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 프로틴 육수 우려서 미역국 끓여줘야 하나?
싸우자는 거지? 이건 싸우자는 이야기지?
“사실 저는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기는 한데, 남자들은 친구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절대로 좋게 표현 안 한다는 건 알고 있거든요.”
지우가 말한다.
나와 승환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지.
생각이라면 몰라도, ‘내 친구가 이렇게 좋은 녀석이야.’라는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 본 적 있나?
아니. 술에 진탕 취하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꺼낼 이유가 없지.
“아시죠? 우리 오빠 원래 말 없는 거. 그런 오빠가 친구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엄청 쎄게 말하는 거예요. 가끔씩 비속어까지 섞어서 말하는데, 저는 진짜 깜짝 놀랐어요. 우리 오빠가 저런 말도 할 수 있었구나, 하고. 그렇게. 아무튼 그렇게 친구들 욕하면서 특히 한수 오빠와 승환 오빠에 대한 비난을 많이 했어요.”
지우가 말한다.
“어떤… 비난을 했는데요?”
승환이가 물어본다.
“말씀드릴까요?”
지우가 살짝 웃으며 말한다.
“…아니요.”
승환이는 포기한다.
그래. 잘 생각했다.
저 이쁜 아가씨가 해주는 원초적인 이야기는 마음의 상처가 될 거야. 분명히. 백 퍼센트!
“하지만 저에게는 오빠의 말이 진짜로 나쁜 말처럼 들리지 않았어요. 아니, 실제로도 나쁜 말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내 친구 녀석들은 이렇게 재미있고, 좋은 녀석들이야.’ 그렇게 말하고 있고, 한수 오빠나 승환 오빠는 ‘믿을 수 있는 친구’라고 이야기한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 오빠가 가장 믿는 두 분에게 부탁드리고 싶었어요. 우리 오빠가 믿는 친구라면 저도 믿을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지우가 우리 두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보면서, 참 예쁜 미소를 짓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예쁜 얼굴이라서 예쁜 미소가 아니라, 예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쁜 미소라는 그런 생각 말이다.
승환이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그와 관련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일단은 알겠어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그나저나 서프라이즈 생일파티라….”
대신 그렇게 중얼거리며 책상을 손톱으로 툭툭 친다.
나도 같은 마음이기는 하다.
깜짝 생일파티를 해달라.
오케이. 뭐. 그 요청은 접수.
하지만 어떻게 해줄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남았다.
여자애들은 어디 파티룸이나 예쁜 카페 같은 곳에서 깜짝 생일파티를 해주고 하는 것 같은데, 우리는 그런 것하고는 인연이 없다.
아니, 설사해 준다고 해도, 파티룸을 빌려 김창회 생일파티?
깜짝 놀란 김창회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오열하는 장면을 떠올리니, 좀 전에 먹었던 떡볶이가 올라오려고 한다.
그런 끔찍한 생각은 당장 때려치우고,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일단 케이크는 필요하겠지? 그래도 생일인데.
근데 김창회가 케이크를 처먹을까?
안 처먹는다. 절대로. 내기해도 좋다.
억지로라도 처먹이려면 단백질 가루를 개어서 케이크 비스무리하게 만드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근데, 프로틴으로 케이크 만들 수 있을까? 반죽은 만든다 해도 그게 구워질까?
“혹시 생각해 놓은 게 있어?”
내가 지우에게 물었다.
“네. 사실은 기훈이네 할머니에게 부탁드리려고 했어요.”
“할머님에게?”
“네. 원래는 금요일에 기훈이 할머니에게 생일상 좀 차려주세요, 그렇게 부탁드리려 했는데,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성당에 가신대요. 무슨 동아리 비슷한 거 하신다고. 그래도 제가 부탁드리면 아마 할머니는 거기 빠지시면서까지 도와주려고 하실 텐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요. 오빠도 좋아하지 않을 거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가 행복이 최우선이지, 김창회 생일 따위야.
