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 곰탕 (1)
자. 다시 정리해보자.
민주와 지연이는 동기이고, 여자들이 말하는 ‘친구’ 관계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단둘이서 밥을 먹거나 수다를 떠는 그런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민주가 지연이에게 밥을 먹고 차를 마시자고 제안했다. 일종의 독대 제안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수업과 관련한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민주의 본론은 수업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이 지연이의 분석이다.
민주의 진짜 목적은 우리라는 이야기다.
“선배들이랑 노는 거 재미있냐고. 그런 뉘앙스였어요.”
지연이가 말한다.
“우리랑 노는 거?”
“네.”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고?”
“네.”
“어떻게?”
“팩트만 말씀드리면 민주가 했던 질문은 ‘오빠들이랑 노는 거 재미있어?’였어요. 그래서 저는 ‘응. 오빠들이랑 노는 거 재미있어. 잘 해줘.’라고 답했고. 민주는 ‘그렇구나.’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갔어요.”
“그것뿐?”
“네. 그것뿐.”
“흠. 애매하네.”
사실 내가 보기에는 애매하다기보다는 특별한 의미 없는 질문처럼 보이는데? 그냥, 대화와 대화를 이어주는 접속사처럼 느껴지는데?
나의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지연이가 다시 설명한다.
“전 일종의 신호라고 느꼈어요.”
“어떤 신호?”
“부러워한다?”
“너를?”
“저라는 사람보다, 오빠들과 함께 어울리는 상황을.”
“왜?”
내가 물었다.
아. 물론 우리 멤버들이 재미있기는 하다. 박승환 개드립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박찬희의 바보짓을 보고 있으면 ‘ㅋㅋ 병신’하는 웃음이 하루 종일 끊이질 않으니까.
요즘은 좀 덜하지만 이중훈 찌질찌질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나름 즐겁다.
창회도 밖에서 보면 말 없고, 진중한 사람이라고 오해할 수 있지만 그놈도 또라이다. 어찌 보면 제일 또라이일 수도 있겠고.
아니다. 박승환이 있으니 제일은 아니겠구나.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런 재미는 우리 기준에서 재미있다는 거지, 보통의 상식을 가진 일반인들이, 우리와 같은 웃음 코드를 가지고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나온 질문.
왜?
“재미있잖아요. 오빠들이랑 노는 거.”
지연이가 그렇게 말하는데, 우리가 지연이의 순수한 영혼을 더럽힌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등골을 스친다.
이 녀석을 위해서 놓아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 상태가 지속되면 지연이는 일반인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건 그냥 느낌적인 느낌인데….”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고 잠깐 주저했다.
말해도 될까? 괜찮을까? 그런 눈빛이 보인다.
“선배들 중에 누군가 있는 것 같아요.”
“응?”
“민주가 호감을 가진 사람.”
“엥?”
지연이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끔찍한 소리를 한다.
아니, 민주가 얘네 학번에 신지수라며? 인간계 최강이라며?
그런 애가 뭐가 아쉽다고?
“누구를?”
그 질문에 지연이는 다시 입을 다문다.
알고 있는데 숨기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자신이 추측하는 가설을 스스로 검증하고 있는 모습이랄까?
“…음. 일단 나중에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데, 괜히 혼란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요. 아. 오빠를 못 믿는다든가, 그런 건 아니에요. 그저, 확실치도 않은 저 혼자만의 추측으로 괜히 이야기가 커지는 것이 무섭달까? 그런 것 때문에….”
지연이가 미안하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한다.
꼭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우리 동년배들 사이에서 연애 이야기는 꽤나 인기 있는 이슈다.
당연한 이야기지. 한참 연애할 나이잖아. 솔직히 이때 해야지, 언제 해?
누구랑 누구랑 썸을 타고 있다든가, 누가 누굴 좋아하는 것 같다든가, 찬희가 까였다든가 같은 이야기는 언제나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지연이도 이제 갓 스무 살 여대생이다. 그런 이야기에 흥미가 없을 리가 없다.
하지만 신중하게 접근한다.
혹시 자신의 추측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지, 상처가 되지 않을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 이런 녀석이었지.
***
“그 사람이요.”
“어? 누구?”
“오빠 때린 그 학생.”
“윤기훈? 응. 왜?”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뭐가?”
“집에 들어갈 때마다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집, 연로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할머니,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
집이라는 장소는 몸과 마음에 휴식과 안정을 제공하는 장소였어야 했다.
과연, 윤기훈의 그 반지하 집은 휴식과 안정을 제공하는 장소였을까?
