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 “남자끼리 생일 챙기냐?”
다행히도 기훈이 녀석은 머리를 박고 있지는 않았다.
나는 그 녀석을 데리고 근처 카페에 가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축 늘어져 있는 얼굴을 상상했는데, 밥은 잘 먹고 지내는지, 얼굴이 반들반들하니 좋아 보인다. 몸은 더 좋아진 것 같고.
자리에 앉은 나는 그 녀석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었다.
오늘 헬스장에서 월급을 받았단다.
창회가 이야기하기로는 헬스장 관장님이 기훈이 이 녀석을 마음에 들어 해서, 저녁에 카운터 보고, 정리도 좀 하면서 운동도 배우라고 했고, 근로기준법에 저촉되지 않을 만큼의 시급도 준다고 했다는데, 오늘이 바로 그 월급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받은 월급을 몽땅 상환하겠다고, 나에게 계좌번호를 물어온 것이다.
“얼마씩 상환할 계획이었는데?”
내가 그렇게 묻자 기훈이 녀석이 봉투 하나를 꺼내 슬그머니 올려놓는다.
나는 영세상인 삥 뜯어 먹는 골목 조폭처럼 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비용을 확인해보았다.
5만 원짜리가 16장, 만 원짜리가 2장 해서 82만 원이다.
“시급이 얼만데?”
나는 봉투를 내려놓고 그렇게 물었다.
기훈이는 시간당 9천 원을 받는다고 했다.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하루에 세 시간이니까 일당은 2만 7천 원. 토요일까지 주 6일 일하니까 일주일에 16만 2천 원. 한 달을 4주라고 치면 64만 8,000원.
근데 한 달이 약 4.3주 되니까 조금 더해서 대충 70만 원이라고 치고, 세금 3.3% 땐 것을 감안하면 70만 원이 조금 안 되어야 계산이 맞는데 82만 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관장님이 주휴수당이라는 것을 챙겨줬다는 이야기다.
그 관장님, 멋진 양반이네.
난 또 윤기훈 이 자식 어리버리하게 운동 가르쳐준다는 핑계로 착취당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최저시급도 아니고, 주휴수당까지 챙겨주시는 훌륭한 어른 밑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나도 모르게 흐뭇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내가 컨셉이 츤데레잖아.
“그래서? 이 돈을 전부 다 상환하겠다고? 앞으로도 매달?”
“…네.”
윤기훈이 그렇게 말한다.
참나. 답답한 녀석 같으니. 내가 뭐 돈 갚으라고 독촉했냐?
아니 애초에 대출 기간은 무이자로 10년이었다.
뭐, 안 받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이렇게 무리해서 갚을 필요는 없다. 아니, 내가 불편하다.
“야. 이 답답한 녀석아. 월급 받았으면 할머니 내복 사드릴 생각은 안 하고…”
“할머니하고 상의했어요.”
윤기훈이 그렇게 말한다.
“제가 지금 얼마 정도의 수입이 있고, 월세와 생활비를 제외하고 어느 정도 저축이 가능한지, 그런 부분에 대해서 할머니께 말씀을 드렸어요. 마음 같아서는 목돈을 만들어 한꺼번에 돌려 드리는 것이 가장 좋다는 생각도 들었는데,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갚아나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조금이나마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서 할머니하고 상의하고, 헬스장에서 받은 돈을 매달 드리려고….”
윤기훈이 그렇게 말한다.
나는 이 녀석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나에게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변했다고, 내가 알던 예전의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믿어봐 달라고, 지켜봐 달라고.
그렇게 나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하. 이 녀석. 이 기특한 녀석 같으니.
“야. 됐고. 그렇게 찔끔찔끔 줘버리면 그거 티도 안나. 나중에 한꺼번에 가져와. 5만 원짜리 말고 만 원짜리로. 사과 박스에 넣어서. 그리고 이거 지금 나 만난다고 돈 뽑아 온 거야?”
“…네.”
“답답한 녀석아. 돈을 주고받을 때는 기록을 남겨야 돼. 무조건 계좌로 주고받아야 하는 거야. 현찰로 주면? 내가 받아놓고서, 응? 아니? 난 받은 거 없는데? 그래 버리면 어쩔라고 이걸 현찰로 찾아와? 당장 가서 은행에 넣어놔. 쓰읍. 이거 큰일 날 녀석이네. 돈거래는 무조건 계좌로.”
“네? 네.”
