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54화 (154/271)

154 : D-day (1)

과방에는 승환이와 나만이 남아 있다.

박승환과 단둘이서 할 이야기가 있다는 핑계로 다른 친구들은 모두 보냈다.

다들 ‘박승환 또 뭔가 꾸미다가 걸렸구나.’ 그렇게 수긍하고 자리를 비켜줬다.

이래서 사람은 평소 행실이 중요한 거다.

아무튼, 지금 승환이 녀석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뭔데? 난 잘못한 것 없는데? 도대체 뭘로 갈굴 건데?

그런 눈빛이다.

으이구. 이 자식아, 그런 거 아니다.

지금 상황에서 ‘너에게 따로 부탁할 게 있다.’ 그렇게 말한다면?

박승환은 바로 거절 스킬을 시전할 것이다.

내가 회사에 다녀본 것은 아니지만, 부하 직원의 보고서를 살펴보지도 않고, ‘이게 뭐야? 지금 장난쳐? 다시 만들어와!’ 그렇게 소리치며 바로 직장 상사의 갑질 패시브 스킬 서류 날리기(E) 시전할 거다.

들어보려 하지도 않겠지. ‘아무것도 못 하게 손발을 꽁꽁 묶어놓고서, 이제 와서 나에게 부탁할 게 있나 보지? 무슨 부탁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거절이다. 거절을 거절하는 것을 거절한다.’ 이럴 거다.

100% 확신한다.

이런 상황에서 순진하게 ‘너에게 부탁할 것이 있는데’ 같은 어설픈 잽은 안 되지. 큰일 나지.

1라운드 시작 ‘땡’ 치자마자 바로 필살기를 써야 한다. 바로 ‘러시 앤드 뎀프시롤’ 시전이다.

“형님 식당에서 생일파티 끝나고 2차를 할 거야. 창회, 나, 그리고 너. 이렇게 셋이서만. 은밀한 애프터파티.”

내 말이 끝나기도 전해 ‘싫어!’라고 말하려 했던 박승환의 입이 멈춘다.

갈등하고 있다. 대한민국 기레기님들처럼 ‘아, 몰라. 싫어. 안 들어. 일단 니들이 틀렸어. 니들이 잘못한 거야. 안 들렵 에베베베!’ 하고 싶은데, 내 필살기가 제대로 들어가 버렸거든?

그렇겠지. 부정하기에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제안이거든.

2차라든가, 단 세 명만이 참석하는 은밀한 애프터파티라든가.

생각만 해도 후끈 달아오르는 단어 아니겠어?

“…2차?”

역시 거기에 먼저 반응하는군.

“2차.”

“…내가 생각하는 그 2차?”

“니가 생각하는 2차가 뭔데?”

내 말에 박승환이 입을 다문다.

왜 그런 거 있잖아.

가끔씩 거북한 주제를 논의해야 할 때. 뭐 예를 들어 돈이라든가, 야한 이야기라든가, 더러운 이야기라든가.

한번 분위기만 만들어지면 봇물 터지듯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는데, 내가 먼저 그 봇물을 터트렸다는 불명예는 피하고 싶은 거.

내가 먼저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고,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해줬으면 좋겠는데, ‘아, 나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 녀석이 먼저 시작해서 어쩔 수 없었어.’ 같은 면죄부를 한 장 깔고 가고 싶은 그런 느낌.

지금 박승환이 딱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두 번째 단계, 세컨드 페이즈(Second Phase)를 의미하는 ‘2차’라는 단어에서 뭔가 음란하고 향락적인 무언가를 떠올렸는데, 그 이미지를 자신이 먼저 꺼냈다가는 나중에 매도당할 것이 두려운 거지.

침묵은 뭐다? 턴 종료와 같은 의미다.

이제 내가 말할 턴이라는 이야기지.

설명을 듣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거부한다. 왜냐? 너의 턴은 끝났으니까!

“일단 식당에서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면….”

나는 그렇게 내가 계획한 ‘2차’ 생일파티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우후후.

***

가끔씩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대단하다 싶을 때가 있다.

틈을 주지 않고, 바로 필살기 시전한 필살기는 제대로 먹혔다. 그냥도 아니고 크리티컬로.

