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 Die Traumdeutung
한복, 아니 지금 우리가 한복으로 알고 있는 복식과는 조금 다른, 하지만 전통적 형태의 복식을 입은 여인, 아니, 여인이라는 단어는 아직 어울리지 않는 소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를 바라보는 소녀의 눈에는 감정이 일렁이고 있다.
슬픔.
아직 어린 나조차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진한 슬픔이 소녀의 검은 눈동자 안에서 일렁이고 있다.
어리다고? 내가?
나는 소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여섯 살? 아니, 다섯 살?
그 정도의 나이에 불과한 어린아이인 내가, 소녀와 마찬가지로 한복 비슷한 옷을 입고, 뒷짐을 쥔 자세로 소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아니,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몇 살인지가 아니다.
소녀가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고 소녀가 느끼는 슬픔이 마치 공기를 통해 복사되는 온기처럼 내 마음에 천천히 스며든다.
안아주고 싶었다.
내 작은 두 팔을 뻗어 소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아름다웠다.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그 처연한 슬픔이 아름답다고 느껴졌다.
내 어설픈 위로가 그 아름다움을 깨트릴 것 같아서, 나는 차마 팔을 내밀어주지 못한 채, 그저 그녀의 그 아름다운 슬픔에 공명하고 있었다.
그저 소녀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먼저 움직임을 보인 쪽은 소녀였다.
소녀는 두 손으로 치맛단을 여미며 천천히 몸을 굽힌다.
소녀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온다.
나와 눈높이를 맞춘 소녀의 반달 모양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눈물이 고여 있는 눈동자와는 달리, 소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다.
울음을 참으려 웃으려 하는 것일까?
웃음을 지우려 울려 하는 것일까?
나는 마음속으로 그런 질문을 되뇌면서 소녀의 눈물이 들이찬 눈동자를 바라본다.
슬픔이 일렁이는 눈동자, 옅은 미소가 담겨 있는 반달 같은 눈, 그리고 그 눈을 따라 방울져 흘러내리는 눈물 한 방울.
이 소녀는 누구일까?
아니. 나는 알고 있다.
이 소녀가 누구인지 나는 알고 있다.
이 소녀는 나의….
“소녀는 기다리고 있겠…”
***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나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누워 있는 그 자세 그대로 사라져 가는 꿈의 잔상을 붙잡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꿈.
꿈을 꾸었다.
어떤 꿈이었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치,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억지로 기억해내려고 정신을 집중해 봤지만, 그럴수록 머릿속을 가득 채운 연무는 더욱 짙어져만 가는 듯했다.
답답했다.
꿈에서 무엇을 했는지, 누가 나왔는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잔상처럼 남아 있는 꿈을 꾸었다는 기억과 내 몸을 짓누르는 이유 없는 슬픔만이 내가 무언가 꿈을 꾸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을 뿐이었다.
슬픈 꿈이었을까?
낯설지 않은 슬픔이 여전히 나를 감싸고 있었다.
***
오늘 수업을 모두 마친 나는 과방으로 걸어가며 오늘 새벽에 꾸었던, 기억나지 않는 꿈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기억해 내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단순하게 기억만 나지 않는 그런 상황이었다면 차라리 뭐 개꿈인가보다 그렇게 넘어가고 말았을 텐데….
무슨 감기 후유증처럼, 하루 종일 알 수 없는 우울함이 날 괴롭힌다.
내가 무슨 사춘기 소녀도 아니고, 갱년기 중년도 아닌데, 이유 없이 오늘 하루 종일 마음이 좀 그렇다.
그렇기에, 아침에 꾸었던 그 꿈이 자꾸 신경 쓰이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무슨 꿈이었기에, 이렇게 하루 종일 사람을 괴롭히는 것일까?
작년에 심리학 개론 수업을 들었었더랬다.
심리학을 복수전공으로 공부해보겠다는 그런 착실한 의도는 아니었고, 여자 꾈 때 도움 된다는 박승환의 꼬임에 이중훈이 홀라당 넘어갔고, 거기에 나도 딸려가 버렸다, 뭐 그런 이야기다. 그때 여자친구도 있었는데 말이지.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여자 꾀는 거에 특별히 도움은 안 되는 것 같다.