“그리고 여윳돈 있으면 적금 들어. 적금 이율 적기는 하지만 인터넷 은행 잘 찾아보면 2% 이상 주는 데 있을 거야. 그런데 찾아서 적금 넣어. 혹시라도 누가 이율 더 많이 준다고 그러면서 막 복잡한 이야기 하면, 주식이랑 연계되어서 이율 막 엄청 준다고 그런 이야기 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바로 자리 피하고. 적금은 단순하게 연이율 얼마, 만기 시 얼마. 딱 이렇게 나오는 걸로. 알았어?”
“네.”
“주식 같은 거 관심 있어?”
“아니요?”
“코인은?”
“절대요.”
“그래. 그런 거 생각하지 마. 할 거면 나중에 해. 나중에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고, 월급 한 5백씩 받으면 그때 해. 지금은 절대 꿈도 꾸지 마.”
“네.”
이 자식 말 잘 듣는 구만. 이렇게 고분고분한 녀석이었던가?
“난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했네. 참나. 됐고, 이거나 가져가.”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내 가방 옆에 놓아두었던 쇼핑백을 건네주었다.
쇼핑백 안에는 지하철 타기 전, 근처 마트에서 사 온 사골 뼈가 들어있다.
“주말에 이거 할머니 고아드려. 할머니 시키지 말고, 네가 직접 해. 인터넷에 사골국물 우리는 법 다 나와 있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기훈이 녀석은 쇼핑백을 받으며 쑥스럽다는 듯 작게 웃는다.
짜식. 이제야 좀 고분고분하네. 역시, 선물은 현물이 최고지.
“그나저나, 요즘 창회 가끔 보냐?”
내가 윤기훈에게 물었다.
“네. 창회 형 특별한 일 없으면 밤마다 운동하러 오니까. 그때 얼굴 보고, 주말에 밥 먹기도 하고….”
윤기훈이 말한다.
“그 자식, 요즘 뭐 특별히 이상한 모습 없어?”
“네?”
“아니. 뭐. 평상시와 다른 그런 모습이랄까.”
나는 그렇게 말했다.
효율로만 따지만 단도직입적으로 ‘김창회 그놈, 혹시 여자 생겼냐?’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는 게 가장 좋은데 그럴 수가 없다.
왜냐고?
윤기훈, 이 녀석을 믿을 수 없다.
우리 친구들 중에서 이 자식이 가장 따르는 사람이 바로 김창회다.
뭐 가장 어렵고 혼란한 시기에 김창회가 가장 가까이 있어서 그런 것이겠지.
그런 이 녀석에게 직접적으로 정보를 캐낸다? 바로 김창회 귀에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딱히…. 평상시와 똑같은 것 같은데요.”
윤기훈이 그렇게 말한다.
나는 기훈이 녀석의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눈동자를 통해 참과 거짓을 알아낼 줄 아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윤기훈이 거짓말을 한다면 아주 작은 단서라도 얻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 사실 신력을 쓰면 금방 알 수 있지. 물어볼 것도 없다. 그냥 읽어내면 되는 거 아닌가. 말 그대로 마인드 리딩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지. 고작 김창회 여자 친구 유무 여부를 알아내겠다고 신력을 쓴다?
할아버지에게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다.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윤기훈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렇게 말한다.
그렇지. 범죄가 있는 곳에 흔적이 없을 수가 없다.
예전에 경찰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그런 대사를 들었던 적이 있었다. 형사는 발로 수사를 한다고. 얼마나 많이 뛰어다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났느냐가 중요하다고.
저번에 승환이도 그랬잖아. 그 자식 수업도 안 듣고, 박찬희와 최유라의 스캔들 실체를 파악하겠다고 최유라 친구들을 만나고 다녔더랬지.
나도 하나 건졌다.
“얼마 전에?”
“창회 형이 전화 통화하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그래. 무슨 통화였는데?”
“자기는 파티 같은 거 필요 없다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응? 파티?”
“다음 주에 창회 형 생일이라고 그래서 가족들끼리 생일파티 같은 걸 하려나 본데, 창회 형은 필요 없다고 그런 이야기 했었어요.”
“생일? 생일파티?”
“네.”
김이 팍 샌다.
“다음 주에 창회 형 생일이에요?”
윤기훈이 묻는다.
“몰라.”
“네?”
“너는 너 친구 생일 아냐?”
“네? 아니요.”
“남자끼리 생일 챙기냐?”
“아니요.”
