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43화 (143/271)

143 : 곰탕 (2)

망우동. 기훈이네 빌라.

황금 같은 토요일 저녁, 나는 기훈이네 집 거실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 이삿짐 나르러 왔을 때는 거실이 좀 좁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커다란 상을 가운데 두고도 사람들이 둘러앉을 수 있으니, 그렇게 좁은 집은 아닌가 보다.

음. 역시 집은 잘 구했어. 창회 녀석이 노력한 보람이 있네.

부엌에서는 커다란 들통에 기훈이 할머니께서 정성으로 우려내신 곰탕이 끓고 있다.

기훈이 이놈의 자식. 내가 할머니 힘드시니까 인터넷에서 뒤져서 직접 고으라고 했는데!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기훈이가 하겠다고 하면 할머니가 맡기시겠나?

당신께서 직접 하시겠지.

“많이들 들어요. 차린 게 없어서 미안해요.”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며 김창회 다섯 명이 와도 다 먹을 수 없다는 데에 내가 가진 모든 재산과 내 왼쪽 손모가지를 자신 있게 걸 수 있는 어마어마한 양의 잡채를 가지고 오신다.

“힘드신데, 뭘 이렇게 많이 준비하셨어요?”

내가 재빨리 잡채 접시를 받아들며 말했다.

묵직해! 뭐야? 왜 이렇게 묵직한데?

할머니, 잡채 안에 뭘 숨겨두신 거예요? 바벨이라도 숨겨두셨어요? 잡채는 부피 대비 중량이 가벼운 음식 아니었던가요?

나는 조심스럽게 잡채 그릇을 내려놓으며 상을 바라보았다.

이미 상에는 조선 말기 육체노동자도 많다고 말했을 정도로 높이 쌓아 올린 고봉밥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모둠전, 어디 산 하나를 작살내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푸짐한 산나물, 고향의 손맛이 가득 담겼음이 분명한 포기김치 등등 어마어마한 음식이 올려져 있었다.

거기에 저 말도 안 되는 양의 잡채라고?

축구부는 몰라도, 농구부 회식은 가능할 것 같은데? 아니, 배구부도 가능하겠다.

음식은 남기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특히 어른이 주신 음식은 절대 남기면 안 된다고 배웠는데….

오늘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걸 어떻게 다 먹어 치울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기훈이가 사골곰탕이 담긴 대접 여섯 개를 들고 와 조심스럽게 상 위에 내려놓는다.

오케이. 포기. 저 대접 크기 봐라. 곰탕만 먹어도 위장 터진다.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물리적으로 터진다.

아, 그리고 왜 여섯 그릇이냐고?

오늘 저녁 만찬에 참석자가 여섯 명이었으니까.

일단 할머니와 기훈이. 그리고 나.

오케이. 여기까지는 레귤러 멤버고.

그다음에 내 옆에 지연이가 앉아 있다.

할머니가 그러셨다. ‘그 아가씨’도 데려오라고.

서현 씨와 지연이 두 사람 중 하나라고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두 사람 중 누구를 지칭하는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서현 씨와 지연이, 두 사람 다 할머니와 인연이 있다.

서현 씨는 아버님 모셨던 날에, 지연이는 이삿날에.

두 사람 모두 할머니에게는 고마운 사람이겠지만, 무게추는 서현 씨에게 더 기울어 있지 않을까?

내가 할머니라면 서현 씨에게 좀 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아버님과 관련해 힘이 되어 준 사람은 서현 씨였으니까.

하지만 서현 씨를 데려올 수는 없었다.

서현 씨는 지금 쿤밍에서 중국 중앙 정부 높은 분들과 공을 치고 계실 테니. 아니지, 지금쯤이면 만찬을 하고 계시려나?

아무튼, 그래서 지연이에게 연락을 했고, 데리고 온 것이다.

다행히도 할머니는 지연이를 보고 놀라거나 기대와는 다르다는 실망감 담긴 눈빛을 보이지는 않으셨다.

그러기는커녕, 마치 오랜만에 놀러 온 손녀딸 대하듯 너무 반겨주셔서 보는 내가 다 흐뭇할 정도였다.

좋아. 지연이까지 네 명, 그럼 남은 두 사람은?

다른 한 명은 윤기훈, 의형제인 김창회.

예상 가능한 인물이다.

기훈이와 친하고, 할머니도 좋아하시고, 집도 가깝고.