아무튼 심리학 개론 수업에서 꿈에 대해 배웠었다.
흔히 숙면이라고 불리는 비렘(NREM : Non-REM) 상태가 육체와 두뇌 모두의 스위치가 꺼진 상태라면, 렘(REM: Rapid Eye Movement) 상태는 육체의 스위치는 꺼져 있지만, 두뇌는 깨어난 상태라고 할 수 있고, 4개의 NREM 스테이지에서 REM 상태로 돌아왔을 때, 깨어난 두뇌가 연상하는 이미지가 꿈이 된다고 한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꿈은 꿈을 꾸는 사람의 실제 기억과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꿈속에 등장하는 장소나 등장인물, 시간 같은 모든 요소는 꿈을 꾸는 사람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재료를 가지고 재구성된다고.
그러면 실제로 보거나 경험한 적 없는 귀신이나, 판타지 세계나, 사막이나 아니면 되게 야한 꿈은 어떻게 꿀 수 있는 걸까?
영화와 같은 미디어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고 한다. 즉 좀비 영화를 보고 자면 꿈속에서 좀비에 쫓겨 다닐 가능성이 크고, 야한 영화를 보고 자면….
아, 그리고 야한 꿈을 꾸고 싶으면 야동보다 야설을 읽으라고 했다.
시각적인 자극보다는 텍스트에 기반한 상상력이 더 끈적한 꿈을 꿀 수 있게 하는 양질의 재료가 된다고.
야한 이야기 좋아하시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님도 그러셨다잖아. 과거의 기억 중 강렬한 임팩트가 꿈에서 표출된다고.
흠. 도대체 무슨 꿈이길래, 하루 종일 이렇게도 사람을 답답하게 하는지 모르겠네, 모르겠어.
악몽은 아닌 것 같은데….
***
오늘은 목요일 되시겠다.
그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지옥의 연강 퍼레이드가 펼쳐지는 지옥 같은 날이고, 단순히 연강 퍼레이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녁에 커피집 알바까지 가야 하는 지옥 중에서도 가장 깊은 무간지옥 같은 날이라 이거지.
그런데 오늘은 알바를 가지 않는다.
이제 중앙그룹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가진 내가 꼴랑 최저시급 고거 받겠다고 알바를 해야겠냐는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고, 과감하게 알바를 때려쳐 버린 것은 아니고.
바꿨다. 이번 주 목요일하고, 다음 주 월요일하고.
바로 내일이 ‘김창회 탄신일 기념 서프라이즈 생일파티’이니까.
그래서 하루 전날 이렇게 알바까지 바꿔가면서, ‘D-1 최종점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 진짜. 괜히 해준다고 그랬어. 그냥 안 한다고 할걸.
지우가 여동생이 아니라 남동생이었다면 아무런 부담 없이 ‘응. 싫어. 꺼지렴.’ 그렇게 말해줄 수 있었을 텐데.
“창회는?”
내가 이중훈이 말한다.
“집에 갔어.”
“확실해? 저번에 유라처럼 갑자기 나타나고 그러는 거 아니지?”
“확실해. 헬스장에 있는 거 기훈이한테 확인했어.”
기훈이 녀석이 확인해줬다면 확실하겠지.
“오케이. 마지막으로 최종점검하자. 시간은 내일 19시. 장소는 형님네 정육식당. 식당 예약 확실한 거지?”
내가 다시 중훈이에게 물었다.
“확실함.”
이중훈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얼굴로 그렇게 장담한다.
이번 김창회 생일파티 준비에 가장 열성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바로 이중훈이다.
친구인 창회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싶은 순수한 마음에서?
아니지. 아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지우 때문이다. 백 퍼센트 확신한다.
김창회 생일 한번 제대로 챙겨서 지우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아주 시커먼 흑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될까?
안 된다. 절대로. 천 퍼센트 확신한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지금 굳이 해줄 필요 없지. 가용한 자원은 쓸 수 있을 때 최대한 이용해야지. 세상은 자본주의 아니던가?
“예약 인원 몇 명이라고 말씀드렸다 했지?”