“생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치고, 친구에게 줄 생일 선물은?”
“…생일빵.”
“김창회 생일빵 때릴 수 있겠냐?”
“…아니요.”
“우리가 창회 생일 알아야 하냐?”
“아니요.”
안 되겠어. 윤기훈 이 자식은 글러 먹었어. 정보원으로서의 한 줌의 가치도 없어.
에휴.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
“생일?”
이중훈이 그렇게 되묻는다.
“어. 다음 주에 그 자식 생일이 있나 봐.”
“그런데?”
박승환이 다시 묻는다.
김창회 없는 김창회 사문위원회 2차 사전 회의, 모두의 시선이 날 향해 있다.
“그렇다고.”
내가 말했다.
“그럼 깜짝 파티 같은 거 준비해야겠네요.”
사문위원 중 하나로 초빙받은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나에게 집중되어 있던 시선이 지연이에게로 향한다.
“네? 제가 뭔가 잘못 말했나요?”
지연이가 그렇게 묻는다.
이중훈이 차분한 목소리로 지연이에게 설명해준다.
“한수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정리하면, 정보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다음 주에 김창회 생일이 있다는 그런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정보를, 아니, 쓰레기를 하나 주웠다. 쓰레기를 주웠지만,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이렇게 노력을 했으니, 니들이 내 노력을 알아주고 칭찬해줘라. 그 이야기지.”
지연이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맞아요?’ 그렇게 묻고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중훈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우리가 창회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은 생일빵 뿐이야. 그게 남자들의 생일 선물이지. 하지만, 슬프게도 그 녀석에게 생일빵이라는 선물을 줄 수가 없어. 현실적으로 어렵지. 무슨 말인지 이해해?”
“아니요.”
“김창회의 생일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유지연 위원.”
박승환이 그렇게 못을 박았다.
지연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를 끄덕이고 있지만, 그 눈은 전혀 이해했다는 눈이 아니다.
역시, 우리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
“아무튼, 김창회 그 자식이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증거를 얼른 찾아야 사문위원회를 열든, 혁명위원회를 열든, 인민재판을 개최하든 할 텐데.”
이중훈이 심각한 얼굴로 그렇게 말한다.
“진짜 제대로 본 것 맞아? 김창회가 여자랑 같이 있는 거 맞아? 그냥 우연히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던 것 아냐?”
박찬희가 그렇게 물어본다.
“나 혼자 봤다면 환각이라고 의심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자리에 한수도 있었지.”
이중훈이 말했다.
“환각이라기에는 너무도 생생했지.”
내 말에 다시 침묵이 흐른다.
침묵을 깬 것은 박승환이었다.
“일단 하나씩 정리해보자. 김창회가 토요일 오후에 여자를 대동하고 학교에 나타난 것은 팩트.”
“팩트.”
이중훈이 말한다.
“문제는 그다음에 추가적인 단서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부분이지. 누구 김창회가 여자랑 같이 있는 거 본 사람?”
손을 드는 사람이 없다.
“여자랑 같이 있다는 걸 들은 사람?”
역시 아무도 없고.
“꼭 여자가 아니더라도 김창회의 수상쩍은 모습을 포착한 사람.”
내가 손을 들었다.
“목요일 아침, 그 자식이 학생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었어.”
“닭가슴살?”
“아니. 학생 식당 아침 백반.”
“목요일? 목요일이면 아침에 비 억수로 오던 그 날이지? 그날 아침에 학생 식당 메뉴가 뭐였는데? 프로틴국이라도 나왔어?”
“김치 콩나물국.”
“김창회가 국물을 먹었다고? 이건 기록해둬야겠네.”
박승환이 그렇게 말하며 야생동물의 특이한 습성을 발견한 동물학자처럼 무언가를 끄덕인다.
그렇게 한 줄의 특이사항이 추가되었지만, 목요일 아침을 제외하고는 김창회는 평소와 다름이 없다는 것으로 판명이 났다.
언제나처럼 수업 듣고, 공강 시간에는 과방에서 닭가슴살이나 처먹거나 덤벨을 들고 있거나, 학교 끝나면 체육관 가서 또 운동하고, 기훈이 이야기에 따르면 집에 가서도 운동하는 것 외에는 특별히 수상쩍은 모습은 보이질 않고 있다.
“저기, 혹시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을 꺼냈고, 우리 모두의 시선이 지연이에게로 향한다.
“혹시, 창회 오빠 여동생 아닐까요? 그 여자분?”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