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61화 (161/271)

161 : GREATEST LOVE OF ALL (3)

***

얼마 전 기훈이 할머님 초청 만찬 때 너무 많이 차리셨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오늘 창회 어머님께서 차려주신 생일상에 비하면 그때 곰탕 만찬은 앙트레(entree), 영어로 하면 애피타이저 수준이다.

딱 봐도 최소 2배 이상이다.

배가 터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뻥 하고 터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걱정이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는데, 그랬는데, 오늘은 양이 더 많다는 이야기다.

그때도 노력했지만, 정말 열심히 노력했지만, 결국에는 남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어른이 주신 음식은 사양하지 않고 다 먹어야 한다. 특히 생일상 같은 경우에는 근성으로 이겨내야 한다.’는 신념이 있다고 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불가능한 거다.

그러면 어떻게 해? 어머님이 차려주신 음식을 남겨? 5년 만에 차리신 생일상인데?

아니지. 다 방법이 있다. 일종의 버프랄까?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먹은 음식도 탈 안 나고 자연스럽게 배출할 수 있도록 살짝 몸을 조절하면 된다.

그리고 얍삽하게 나만 버프를 걸 수는 없지. 서현 씨와 승환이에게도 걸어주었다.

둘 다 내 정체를 알고 있으니 부담이 없구만.

창회에게는 안 걸었다.

저 녀석은 배불러야 한다. 엄마가 차려준 소중한 음식인데, 배가 불러야지. 소중한 영양분 하나까지 모두 흡수해야 하고 말이지.

나중에 진짜 힘들어 보이면 그때 슬쩍 도와주지 뭐.

아무튼 버프 덕분에, 우리는 어머님이 정성스럽게 차려주신 초호화 생일상을 만끽할 수 있었다.

배가 안 부르니 좋은 게, 맛있는 음식이 계속 맛있어.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배가 차면 만족도가 쭉쭉 떨어진다. ‘F(x)=-(ax) (a>1)’ 그래프처럼 음식을 먹을수록 식욕도 만족도도 급격하게 곤두박질친다는 말이지.

하지만 지금은? ‘y>a(a는 평균 이상의 만족도)’ 부등식 상태다. x값이 어떻게 변하든 맛과 행복은 계속 일정값 이상을 보장된다는 이야기다.

서현 씨도 좋은가 보다. 보통 여자들이 많이 먹는다고 해도, 절대적인 양으로 보면 남자들보다 적을 수밖에 없다. 위의 용적이라는 물리적인 조건도 그렇고, 체중에 민감한 심리적 요인도 있고.

하지만 ‘오늘은 아무리 먹어도 배도 안 부르고 살도 안 쪄요!’라는 상황이 마음에 들었는지, 너무 행복해하고 있다.

박승환은? 저 녀석은 원래 음식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먹는 것도 대충 배만 채우면 된다는 생각이고. 뭐, 그런 박승환치고는 나름 열심히 먹고 있다. 하지만 배부르고, 안 부른 걸 떠나서 먹는 걸 힘들어하는 것 같기는 하다.

대신 박승환은 다른 쪽으로 노력하고 있다.

창회 어머니에게 열심히 재롱을 떨고 있었다.

“솔직히 친구 입장에서는, 하아~ 조금 걱정이 된다니까요.”

창회가 도통 이성에 관심이 없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맨날 ‘학교-헬스장-집’만 왕복하고 있다. 창회가 그래도 어디 가서 꿀릴 얼굴은 아니라서 여자애들도 호감을 표하기도 했는데, 창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친구로서 걱정돼 죽겠다. 뭐, 그런 이야기를 열심히 하고 있다.

박승환이 진짜 대단한 게, 지금 어머니에게 해드리는 이야기가 사실은 ‘김창회 고자 이론’이다. 헬스에 미친 김창회는 정신적 고자라 생식능력이 없다, 그런 주장을 담고 있는 이론이다. 이론의 설립 목적이 김창회 디스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아드님은 잘생기고 성격도 좋아서 인기가 너무 많아요.’로 재포장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창회 디스 같지만, 자세히 들으면 칭찬이다.

우리 승환이 기자 시켜야 되겠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분명 대한민국 언론사에 이름을 남길 거야.