“그럼 토요일에 하면 되지 않을까요? 당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봤자 하루 차이고. 또 우리가 해주는 것도 좋지만, 동생분도 함께 하시면 그 의미도 더욱 살고.”
승환이가 그렇게 말한다.
승환이 말 중에 틀린 말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이런 말을 할 녀석이 아니지.
이 녀석은 아마도 난장판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찬희, 중훈이가 지우와 만나 일어나는 폭발적인 화학작용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을 것이다.
“…다음 토요일에는 제가 서울에 못 올라올 것 같아서요.”
그렇게 말하는 지우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진다.
무언가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무언가를 캐물을 정도로 생각이 없지는 않은 나와 승환이는 빨대를 입으로 가져갔다.
“말씀드려야겠죠? 제가 부탁드리는 건데.”
눈치가 있는지 지우가 그렇게 말한다.
“아니, 괜찮아.”
“아니요. 말씀드릴께요. 어제 제가 말씀드렸죠. 오빠랑 할아버지 사이가 그리 좋지는 않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오해, 각자의 생각만을 고집하는 두 조손의 사소한 오해가 만든 두 사람의 대립.
나는 승환이에게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 주겠다고 양해를 구하고는 다시 지우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가 다다음주 화요일에 수술을 받으세요. 그래서 다음 주말에는 할아버지 옆에 있어 드리려고요.”
“…큰 수술?”
“아니요. 제가 알기로는 그렇게 큰 수술은 아니라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까. 물론 오빠는 몰라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님이 수술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오빠 생일을 챙겨 주겠다고 서울에 올라오기는 심적으로 힘들겠지.
“그래서 좀 이르기는 하지만, 어제 단둘뿐이기는 하지만 어디 좋은 데 가서 맛있는 거라도 사 주려고 했는데, 오빠가 싫다고, 싫다고 고집에 고집을 부려서 좀 곤란한 상황이었어요.”
나는 기훈이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누군가가 생일파티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창회가 적극 거부하는 전화 통화가 있었다는 이야기.
“나가서 밥 먹는 거 싫으면 집에서 먹자. 내가 생일상 차려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또 공교롭게도 기훈이 할머님께서 밥 먹으러 오라고 하셔서 또 찬스를 놓쳐 버렸고. 저는 오늘 내려가야 하고. 그런 상황이에요. 우리 오빠는 생일 같은 거 챙기지 말라고, 자기는 그런 거 필요 없다고 그러는데, 그래도 일 년에 단 하루뿐인 생일날 평소처럼 운동하고, 집에 와서 보충제나 타 먹는 오빠 모습 생각하면 너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두 분 오빠들에게 부탁을 드리려고요. 그리고, 이거.”
지우가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봉투 하나를 꺼낸다.
뭐야? 갑자기 이 타이밍에서 봉투가 왜 등장해?
아침드라마야? 이거 받고 우리 오빠와는 연을 끊어주렴. 그런 거야?
“뭐야. 이게?”
“생일파티 예산이요.”
지우가 그렇게 말한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고향에서 한 끗발 하는 가문의 손녀라고 했지?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살았고, 그래서 돈을 준비해 왔다는 이야기?
“할아버지가 주시는 거예요.”
“응?”
“할아버지는 요맘때쯤 되면 항상 특별 용돈을 주세요. 특별히 뭐라고 말은 안 하시는데, 저도 다 알아요. 오빠 생일선물 챙겨 주라고 주시는 돈이라는 거. 올해는 생일도 못 챙겨 주니까 그냥 용돈이라고 줘 버릴까 생각해봤는데, 오빠가 당연히 의심할 게 뻔하죠. 제가 돈 버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혹시 받는다고 해도, 기껏해야 보충제나 사 먹고, 헬스장 회비 내고 할 텐데, 그런 것도 좀 아깝고 해서, 그래서 두 분이 이 돈으로 오빠 생일파티를 해주셨으면 해요.”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봉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움직여 지우를 바라보았다.