“저는, 학교도, 학원도, 독서실도 전부 엄마가 태워다 줬어요. 그래서 다른 거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면 됐었어요. 독서실에서 진짜 공부하기 싫을 때, 얼른 집에 가서 침대에 눕고 싶다. 그런 생각 했어요. 집에 가면, 내 방, 내 침대에 누워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
“내 주위에 친구들도 다 그랬으니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랬는데 오늘 그 학생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집에 가는 게 행복했을까?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
그래. 지연이는 이런 녀석이었지.
현명한 녀석, 사려 깊은 녀석.
이런 점이 좋다. 이런 지연이가 좋다.
나는 손을 들어 지연이의 머리를 가볍게 흩트렸다.
지연이는 갑자기 왜 그래요? 하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기특해서.”
“네?”
“기특하다고. 우리 지연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작게 웃어주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던 지연이도 작게 미소 지어준다.
***
토요일 아침, 나는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났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바로 일어나지 않고,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평소 같았으면, 빨딱 일어나서 재빨리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 서현 씨와 무엇을 하면서 주말을 알차게 보내야 잘했다고 칭찬받을지를 고민했을 텐데,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서현 씨 출장 가셨거든.
출장은 출장인데, 일반적인 그런 출장은 아니고,
골프 치러 가셨다.
중국으로.
이야기의 시작은 이러하다.
왜, 예전에 내가 제이슨 그 망할 새끼 때문에 병원에 입원했을 때, 서현 씨가 중국에 출장을 갔던 적이 있었잖아. 그때 중국 정부의 높은 분 때문에 일정이 딜레이 되어버렸었더랬고.
엄청 큰 프로젝트란다. 서현 씨가 대충 설명해줬는데, 나야 뭐 설명해줘도 모르지. 아무튼 엄청난 돈이 오가는 프로젝트가 진행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 중국의 높은 분들이 회장님을 초청했다는 거다.
‘공 한번 치시죠.’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프로젝트였고, 너무 높은 양반이었나보다.
뭐 높은 양반들 하시는 일이 그거지. 세부사항이야 밑에 실무진에서 다 알아서 하는 거고, 높은 분들은 골프나 치면서 맛있는 거 먹고, ‘그럼 잘해봅시다’하고 사인하는 거.
아무튼 어디더라? 쿤밍에 잭 니콜라우스가 직접 디자인한 초호화 골프장에서 공치기로 한 날이 오늘이었다.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우리 서현 씨는 왜 끌려갔냐면, 중국 높은 분 싸모님이 서현 씨를 꼭 데려오라고 백번 당부했다는 이야기.
표면상으로는 남자들끼리 재미없는 이야기할 동안 자기랑 놀아달라는 뭐, 그런 핑계를 댔는데, 실제는 그게 아니지. 며느리 삼아보겠다, 뭐 그런 속셈이겠지.
그리고 서현 씨도 골프 좀 친단다. 어렸을 때부터 오빠랑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았단다.
역시, 재벌 3세.
싱글 플레이어라고 하는데, 나는 골프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니, 그냥 어디 가서 어울릴 정도의 실력은 되는구나 생각할 뿐이다.
아무튼, 나와 동거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말에는 나하고 놀아준다고, 골프채는 본가 창고 깊숙한 곳에 봉인해 두었는데, 이번 중국 라운딩에는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사실, 내가 가라고 그랬다.
마음 같아서야 골프고 회사고 다 때려치우고 내 곁에만 있어!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면 서현 씨는 활짝 웃으며, 네! 하고 당장 사표를 쓸 것 같지만, 강 회장님도 뭐라고 안 하실 것 같지만….
서현 씨 앞길을 막아서는 안 되겠지. 나중에 크게 되실 분인데 말이야.
그리고 나중에, 혹시라도, 만에 하나, 내가 서현 씨와 잘 된다면 처가살이를 할 가능성이 있는데, 아니, 아주 높은데, 그렇다면 만일을 대비해 강씨 가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계산도 서 있었고.
아니, 다 헛소리고, 나 때문에 서현 씨의 행동이 제약받는 것이 싫다. 그게 가장 솔직한 이야기지.
아무튼, 회장님과 서현 씨는 전용기를 타고, 중국으로, 쿤밍으로 가셨다.
뭐, 아무튼 서현 씨가 없으니 주말에 할 일이 읎네. 뭐 하고 놀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다가, 일단 밥이나 먹자는 생각으로 방 밖으로 나왔다.
밥은 가사도우미분께서 차려주셨다.
원래 오늘은 가사도우미분께서 안 오시는 날이다.
일주일에 세 번,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오후에, 내가 학교에 가 있고, 서현 씨가 회사에 가 있는 동안 집안일을 도와주시는데, 오늘은 서현 씨가 밥 차려주라고 부탁이라도 하셨는지, 와 계시네.
나는 대충 라면 끓여 먹는 게 편한데. 괜히 나 때문에 여러 사람 고생하는구나 싶다.
