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48화 (148/271)

148 : 5년 전

-5년 전.

하교 시간까지 고작 30분을 남기고 갑작스럽게 시작된 초여름의 장대비는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엄청나게 쏟아붓고 있었다.

종례가 끝나자마자 모두들 떠나버린 교실에 유일하게 남은 한 소년이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중학교 3학년의 김창회였다.

타이밍도 참 절묘하다.

창회는 교실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을 보면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갑작스러운 비였다.

창회도, 친구들도, 하물며 기상청도 예상하지 못한 초여름의 갑작스런 장대비였다.

당연히 우산은 없었다.

우산을 들고 오지 않은 사람은 창회만은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도 모두 우산을 챙겨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교실에 없었다. 오직 창회만이 교실에 남아 있었다.

잿빛 하늘을 향하던 창회의 시선이 천천히 교문 쪽으로 움직였다.

교문 너머에는 다양한 색깔과 문양으로 이루어진 꽃밭이 만들어져 있었다.

우산이 만들어 낸 꽃밭이었다.

갑작스러운 비에 우산이 없을 아이들을 데리러 온 엄마들이 만들어 낸 꽃밭이었다.

창회의 시선은 그 우산이 만들어 낸 꽃밭을 향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우산을 든 엄마들을 향해 있었다.

행여나 아이들이 비를 조금이라도 더 맞을까 봐, 자신의 한쪽 어깨를 우산 밖으로 내어주는 엄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고스럽게 우산을 가져온 엄마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인상부터 쓰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부럽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모습이 처량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런 자기 연민에 사로잡히기에, 창회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역에서 누구나 아는 명가(名家)의 장손, 그냥 장손도 아니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바로 집안을 이어야 하는 장손.

할아버지는 엄했고, 집안 분위기는 무거웠다.

어리광을 부리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아니, 단순히 명가의 장손이라는 무게만이 창회를 철들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창회의 시선은 여전히 교문을 향해 있었다. 하지만 생각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3년 전, 처음 엄마의 투병 사실을 알게 된 그 날.

그날 창회의 소년 시절은 끝이 났다.

더 이상 소년에서 머물 수 없었던 그 3년 동안 엄마는 너무나도 많은 입퇴원을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반복되는 입퇴원 속에서 엄마는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갔다.

그런 엄마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창회는 자연스럽게 철이 들 수밖에 없었다.

고작 열여섯의 창회는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창밖의 엄마들과 아이들을 보면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았다.

자기 연민은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으니까.

창회는 천천히 시선을 옮겨 회색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았다.

조만간 그칠 것처럼 보이지는 않네.

계속 비를 퍼붓는 하늘을 바라보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계속 여기 이러고 있어봤자,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여동생은 잘 들어갔을까?

근처에 있는 다른 여중을 다니는 동생 지우는 오늘 창회보다 한 교시 빨리 끝마쳤을 것이다.

아마도 장대비가 시작하기 전에 학교를 나갔을 테고, 비를 피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설사, 비를 피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비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사람을 보냈을 테니까.

지우는 괜찮겠지. 괜찮을 거다.

그런 결론이 나오자, 창회의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내 걱정이나 하자.

창회는 그렇게 생각하며, 머릿속으로 집까지 가는 코스를 그려보았다.

학교에서 집까지 최단 거리로 걸어가면 20분.

뛴다면?

절반까지는 아니어도 몇 분 정도는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뛰어가야겠다.

김창회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방을 집어 들었다.

***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교문을 박차고 나와 혼신의 힘을 다해 뛰었지만, 그런 창회의 노력이 무색하게, 고작 몇 분 만에 억수 같은 장대비는 속옷까지 흠뻑 적셔버렸다.

뛰든, 걷든, 홀딱 젖어버린다는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교과서를 학교에 두고 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창회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늦추었다.

그리고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눈조차 뜨기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장대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천천히 걸어 나갔다.

이상했다.

