 갈구하던 창회의 시선은 무언가 안심했다는 눈빛으로 바뀌어 눈앞의 컵을 향한다.
알고 있다. 창회의 시선은 컵을 향해 있지만, 창회가 바라보는 것은 컵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너는.”
한참 동안 컵을 바라보던 창회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한다.
“내가 아는 그 한수. 맞냐?”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