아무튼, 감사한 마음으로 차려준 밥을 먹고, 가사도우미 선생님에게 저도 나갈 거니까 밥 안 차려주셔도 되고, 내일 안 오셔도 된다고 말씀과 함께 90도 직각 인사로 배웅해드린 다음 다시 침대에 누워 빈둥거렸다.
예전에는 혼자서도 잘 놀았는데, 게임하다가, 라면 하나 끓여 먹고 쳐 자다가, 심심하면 영화 보고, 아니면 친구 불러다가 술 마시러 가고.
아무 일정 없는 토요일에도 잘 놀았는데, 서현 씨하고 몇 달 같이 보냈다고, 서현 씨 없는 주말이 어색하다. 혼자 붕 떠 있는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친구 놈들 불러서 겜방이나 갈까? 오랜만에 인스턴트 먹으면서 8시간 달려볼까?
서현 씨가 없으니 타락하고 싶은 기분인데?
아니면….
지연이를 불러볼까? 같이 밥이나 먹자고 할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차에 ‘깨톡!’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누구일까? 누가 이 타이밍에 깨톡을 보낸 것일까?
나는 고개를 돌려 벽시계를 바라보았다.
서현 씨일까? 새벽에 출발한 서현 씨가 벌써 쿤밍에 도착했을까?
아니면, 지연이?
나는 이유 모를 긴장감을 안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서현 씨도, 지연이도 아니었다.
-혹시 통화 가능하십니까?
윤기훈이었다.
***
윤기훈의 깨톡을 확인하자마자 나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
“야. 다음부터는 그냥 전화해. 내가 무슨 회사 부장님도 아니고, 통화 가능하십니까가 뭐야.”
나는 퉁명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화기에서 주눅 든 윤기훈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아니, 이 자식은 또 왜 이딴 텐션이야. 내가 나쁜 놈 같잖아.
저번에 둘이서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으니 좀 바뀌었나 싶었는데, 이 자식, 아직도 사채업자 전화 받는 채무자 모드네.
“왜? 왜 전화한 건데?”
나도 좀 살갑게 ‘그래. 괜찮아. 무슨 일이니?’ 이렇게 말해주면 되는데, 그게 또 안 된다.
이게 다 무뚝뚝한 할아버지 탓이다. 내가 잘못하는 건 모두 다 할아버지 잘못이다.
-저기.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괜찮으세요?
“저녁? 왜?”
물론 저녁에 아무런 일정이 없다.
하지만 황금 같은 토요일 저녁 아니던가.
윤기훈, 저 녀석을 만나야 한다면 꼭 오늘일 필요는 없지.
-저기 다른 게 아니라, 저녁 식사를….
저녁? 너랑? 토요일 밤에? 내가? 왜?
내가 막 그렇게 쏟아부으려는 그 순간.
-할머니가 저녁을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할머니? 기훈이 할머니?
“할머니께서?”
-네. 잠시만요. 할머니 바꿔 드릴께요.
잠시 전화기 너머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미안해요. 학생. 갑자기 전화해서.
기훈이 할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아닙니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건강은 어떠세요?”
-학생 덕에 너무 잘 지내고 있어요. 아픈 데도 없고.
“다행입니다. 죄송해요.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아이고. 아니에요. 안 그래도 우리 기훈이 잘 돌봐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저번에는 선물도 들려 보내고.
선물? 무슨 선물? 내가 무슨 선물 드렸나?
-그때 보내준 사골로 곰탕을 좀 끓였는데, 괜찮으면 학생도 같이 한 끼 했으면 해서, 기훈이에게 전화를 하라고 했어요.
아. 그때 그 사골?
“아. 네. 곰탕. 네.”
-어떻게, 시간이 되겠어요?
할머니가 그렇게 물어보신다.
내 대답은?
“오늘 저녁 말씀이시죠? 네. 괜찮습니다.”
당연히 오케이다.
뭐, 뽀얗게 우려낸 사골 국물이 그리워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인지, 어른들 부탁은 거절을 못 하겠다.
그렇다고 억지로 가겠다는 것도 아닌 것이, 뭐랄까…. 생각해서 챙겨주시겠다는 할머니의 마음이 너무 고맙달까?
아무튼 사람의 탈을 쓰고, 이런 초대는 거절하는 거 아니지.
-학생 편한 시간에 아무 때나 괜찮아요.
“그럼 한 6시 정도 괜찮으세요?”
-6시. 알겠어요. 그때 맞춰 준비할께요. 미안해요. 괜히 바쁜데 귀찮게 하는 거 같아서.
“아니에요. 사골곰탕인데, 만사를 제쳐두고 가야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마워요.
“제가 감사하죠. 그럼 있다가 뵙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으려 하는데, 할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아. 학생. 그리고.
“네.”
-괜찮으면 그 아가씨도 꼭 데리고 와요.
할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