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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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먹고 마신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흐리더니, 결국 비가 오기는 오려나 보다. 역시 김창회 생일.
화장실에 가다가 마침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최유라와 딱 마주쳤다.
‘니가 왜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는데?’ 그렇게 개드립을 칠까 하다가 맞을까 봐 참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했지.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나는 고개를 돌려 안쪽으로 시선을 두었다.
내 시선 끝에는 망국(亡國)의 설움을 깡소주로 달래는, 나라 잃은 백성이 있었다.
“그날, 나 간 다음에. 어떻게 된 건데?”
“그날?”
그래. 그날.
우리 최유라가 이모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 날,
질투에 눈이 먼 찬희가 찾아오고 내가 박승환, 이중훈 두 악마에게 끌려간 바로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다오. 박찬희가 왜 저 구석에서 일제강점기 당시 절망에 빠져 아무런 의지도 없이 하루하루 술에 빠져 사는 룸펜처럼 저러고 있는지 어서, 어서 알려다오!
“어땠을 것 같은데?”
“찬희가 똥불을 찼겠지?”
내 말에 유라가 웃는다. 장난기가 묻어있는 그런 미소다.
“너희들 가고도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바닥만 쳐다보다가 그러더라. 이제 그만하자고.”
유라가 말한다.
“그만하자고? 헤어지자고 그랬다고?”
“응.”
“뭐라고 그러면서?”
“신뢰가 무너졌다고.”
아. 역시 박찬희!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똥볼을 찼어요! 제대로 찼어요!
내가 찬희 머릿속에 들어갔다 온 것은 아니지만, 그날 박찬희가 어떤 생각으로 똥볼을 찼는지는 충분히 유추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찬희는 화가 났을 것이다.
여자친구가, 아니, 여자친구이기 이전에 1년 넘게 알고 지낸 친한 친구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났겠지.
물론 실제로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찬희 그 멍청한 놈은 그 사실을 모르니, ‘유라가 나에게 거짓말을 했어!’라고 대전제를 고정핀으로 팍 박아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헤어질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실제로 유라가 형태와 양다리를 걸쳤다는 확신도 없었고, 설사 양다리라는 강력한 심증이 있다고 해도 고작 저녁을 먹은 것 가지고 ‘감히 외간 남자와 저녁을 함께 먹다니!’ 같은 망발을 할 정도로 생각이 없는 놈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었겠지. 넘어가고 싶지도 않았을 거다. 거짓말을 했다는 대전제를 이미 깔아버렸으니까.
그러면? 이렇게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진실을 알아야겠다.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직접 물어봐야겠다.
그런 결정 말이지.
거기까지는 좋다 이거야. 정공법이니까.
문제는 그 정공법을 사용하는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찬희가 그 결정을 내리는 그 시간, 그 장소에 두 마리의 악마가 찬희의 귀에 악마의 유혹을 시전하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이런 건 그냥 넘어가면 절대로 안 될 일이야.’라든가, ‘명분은 확실해. 신뢰 문제니까.’라든가, ‘숙이고 들어가면 큰일 나. 명분은 너한테 있으니까 이럴 때일수록 무조건 강하게 나가야 해.’라든가,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것은 얼마나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하느냐. 그 부분이야.’라든가, ‘공세를 펼칠 때는 모든 전력을 다 쏟아야 해. 일단 헤어지자고 말하고 시작해.’ 같은 속삭임이 있었을 거다.
박찬희 양옆에 바짝 붙어 낮은 목소리로 그런 이야기를 속삭였을 것이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내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그랬을 테니까.
아, 물론 내 말은 조언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조언.
그 두 악마가 속삭이는 사악한 유혹과는 전혀 다르다.
아무튼, 유혹에 의해 흑화되어버린 박찬희는 ‘그래! 결심했어!’ 하고는 유라에게 전화를 건 거다.
그리고 ‘우리 이제 그만하자….’를 시전한 것이고.
“그래서?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알겠다고. 그러자고.”