아직 철이 없는 것일까?
사람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욕심이라는 괴물은 평소에 그 존재감을 꽁꽁 감추고 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법과 도덕의 울타리 안에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욕심이라는 괴물은 숨어 있는 것이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먹이만 있으면 바로 위장막을 거두어내고, 마음을 모두 잡아먹으려 한다.
욕심의 대표적인 먹이가 바로 돈이었다.
나는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안에 들어 있는 금액을 확인해 보았다.
“스무 장?”
볼륨을 확인한 내가 물었다.
봉투 안에는 노란색 5만 원 지폐가 들어 있었다.
“네. 100만 원이에요.”
지우가 말한다.
나는 봉투를 내려놓고, 다시 지우 쪽으로 밀었다.
“음. 오해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좋겠는데, 이 돈은 지우가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따로 창회에게 선물을 사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승환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승환이는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그 돈을 왜 돌려주는데?’와 같은 탐욕스러운 눈빛 대신, ‘음. 그래. 잘하고 있군. 그래야 내 친구지.’라는 진지한 눈을 하고 있다.
“창회 생일은 우리가 챙겨 줄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어. 혹시 클럽이나 호텔을 빌려서 성대하게 해주라는 이야기는 아니지?”
“아니에요. 그냥, 간단하게라도 그냥. 맛있는 거 드시면서 그랬으면 좋겠다고.”
“그래. 그 정도는 우리가 해줄 수 있어. 그러니 이 돈은 지우가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창회에게 따로 선물을 해줘.”
내 말에 지우의 시선이 승환이에게로 향한다.
승환이도 고개를 끄덕인다.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이야기다.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시 봉투를 집어 들지는 않는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하지만 이 돈으로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말하고 작게 웃는다.
“할아버지도 오빠들에 대해서 아세요. 오빠에게 좋은 친구들이 생겼다고 제가 말씀드렸거든요. 할아버지도 그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이 용돈을 주신 거예요. 아마도. 아니, 분명히 그래요. 오빠들이 이 돈을 가지고 다른 곳에 쓴다고 하더라도, 저는 알 수 없겠죠. 할아버지도 그렇고. 하지만, 저는 오빠들을 잘 모르지만,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어요. 우리 오빠는 미련한 사람이지만, 그래도 사람을 보는 눈은 있다고 믿으니까, 저는 우리 오빠에 근거해 오빠들을 믿고 있어요. 그러니 이 돈으로 해주세요. 그러면 그 생일파티에, 저도, 그리고 할아버지도 같이 참여하게 되는 거니까요.”
지우가 그렇게 말한다.
철이 없는 게 아니었다.
믿고 있는 것이었다. 신뢰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아닌, 창회를.
나는 다시 봉투를 바라보았다.
100만 원,
분명 큰돈이다. 꼭 우리 나이가 아니더라도, 백만원이라는 금액은 절대 적은 돈이 아니다.
그 적지 않은 돈에 신뢰라는 보증이 걸려 있다.
“그래. 알았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일단 대충 생일파티를 하고, 남은 건 창회 주면 되겠지. 아니면 나중에 다시 지우에게 돌려주던가.
승환이도 같은 생각인지 특별히 제지하지는 않는다.
“그나저나 뭘 어떻게 해줘야 하나? 프로틴 육수 우려서 미역국 끓여줘야 하나? 아니지. 그 자식은 죽어도 국물 안 먹잖아. 고문할 때 국물 먹인다 하면 다 불어버릴 녀석인데….”
“생일이라고 끓여주면 성의를 봐서 한 그릇 정도는 먹어주더라고요. 그리고 우리 오빠 먹는 국 있어요. 김치 콩나물국은 먹어요. 비 오는 날 그거 끓여주면 밥 말아 먹어요.”
지우가 그렇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