뛰어도 소용없다고, 걸어가겠다고 마음을 먹은 그 순간부터, 억수같이 쏟아지는 이 비가 어쩐지 싫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열대기후의 스콜(Squall) 같은 이 장대비가 반갑다는 생각까지 찾아왔다.

그리운, 아주 그리운 추억을 상기시켜 주었으니까.

***

9년 전.

창회가 일곱 살이던 그 해, 초등학교 입학을 몇 달 남겨놓은 초겨울, 엄마와 이모들과 함께 여행을 갔었다.

어디였지? 태국이었나? 베트남이었나?

정확한 건 기억나지 않지만, 동남아 어디라는 기억은 확실히 남아 있었다.

기이한 모양의 열대 야자수, 뜨거운 기온, 이국적인 풍경과 사람들.

일곱 살 창회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한, 순간순간이 행복했던 여행 둘째 날.

호텔 야외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한참 하던 그때,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어느새 폭포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로 바뀌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빗소리가 마치 타악기처럼 온 천지를 진동했고, 수영장은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빗방울을 튀어 올리며 협주를 하고 있었다.

신기했다. 놀라웠고, 즐거웠다.

그렇게 미친 듯 쏟아지는 폭우 한가운데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자처럼 두 팔을 휘저으며 소리를 지르는 일곱 살의 자신이 있었다.

오빠의 모습을 보고서, 같이 두 팔을 열심히 휘저으며 소리를 지르던 여동생도 있었다.

그런 남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걱정스러운, 하지만 행복한 눈으로 바라보는 엄마도 있었다.

억수같이 내리는 장대비를 맞으며, 마치, 어제 보았던 장면처럼 9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옷 속을 파고드는 시원한 빗물이 그날의 기억을 계속 재생해주고 있었다.

그 행복했던 날로 돌려보내 주었다.

창회는 살짝 팔을 들어 올려, 남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작은, 아주 작은 동작으로 팔을 움직였다.

***

어딘가 그립고 행복한, 그리고 한편으로 슬픔이 느껴지는 작은 연주를 마치고, 집에 도착한 창회가 문을 열었을 때, 그를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현관 너머로 은은하게 풍겨오는 음식의 냄새였다.

언제나처럼 차가운 공기와 온몸을 짓누르는 고요함 대신에, 온기가 담뿍 담겨있는 따뜻한 국, 창회가 좋아하는 김치 콩나물국의 향기가 창회에게 가장 먼저 인사를 건넸다.

창회는 현관에서 몸이 굳어버렸다.

설마?

그런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려 오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왔니? 어머? 흠뻑 젖었잖아? 우리 아들 우산 안 가지고 갔었어?”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창회에게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창회는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에 있어야 할 엄마가 집에 있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병원에 있었는데, 어젯밤, 병원에서 엄마를 보고 왔었는데.

환자복 대신, 앞치마를 두른 엄마가 병실 대신 집에 있었다.

“…퇴원했어?”

“퇴원은 아니고, 잠깐 외박. 의사 선생님이 하루 정도는 다녀와도 된다고 해서.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 일단 옷부터 갈아입어야겠다. 감기 들겠어. 우리 아들.”

황급히 욕실로 향한 엄마는 가져 나온 수건으로 창회의 얼굴을 닦아주고, 가방을 벗겨주었다.

“우리 아들, 배고프지? 얼른 씻고 밥 먹자. 엄마가 맛있는 거 해놨어.”

창회를 욕실로 밀어 넣으며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창회는 그날 엄마의 목소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9년 전,

엄마가 건강했던 그 날의 목소리와.

***

따뜻한 온수 물줄기가 온몸을 감싸자 따스함과 포근함이 창회의 몸과 마음에 스며들었다.

평상시와 달랐다.

언제나와 같은 욕실, 똑같은 온수. 하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따뜻하고 포근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온기가 피부를 통해 몸과 마음속 깊은 곳까지 스며드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비를 맞아서 그래.