그렇게 말한 유라는 그날이 떠오른 듯 쿡쿡하고 웃는다.
“크으.”
나도 모르게 신음 소리가 흘러나온다.
시나리오가 있었겠지. 아니, 작전 계획이 있었을 거다.
유라가 ‘미안해, 잘못했어.’라든가, 적어도,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라고 할 거다. 그렇게 나오면, 일단 우위를 점했다고 봐도 좋다.
그러면 선점한 전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최유라를 압박해야겠다. 전술적 우위를 통해 전략적 승리를 이끌어 내야겠다.
그런 작전 계획을 만들어놓은 거지.
하지만 유라가 쿨하게 ‘그래. 알았어.’ 해버리니까 열심히 만들어놓은 작전 계획은 모두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던 것이고.
아니, 무슨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해군도 아니고, ‘항공모함 아카기는 절대 침몰하지 않아’, ‘일본 해군은 강해! 강하다!’ 이따위 작전 계획이니 당연히 망할 수밖에 없지.
“그래서? 저 녀석이 그냥 물러나지는 않았을 텐데?”
내가 유라에게 물었다.
‘알았어. 그래. 미안하다.’ 그렇게 말하고 쿨하게 일어섰다면, 어쩌면 기습적인 한 수가 되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박찬희는 그런 배짱을 가진 남자가 아니지.
유라는 다시 쿡쿡 하고 웃는다.
“어떻게 했을 것 같은데?”
유라가 되묻는다.
“음…. 그렇게 쉽게 알았다고 하니까, 순간적으로 ‘이렇게 쉽게?’ 그런 생각이 들고, 화도 나지만, 지가 먼저 그렇게 해버렸으니 화낼 명분도 없고, 또 그것보다도 ‘이게 아닌데,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면 안 되는데’ 하는 얼굴로 어버버하다가 그랬겠지.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자.”
유라가 흥미로운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봤을 것 같은데? 왜 거짓말했냐고. 말해달라고,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 물어보지는 않았을 거야. 헤어지자고 지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까, 순간적으로 구질구질해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을 했을 거고, 재빨리 ‘남자친구 자격으로 물어보는 게 아니라, 친구 자격으로 물어보는 거야.’ 뭐 그런 웃기는 변명도 했을 것 같은데?”
“어디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어?”
맞나 보다. 역시 박찬희. 순수한 우리 친구 박찬희.
“아니, 봤잖아. 승환이랑 중훈이에게 끌려가는 거. 그리고 추잡스럽게 그걸 훔쳐보고 있었겠냐. 박승환도 아니고.”
아니. 사실은 훔쳐보고 싶었다. 형사적 책임을 지는 한이 있더라도 훔쳐보고 싶었다.
“가끔 보면 한수 너도 은근히 무서울 때가 있어. 아무튼, 거의 비슷해. 왜 거짓말했냐고,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거니까 친구로서 대답해 달라고. 그래서 말해줬어. 거짓말 아니라고. 형태가 조카 맞다고. 사촌 언니 아들, 5촌 조카라고. 니들이 알면 ‘이모’라고 놀릴까 봐 이야기 안 했다고. 하지만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고.”
상상이 간다. 아무 말도 못 하고서 눈만 껌뻑껌뻑 하고 있는 바보 같은 박찬희의 얼굴이.
“그리고?”
“그리고는 뭐. 오히려 내가 더 섭섭하다고 했지. 내가 말을 안 한 것은 있지만 거짓말을 한 건 없는데, 너는 내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했구나. 여자친구라면, 아니, 여자친구 이전에 친구라면 먼저 물어보는 게, 나는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오해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물어보고 싶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데, 너는 그렇게 하지도 않고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했구나. 아니, 연인인 것을 떠나서 우리가 함께한 날이 얼마인데, 먼저 어떤 상황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렇게 헤어지자는 말을 쉽게 하는구나. 너의 말대로 우리 사이에 신뢰 관계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깨졌구나. 그래. 찬희 니가 원하는 대로 우리 그만하자. 더 할 말 없으면 먼저 일어설게. 그리고 나왔지.”