하지만 창회 옆에 앉아 있는 인물은 나는 물론,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저번에 그 여자분, 창회와 함께 나란히 캠퍼스를 거닐던 그 여자분, 당장 스포츠음료 하나 쥐여주고 대충 사진 찍어, 뽀샵이라고는 음료수 로고만 대충 박으면 그대로 포스터로 써도 전혀 위화감 없을 것 같은 그 여자분이 창회 옆에 앉아 있었다.

***

할머니도, 기훈이도 이미 창회 옆에 여자분과는 안면을 텄는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여자분도 지연이처럼 살갑게 할머니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 정체불명의 여자분이 신경 쓰여서 나는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몰랐다고 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밥이 너무 맛있었다.

국도, 모둠전도, 잡채도, 김치도, 다른 밑반찬도 모두 맛있었지만, 그중에서 밥이 단연코 가장 훌륭했다.

사골육수를 넣어 밥을 지으셨다네?

사골 밥이라는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한 번도 먹어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 고소하고 맛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네.

얼마나 고소한지, 진짜 다른 반찬 없이 밥만으로 두 그릇은 짤로 먹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다고 다른 음식의 맛이 부족하냐면 그것도 아니다. 그리고 밥의 임팩트가 강해서 그렇지.

모둠전, 진짜 기훈이 집만 아니었으면, 당장 뛰어나가서 막걸리 사 올 정도로 완벽했다.

아무튼, 그렇게 한참을 열심히 먹었지만, 결국 할머니가 내어준 음식에 반도 먹지 못했다.

탄수화물 안 쳐드시는 김창회도, 원래 먹는 양이 적은 지연이도 정말 최선을 다해주었지만, 애초에 우리가 어찌 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

터질 것 같은 배를 부여잡고, 우리는 거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식당도 아닌데 식사가 끝났다고 바로 ‘잘 먹었습니다~’하면서 일어날 수는 없잖아. 사람의 탈을 쓰고서 말이야.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앞에는 홍삼액이 담긴 컵이 하나씩 놓여 있었다.

저거, 오늘 내가 사 온 거다. 가격이 좀 나가기는 하지만, 어르신들 진상품으로 건강식품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하지만 지금, 배가 터질 것 같은 이 상황에서 한 모금이 1L처럼 느껴지는 홍삼액은 내 건강에는 안 좋을 것 같은데….

아무튼, 내 21년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홍삼액을 마시며 할머니 최근 근황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할머니는 적응을 잘하시고 계시단다.

성당에서 새로운 친구분들도 사귀게 되었고, 노인정에서도 텃세 없이 잘 적응하셨단다. 또 구청에서 하는 공공근로일도 하게 되어서 아침마다 운동 겸 놀이 겸해서 할머니들과 가볍게 동네 산책하면서 많지는 않지만 용돈도 받는다고 자랑도 하셨다.

기훈이 아버님 이야기도 전해 들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버님 면회를 가는데, 다행스럽게도 아버님은 열심히 치료를 받고 계시단다.

서현 씨 고모부 원장님께서 진짜 좋은 병원을 소개해 주셨는지, 알코올 의존증 치료는 물론, 알코올 의존증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다른 합병증, 예를 들어 고혈압 같은 다른 합병증에 대한 치료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가 지난 면회 때 찍어왔다는 사진 속 아버님의 모습은 내가 만나 뵈었던 그분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보기 좋은 얼굴을 하고 계셨다.

서현 씨가 봤다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나중에 기훈이에게 몰래 사진 좀 공유해달라고 해야지. 서현 씨에게만 보여주고 지운다고 하면 보내주지 않을까? 아니, 역시 실례겠지. 나중에 서현 씨 데리고 와서 보여 달라고 해야 되겠다.

기훈이 녀석도 요즘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셨다.

안 그래도 알바 많이 하는 녀석이, 집에 들어오면 늦게라도 한두 시간은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단다.

창회가 다다음 달 검정고시. 어떻게 괜찮을 것 같냐고 물었는데, 기훈이 녀석이 쑥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요즘 너무 행복해서, 이러다가 무슨 큰일이 생길까 걱정이 될 정도예요.”

할머니는 눈시울을 훔치며 그렇게 말씀하신다.

“아니에요. 큰일은 생길 게 뭐가 있어요. 아버님 건강해지시고, 기훈이 잘 크고, 할머니 친구분들이랑 재미있게 지내시고. 나쁜 일이 생길래야 생길 수가 없어요. 그저 할머니만 건강하시면 되죠. 그리고 큰일 생겨도 걱정을 하지 마세요. 할머니 손자가 몇 명인데, 기훈이만 할머니 손자 아니에요. 저도 있고, 여기 창회도 있고, 저기 그 못생긴 놈들도 있잖아요.”