아무튼, 창회 어머님도 그런 아들 칭찬이 싫지 않으셨는지, 미소로 승환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계신다.

역시 박승환 데려오길 잘했어. 자고로 잔치에는 광대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

물론 단순히 재롱 떨라고 승환이를 데려온 것은 아니다.

일단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서가 첫 번째 이유.

아들 생일상 차려주는데 친구 하나 없이 아들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으면, ‘우리 아들 왕따 당하는구나’ 하며 얼마나 슬퍼하시겠어. 그러니 적당한 머릿수가 필요했고, 승환이 머리도 하나 추가한 거지.

그렇다고 너무 과해도 안 된다. 어머니가 힘들어지시거든. 그러니까, 나, 승환이, 그리고 서현 씨, 이렇게 세 명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실 내가 귀찮아서 그런 것도 있다. 인정한다.

찬희나 중훈이, 지연이도 함께할 수 있었는데, 그러려면 지금 이 비과학적인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줘야 하잖아.

내가 작은 어르신이고, 사실 이건 시공간 왜곡이고, 창회 어머님은 5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아우.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다.

그리고 찬희나 이중훈까지 이 자리에 있었다면 분명 재롱 경쟁이 일어났을 거다. 오버해서 분위기 깨는 놈이 적어도 하나는 나왔을 거다.

쓰임새에 따라서 독(毒)도 약이 된다지만 그것도 적정 용량일 때의 이야기지. 독에 독과 독을 섞은 칵테일은 그냥 졸라 쎈 맹독(猛毒)이지.

“그래서, 우리 아들은 마음에 드는 사람 없어?”

승환이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가 창회를 바라보며 그렇게 물어보신다.

계속 엄마바라기 효자 모드였던 김창회도 그런 주제는 부담스러운지, 눈을 피하고 입을 다문다.

부끄러워하네. 김창회가 부끄러워한다.

짜식아! 엄마가 물어보면 재깍재깍 대답해야지!

“우리 아들 여자에게 관심 없어? 엄마도 손주가 갖고 싶은데, 예쁜 손녀도 좋고, 우리 아들 닮은 손자도 좋고,”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연애는 몰라도, 저희가 책임지고 장가는 꼭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손자, 손녀, 적어도 하나씩은 꼭 안겨드릴게요!”

승환이가 가슴을 팡팡 치면서 그렇게 장담한다.

이 자식아, 창회 가족 계획을 왜 니가 하고 있는데?

난 몰라. 니가 장담했어. 난 자신 없어. 니가 알아서 해!

***

미리 만들어진 계획에 따르면, 어머니가 차려주신 생일상을 열심히, 그리고 최대한 맛있게 먹고, 열심히 재롱떨면서, ‘창회가 이렇게 친구들 사이에 사랑받고 있습니다’를 보여드린 후, 모자 두 사람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재빨리 자리를 비켜주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계획은 언제나 계획일 뿐. 도망가려다 잡혀버렸다.

아무리 배불러도 식후에 과일을 꼭 먹어야 한다며, 어머니께서 거실에 가서 앉아 있으라고 하셨고, 우리는 얌전히 거실에 앉아 있었다.

그렇게 거실에 앉아서, 뒷정리를 하시는 어머니를 보며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일단 신기했다.

오늘 처음 뵈었는데, 처음 이 집에 왔는데, 그런데도, 마치 처음이 아닌 것처럼, 예전에도 뵈었고, 예전에도 밥 얻어먹으러 쳐들어왔었던 것처럼 지금 상황이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느낌이 신기했다.

동시에 행복하다는 기분도 들었다.

아니, 행복했다.

승환이가 재롱을 떨고, 그런 승환이를 내가 서포트하고, 창회가 눈을 부라리고, 그런 창회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설거지를 돕겠다고 나서는 서현 씨와 마치 모녀지간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니의 모습이.

식탁을 정리하며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창회의 모습이.

행복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슬펐다.

이 행복이 정해진 끝을 향해 간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고 그 사실을 이 공간의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슬펐다.

그래서 더욱 힘주어 최대한 행복한 표정을 만들었다.

우리 모두는 애써 슬픔을 가슴 속 깊은 곳에 밀어둔 채로, 최선을 다해 행복해지려 하고 있었다.