최유라가 싱글싱글 웃으며 그렇게 끔찍한 말을 한다.
나는 웃을 수 없다. 제삼자인데도 등골이 서늘하다. 내가 박찬희였으면 트라우마가 생겼을 거야.
“…어쩔 건데?”
“응? 뭘?”
“진짜 헤어질 거야?”
“아니.”
유라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찬희랑 만나겠다는 거, 나도 쉽게 결정한 건 아니야. 혹시나 잘 안 되면 어떻게 하나 그런 걱정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유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소개팅에서 연인이 되는 건 쉽다. 애초에 연인으로서 상대방을 만나는 것이니까.
하지만 친구에서 연인으로의 관계 변화는 소개팅처럼 ‘괜찮은데? 한번 만나볼까?’처럼 단순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잘 안 되었을 경우, 최악의 경우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쉽게 헤어지자고 말한 건 좀 괘씸하지만, 이번 기회로 찬희도 배우는 게 있겠지. 안 그래도 오늘 정도쯤 용서해주려고 했었어.”
“역시.”
“역시?”
“내 친구 최유라. 역시 상여자다 싶어서.”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내 칭찬에 최유라가 입술을 작게 삐쭉 내민다.
“나중에 셋이서 밥 먹자. 아무튼, 한수 너한테는 고맙다고 말해 주고 싶어.”
“고마우면 밥 사.”
“찬희가 살 거야.”
“비싼 데 가야겠네.”
“그래. 아주 비싼 데 가자.”
유라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린다.
“잠깐만. 질문 하나만 더.”
나는 최유라를 다시 불러 세웠다.
사실 지금 화장실 조금 급한데, 방광이 ‘나 터질 거야. 지금 터진다? 터져버릴 거야!’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있기는 한데, 막상 이야기 나온 김에 궁금했던 거 하나 더 물어보자.
오줌 참는 연습 하면 정력에도 좋다고 했다. 그렇게 스스로에게 변명하면서 나는 유라에게 물었다.
“작년에는 왜 그랬던 거야?”
“작년에 뭐?”
“작년에 찬희가 고백했을 때, 그때는 왜 거절했던 거야?”
정확히 말하면 거절도 아니지.
찬희가 ‘나랑 사귀자’라고 말하기도 전에, 최유라의 오른손 보디블로우가 찬희의 복부에 제대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때?”
최유라가 그날 기억이라도 떠올랐는지, 작게 웃으며 말한다.
“어. 그때는 왜 그랬는데?”
“술.”
“응?”
“술 먹고 취해서 홧김에 고백하는 거 너무 싫잖아. 진짜 최악이야.”
그건 그렇지.
“찬희가 나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알았는데, 물론 고마웠고. 근데 술 먹고 그러니까.”
“만약에 술 안 먹고 했으면?”
“받아줬겠냐고?”
“어. 과방에 촛불 깔고, 풍선 달아놓고 그랬으면?”
“그거는 술 먹고 하는 것보다 더 최악인데.”
“그냥 정상적으로 했으면?”
내 말에 최유라가 다시 작게 웃고는 말한다.
“안 받아줬을 거야.”
“왜?”
“그때 따로 좋아하는 사람 있었거든.”
그래? 이건 또 처음 듣는 이야긴데?
“그래? 누군데? 혹시 우리도 아는 사람?”
내가 물었다.
대답해줄 거라고 기대하고 물은 것은 아니었다.
“응. 아는 사람.”
그런데 최유라가 그렇게 시원하게 말해준다.
오! 대박!
대한민국 기레기님들이 ‘특종’, ‘단독’에 목숨 거는 이유를 알겠다. 오줌이 쏙 들어가네.
“누군데?”
내가 그렇게 묻자 최유라는 말없이 작게 웃는다.
그렇게 잠시 동안 날 바라보다가.
“너.”
그렇게 말하고는 내 가슴을 톡 치고, 몸을 돌린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서, 그렇게 뒤돌아가는 최유라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