“중훈 학생하고, 찬희 학생에게도 대접을 해야 하는데. 집이 좁아서….”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신다. 이름까지 기억하고 계시네?

“그 녀석들은 안 챙겨주셔도 괜찮아요. 아니, 챙겨주시면, 오늘 같은 맛있는 밥 만들어 주시면 나중에 틈만 나면 들이닥쳐서 밥 내놓으라고 할 놈들이라니까요? 예의를 모르는 놈들이에요.”

평소 같지 않은 창회의 농담에 자연스럽게 웃음이 번진다.

우리는 그렇게 오늘 이 자리에 없는 놈들을 가볍게 씹으며, 할머니에게 웃음을 안겨드렸다.

행복했다. 행복한 저녁 식사였다.

하지만 나는 단순히 행복에 취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 마음속에는 질문 하나가 네온사인처럼 반짝반짝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과연! 저! 여자분은! 누구인가!

***

사가정역 근처의 카페.

기훈이 집에서 나온 우리 네 사람, 나, 지연이, 창회, 그리고 정체불명의 스포츠음료 모델은 사가정역 근처 카페에 앉아 있다.

이미 배가 터질 정도로 밥을 먹었고, 거기에 한 모금이 1L처럼 느껴지는 홍삼액도 마셨다.

이제 충분하다. 위장에는 1나노미터의 공간도 없다. 물도 안 들어간다.

그런데도 우리는 카페에 앉아 있는 것이다.

진실을 알아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창회 오빠의 하나뿐인 여동생 김지우입니다.”

정체불명의 스포츠음료 모델이 그렇게 스스로 정체를 밝힌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아무리 김창회가 개념 없는 놈이라고 해도, 오늘 같은 자리에 썸녀를 데려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지연이가 예측했던 대로 가족이었고, 가족이라면 동생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논리적으로 추론을 이끌어냈지만, 직접 여동생이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의심하고 또 의심하고 있었다.

김창회에게 여동생이라니, 그것도 저렇게 예쁜 여동생이라니, 심적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겠지.

나는, 아니, 정확히 나와 지연이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는 얼굴로, 당연히 창회 여동생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표정으로 신상을 캐냈다.

이름은 김지우. 이름도 예쁘네.

창회 부모님은 왜 아들에게는 발음도 힘든 창회라는 이름을 주시고, 여동생에게는 부드러운 지우라는 이름을 주셨을까? 애들이 자라서 각자 이름에 걸맞게 클 것이라고 예견하셨던 걸까?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창회 동생 지우의 나이는 우리보다 한 살 아래, 그러니까 지연이하고 동갑. 하지만 학번은 우리하고 같다네?

어떻게?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 친구가 다니는 학교가 굉장히 유니크하다.

예전에 창회가 지나가는 말로, 기숙사 있는 지방대학교 다닌다고 했었는데, 그 기숙사 있는 지방대학교가 바로 국군간호사관학교였던 것이다.

국간사 사관생도님이셨구나. 그래서 그렇게 생기가 철철 넘쳐 흐르셨구나.

격주 주말에 한 번씩 서울에 오고, 서울에 오면 가끔씩 우리 학교에 와서 놀다 가는데, 그 모습을 나와 중훈이가 보게 된 것이다.

“한수 오빠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상상했던 것하고는 많이 다르시네요.”

김지우 생도님께서 그렇게 말하고 살짝 웃는다.

“어떤 상상을 하셨는데요?”

“되게 날카로운 이미지였어요. 오빠가 한수 오빠는 엄청 똑똑한데, 그 똑똑한 머리로 사람들을 괴롭히는데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말해줬거든요.”

내가 창회를 노려보았다.

창회 녀석은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목을 닦고 기다려라.

내가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크리티컬 한 방 정도는 각오해라. 펄킥 한 방은 찰 수 있겠지.

“그건 승환이라는 친구 이야긴데.”

“네. 승환 오빠라는 분 이야기도 들었어요. 아주 많이.”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계십니까?”

내 질문에 창회 여동생은 창회를 바라본다.

그 눈이 ‘말해도 될까?’ 그렇게 묻고 있다.

창회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명백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다.

“뭐랄까, 엄청 빼쩍 마른….”

김지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빼쩍 마른?”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나는 작게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테이블 밑에 있는 손을 움직여 녹음종료 버튼을 눌렀다.

박승환에게 다 이를 거야!

그 자식은 분명 복수한다. 어떤 방법으로든 분명히 복수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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