나를 바라보는 박승환이 그 증거다.

하지만 조금 전 ‘니가 무슨 말을 하든 일단 거절이다’라고 할 것 같던 표정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크게 떠진 눈, 반쯤 벌린 입. 미세하게 떨리는 얼굴 근육.

대악마 박승환도 놀랄 수밖에 없겠지.

만약에 내가 처음부터 ‘승환아. 너에게 따로 부탁할 것이 있는데’로 시작했다고 쳐봐라. 어떻게 되었겠어?

분명 안 한다느니, 부탁에 대한 반대급부가 무엇이냐느니 같은 헛소리를 적어도 몇 분은 들어줘야 했을 거다. 아무리 명분이 정당하다고 해도, 상대가 박승환이라면 정당한 명분 같은 건 그다지 가치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초반에 스턴을 걸어버리고 연속기에 필살기까지 넣어버리니, 아무리 대악마 박승환이라고 해도 감히 심리 도발을 걸 생각도 못 하고 저렇게 날 바라만 보고 있단 말이다.

치밀한 계획, 대담한 실행, 그리고 예상된 결과를 한 치의 틈도 없이 이끌어 내는 내가 가끔 나도 두렵다.

그리고 사실 계획이 없었다고 해도, 박승환은 저런 표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렇겠지. 그럴 수밖에 없겠지. 박승환이 아니라 다른 누구라고 하더라도 같은 반응이겠지.

그 정도로 황당한 이야기이기는 하지.

“…가능해? 그게?”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승환이의 첫 번째 질문이다.

서현 씨도 내가 승환이에게 해준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물었더랬지.

가능하냐고.

그때 내 대답은 ‘모르겠어요.’였다.

하지만 지금 내 대답은 이거다.

“가능해.”

“가능하다고?”

“가능해. 허락도 받았어.”

내 말에 승환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만 보고 있다.

“허락…해 주셨다고?”

“그래. 이미 허락받았어. 같이 할 거지?”

내가 그렇게 묻자 승환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그 시간이 그리 짧지는 않았지만, 나는 박승환이 어떤 대답을 할지 잘 알고 있다.

사실 이미 정해져있다.

“젠장. 이건 거절할 수 없겠는데.”

박승환이 분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중얼거린다.

뭐 당연한 결과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그런데, 그러면 그건 어떻게 할 건데?”

뭐가 또 남았는지 박승환이 그렇게 묻는다.

***

드디어 금요일, D-day. 김창회 생일 당일이 되었다.

하늘도 김창회 생일인 것을 아는지, 아침부터 두꺼운 구름이 잔뜩 껴있다.

하늘 컨디션도 그렇고, 일기예보도 그렇고 딱 보니 하루 종일 어둡다가 오후부터 비 올 것 같다.

그래. 이래야 김창회 생일이지.

오늘의 주인공 김창회는 평소와 다름이 없다.

평소처럼 무표정하고, 수업 듣고, 주변 사람들까지 입맛 떨어지는 닭찌찌 도시락 까먹고, 과방 구석에서 덤벨 들고 있고.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오늘 내 생일인데 아무도 안 알아봐 주고. 흥. 삐졌음.’ 이딴 표정은 아니라는 거지.

이중훈이 같았어 봐.

오늘 며칠이지? 그러고 보니 너는 생일 언제냐?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다녔을 거다.

우리 솔직한 박찬희는 아예 며칠 전부터 자기 생일이 언제라고 말하고 다녔을 테고.

뭐 그래봤자 생일빵이나 처맞겠지만, 그래도 생일날 뭔가 축하라는 형식의 무언가를 받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인가 보다.

생일이면 어머님에게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꽃다발 사 들고 빨리 집에 갈 생각은 안 하고 말야. 그저 술 먹을 생각밖에 없는 불효자들 같으니!

아무튼, 김창회는 우리가 어떤 음모를 꾸미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평소와 똑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너무 평소와 다르지 않으니, 조금 걱정이 되는 것도 솔직한 마음이다.

그래도 나름 열심히 준비했는데, 안 들키겠다고 나름 고생했는데, 이따가 저녁에 ‘서프라이즈! 사랑하는 우리 친구! 생일 축하한다!’ 그렇게 해줬을 때, 저따위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 끄덕이고는 우둔살이나 처먹고 있으면 좀 빡칠 것 같은데….