“일단 열다섯. 근데 오겠다는 사람들이 또 있는 것 같아서 스무 명 정도 될지도 모르겠다고 형님에게 이야기는 해놨어.”
스무 명? 김창회 깜짝 생일파티에 스무 명이나 온다고?
어디 보자. 일단 우리 멤버가 다섯, 거기에 지연이까지 하면 여섯. 유라도 온다고 했지? 동기 여자애들도 몇 명 올 것 같고, 대충 그쪽도 다섯 명이라고 하고. 그럼 많아봤자 열하난데?
“열다섯도 안 될 것 같은데?”
“아직 확답 안 한 선배들하고 1학년 포함하면 열다섯은 되지 않을까?”
“야. 선배들? 1학년? 솔직히 난 내일 너희들도 과연 다 올지 의심스러운데.”
내 말에 박승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한다.
이 자식아! 너는 수긍하면 안 되지!
“아무튼 스무 명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안 된다고 보고, 대충 한 열 명 정도라고 다시 말씀드려. 괜히 고기 많이 준비해두셨다가 남으면 민폐니까. 아! 그리고 고기 케이크도 말씀드렸지?”
“어. 우둔살로.”
헬창 김창회 선생께서 가장 선호하시는 부위가 바로 우둔살이다. 지방이 없으니까.
“오케이. 그럼 장소는 일단 됐고. 내일 김창회 유인하는 건 찬희, 너지?”
내 지목에 과방 구석에 우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박찬희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저 자식. 어제 똥뽈 찼구만.
어제 술 처먹고, 두 악마의 꾐에 빠져 ‘사실대로 말해. 그날 조카 만난다고 나한테 거짓말하고 다른 남자 만났지? 너?’ 같은 헛소리를 해서 일 크게 만든 거겠지.
지금 저렇게 유체이탈해 버린 모습을 보니 ‘나는 너를 믿었는데, 너는 나를 믿지 못했나 보구나.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찬희 너라면 나를 믿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갖자’ 같은 소리라도 들은 얼굴인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중에 최유라한테 물어봐야지.
“유인 계획은? 차질 없이 준비 다 끝났어?”
내 질문에 찬희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만 끄덕이지만 말고 김창회를 어떻게 유인해낼 건지 구체적인 계획을 말해줘.”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박찬희가 힘겹게 입을 연다.
“…유라하고 싸웠다고…,”
거기까지 말하고는 나라 잃은 백성처럼 깊게 탄식을 토해낸다.
그래. 더 이상 말 안 해도 다 알겠다.
유라하고 싸웠어. 헤어질지도 몰라. 너무 괴롭다. 술이라도 마셔야겠는데, 다른 놈들에게 말했더니 다들 바쁘다네. 그러니 창회 너밖에 없다. 술이나 한잔하자.
뭐 그런 핑계로 김창회를 식당으로 유인해내겠다고 그럴싸한 시나리오를 써 두었는데, 시나리오가 예언이 되었으니, 한숨이 나오겠지.
자업자득이다. 이 자식아.
그때 내 눈빛만 제대로 읽었어도 이런 일이 없지.
“믿는다. 잘해라.”
나는 그렇게 찬희에게 영혼 없는 응원을 해준 후 박승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승환이 너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 맞지?”
내 말에 박승환이 날 노려본다.
이번 김창회 생일파티에서 박승환에게 부여한 임무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저 악마가 움직이면 분명 문제가 생길 테니까.
승환이가 대답하지 않자 나는 지연이에게 시선을 주었다.
“승환 선배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요.”
지연이의 당찬 대답이다.
지연이에게 박승환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겨놨거든.
역시 우리 똘똘한 지연이, 잘하고 있어.
좋아. 모든 것이 계획대로 잘 굴러가고 있어.
“오케이.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안이야.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철저히 보안을 지킬 수 있도록. 다들 술 먹지 말고 오늘 집에 가서 조신하게 있어. 이만 해산.”
내 해산 선언에 모두들 가방을 챙긴다.
최종점검 회의는 끝났지만, 내일의 모든 준비가 다 끝난 것은 아니지.
“박승환, 너는 잠깐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나는 그렇게 승환이를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