창회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말은 했지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욕실 문밖에는 갈아입을 옷을 준비하고 있는 엄마가 있었고, 부엌에는 온기가 가득 담긴 국이 끓어오르고 있기에, 그러하기에 평소보다 더 따뜻하고, 더 포근하고, 더 행복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을 창회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인정할 수 없었다.

두려웠다.

인정하는 순간 버틸 수 없을까 봐 두려웠다.

엄마는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엄마가 병원으로 돌아가면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는 엄마, 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닦아주는 따뜻함, 그리고 침샘을 자극하는 김치 콩나물국의 향기 대신, 언제나처럼 창회를 반겨주는 차가운 공기와 무거운 침묵을 견뎌낼 수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렇기에, 지금 느껴지는 온기와 포근함에서 애써 시선을 돌리려 하고 있었다.

“괜찮았는데….”

창회가 중얼거렸다.

괜찮았는데, 잘 버텨왔는데, 애들을 데리러 온 엄마들을 봤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참아낼 수 없었던 창회는 결국 쏟아지는 샤워 물줄기 뒤에 숨어서 소리죽여 한참을 울고 말았다.

***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샤워를 하고 나온 창회는 엄마가 준비해 준 옷으로 갈아입고 식탁에 앉았다.

오랜만에 맛보는 오이소박이, 오징어 진미채, 직접 참기름을 발라 구운 김, 노른자가 반만 익은 계란프라이, 그리고 갓 지은 밥.

“미안해. 엄마는 몰랐어. 우리 아들 우산 안 가지고 갔는 줄 알았으면, 마중 나갈 걸 그랬어.”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창회 앞에 김치 콩나물국이 담긴 국그릇을 내려놓았다.

“얼마 안 맞았어. 친구 우산 같이 쓰고 왔는데, 요 앞에서 잠깐 장난치다가 그때 다 젖은 거야.”

창회는 그렇게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는, 거짓말이 들통나기 전에 재빨리 숟가락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김치 콩나물국.

엄마의 음식은 전체적으로 간이 약했다. 건강을 생각해 소금을 덜 넣었다.

하지만 김치 콩나물국만은 달랐다. 시원하면서 동시에 얼큰했다.

중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은 아니었지만, 창회는 엄마의 김치 콩나물국을 좋아했다. 매일 먹으라면 매일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죽을 때까지 단 하나의 음식만을 먹어야 한다면, 엄마의 김치 콩나물국을 아무런 고민 없이 선택할 정도로 좋아했다.

“그랬구나.”

맞은편에 앉은 엄마가 국물을 먹는 아들을 보며 작게 웃는다.

아들의 모습을 보는데 마음이 아팠다.

조금 더 어리광을 부려도 될 나이인데.

너무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아들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창회는 그런 엄마의 슬픔을 느꼈다.

“지우는?”

창회는 말을 돌렸다.

엄마의 마음의 시선을 미안함과 슬픔에서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다.

“학원 갔대.”

“…할아버지 집에서?”

“응.”

창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숟가락을 들어 국물을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지우는 엄마가 집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알고 있었다면, 할아버지 집으로 가지도 않았을 테고, 학원에 가지도 않았을 테니까.

고작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여동생이었지만, 창회는 그런 여동생이 안쓰럽고 불쌍했다.

“문자 보낼게.”

창회가 말했다.

저녁은 집에서 먹게 하고 싶었다. 엄마가 끓여준 김치 콩나물국을 먹여주고 싶었다.

“응.”

“내일 다시 가?”

“응. 미안해. 아들.”

창회는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 잘못이 아니라고, 엄마가 미안할 일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렇게 말해 주는 대신, 밥을 국에 말았다.

“말아먹으려고? 국물 더 줄까?”

그런 창회의 모습을 보고 엄마가 물었다.

“응.”

창회는 고개를 끄덕였다.

먹을 수 있을 때까지 먹고 싶었다. 최대한 많이 먹어두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엄마의 김치 콩나물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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