아. 물론 감격해서 두 손으로 얼굴 감싸고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오열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는 무표정이 백배는 낫기는 하다.

남자가 질질 짜는 건 못 참지.

그래도 기획자의 입장에서 조금은 놀래줬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

모든 것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찬희를 제외한 우리 모두는 오늘 저녁에 따로 일정이 있다는 뉘앙스를 흘렸고, 박찬희는 계획대로 창회의 마지막 수업이 끝나자마자, 자기 이야기 들어줄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핑계로 창회를 따로 유인했다.

당연히 찬희와 유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는 창회는 의심 없이 찬희를 따라갔고, 우리는 김창회의 눈을 피해 오늘 생일파티가 열릴 형님네 정육식당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찬희와 유라가 싸운 게 다행이지 싶다. 거짓말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러운 핑계가 만들어졌으니까. 그나저나, 찬희 저 자식, 괜히 유라한테 까였다고 정신 못 차리고 삽질하다가 계획 다 엎어버리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쪼금 불안한데?

아무튼, 그렇게 김창회를 유인하고 나와 이중훈, 박승환은 먼저 식당으로 가서 세팅을 시작했다.

사실 세팅이라고 해도 별거 없었다.

테이블 옮겨서 자리 배치하고, 테이블에 수저랑 술잔 깔고, 지우가 부탁했던 고깔모자 놓고, 카메라 세팅하고.

카메라를 왜 세팅하고 있냐고?

이중훈 아이디어다. 우리가 창회 생일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했다는 것을 영상으로 남겨놓아야 한다나 어쩐다나.

“자본주의적인 마인드로 접근을 해야지. 단순히 생일파티 해주고 끝낼 거야? 그러면 그 은혜도 모르는 짐승 같은 김창회가 ‘아…. 친구들이 날 위해 이렇게까지 해주다니. 나중에 꼭 은혜를 갚아야겠다.’ 같은 생각을 할 것 같냐? 아니야. 아니거든. 영상을 남겨둬야지. 물적 증거가 필요하다고. 짐승 같은 창회에게 일말의 부채감이라도 안기려면 우리가 짐승 같은 너를 위해 이렇게 노력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니까!”

짐승 같은 김창회라는 말을 대체 몇 번이나 하는 거야?

아무튼 이중훈은 그렇게 명분을 걸었지만, 누가 믿겠냐? 그 더러운 속내가 뻔히 보이는구만.

일말의 부채감? 고작 그 불확실한 이익을 위해 귀찮음을 감수해가면서 녹화를 하겠다고?

단순한 물적 증거를 위해서 액션캠을 세 대나 설치할 이유가 없잖아.

아니지. 찬희가 들고 간 것까지 치면 액션캠만 네 대다. 김창회를 유인하는 역할을 맡은 박찬희에게 액션캠을 들려 보냈다. 유인해오는 장면을 몰래 찍어오라고.

카메라를 네 대나 동원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편집이라는 과정이 들어간다는 이야기다.

단순히 녹화에서 끝내지 않고, 자막도 깔고 배경음도 삽입해서 그럴싸한 ‘감동 몰래카메라’를 한 편 뽑아내겠다는 이야기다.

그렇게 만든 영상 누구 보여주려고? 창회 보여주려고?

아니지. 지우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다. 창회가 아니라 창회 여동생을 위한 선물이다.

확실하다. 내가 가진 모든 재산과 오른 손모가지를 건다. 쫄리면 뒈지시던가.

계산을 해봤겠지. 분명 계산기를 두들겨봤을 거다. 그리고 답이 나왔겠지. 절대로 김창회를 통해서 지우와 가까워질 수 없다는 결론을 도출했을 거다.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우리 이중훈은 그렇게 쉽게 포기할 사람이 아니지.

창회를 통하지 못하면 직접 공략하면 된다.

어떻게?

‘창회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해주기 위해 제가 이렇게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하는 증거를 남기면 된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거다.

으이구. 이 녀석아. 참 열심히도 산다.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영상파일 싱크용 손바닥 슬레이트를 ‘짝’ 하고 치는 이중훈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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