***

즐겁고 행복한, 한편으로 슬픈 티타임이 끝나고, 나와 서현 씨, 그리고 승환이는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회 어머님은 자고 가라고 말씀하셨다. 방 있다고, 자고 가라고.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오늘 밤, 두 모자가 그동안의 이야기를 하기에,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이야기하기에, 오늘 밤은 너무 짧고, 그 짧은 밤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창회 어머님은 현관 앞에서 우리 한 명 한 명을 꼬옥 끌어안아 주셨다.

승환이를 안아주시면서 와줘서 고맙다고, 창회의 친구가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창회의 힘이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그렇게 말씀하셨고, 승환이는 창회처럼 좋은 친구를 낳아주셔서 고맙다고, 창회가 친구여서 행복하다고 답했다.

서현 씨는 말없이 어머니 품 안에서 살짝 눈물을 보였다.

“어떻게 해야 지금 이 고마운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우리 창회와 앞으로도 친구가 되어줘요.”

그렇게 말씀하시며 날 안아주시는 어머님의 팔에, 가슴에 체온이 느껴진다.

단순히 36.5도라는 온도가 아닌, 사람이, 엄마만이 가질 수 있는 따뜻한 온기가 내 안으로 스며든다.

“오늘 너무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온기를 느끼며 어머니에게 말했다.

“…또 놀러 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했다.

“그래요. 또 놀러 와요. 다음에는 더 맛있는 거 만들어줄게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일렁이고 있었다.

***

현관에서 신발을 신고도, 또 한참 동안의 작별 인사가 이어졌고, 그렇게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현관을 나올 수 있었다.

손을 흔드는 두 사람의 모습을 망막에 새긴 채, 현관문이 닫혔고, 우리 세 사람은 현재 시간의 성북동에 서 있었다.

닫혀 있는 현관문을 보면서, 다시 그 문을 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현관문을 열고, ‘어머니.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오늘 자고 가도 될까요?’ 그렇게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 물결쳤다.

“후우~ 오늘 참 힘드네. 너무 많이 먹었어.”

나는 숨을 깊게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이다. 많이 먹기는 먹었지만, 버프 덕분에 속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승환이와 서현 씨는 고개를 끄덕인다.

서현 씨 눈에는 아직도 물기가 묻어 있다.

아무래도 오늘 운전은 내가 해야 되겠네.

“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내가 승환이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승환이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택시 타고 갈래. 조금 걷고 싶다.”

평소의 장난기는 하나도 없는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승환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나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적이 드문 밤길을,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작게라도 엉엉 소리 내어 울면서, 그렇게 터벅터벅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나중에 어쩔 거야? 지울 거야?”

승환이가 물어본다.

서현 씨도 날 바라본다. 물기 젖은 서현 씨의 눈이 같은 질문을 하고 있다.

지운다. 창회의 기억을 지운다는 의미.

상처가 되지 않도록 오늘의 기억을 지우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내 정체를 해명하기 복잡하다든가, 숨겨야 한다든가 하는 이유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오로지 창회, 선물 같은 하루가 창회에게 상처가 되는 것은 아닐까?

그 하나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창회를 위해서 기억을 지우는 방법도 생각해 두고 있었다.

나 혼자의 결정도 아니다. 서현 씨와 승환이도 내 생각에 동의했었다.

그리고 지금 승환이가, 서현 씨가 묻고 있는 것이다.

기억을 지울 것이냐고.

“…모르겠다.”

솔직한 마음이었다. 진짜로 모르겠다.

창회를 위해서라면, 앞으로 살아갈 날을 위해서라면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는데.

엄마 품에 안겨 끄억끄억 소리 내어 울던 창회를 떠올리니, 엄마를 바라보던 창회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 기억을 지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내일 창회 만나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승환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나에게 다가와 내 가슴을 가볍게 툭 하고 치며 말한다.

“고생했다.”

“그래. 너도 고생했다.”

“서현 씨도 수고하셨어요.”

“네. 승환 씨도 수고하셨어요.”

그렇게 인사가 끝났지만, 박승환은 한참 동안 말이 없다.

그렇게 내 앞에 서서 잠시 내 눈을 보더니.

“…할머니 보고 싶다.”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뒤돌아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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