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 천금매소(千金買笑)
밖에 나가서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었지만, 그렇다고 지옥의 목요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 남은 수업을 듣고, 알바를 위해 카페로 가야만 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힘든 저녁을 보내야 했다.
오늘의 진상도(度)는 약 60% 되겠습니다.
엄마 진상 연합에서 정모라도 왔는지, 유독 엄마들이 사람을 힘들게 했다.
이해한다. 엄마도 커피 드시고 싶겠지. 맨날 집에서 육아만 하시다 보니 힘들고 답답하셨겠지.
하지만 기저귀는 화장실에서 갈아주시면 안 될까요? 여자 화장실에 기저귀 교환대도 있는데?
아니, 그리고 애가 뛰다가 다른 손님 커피를 엎었으면 사과를 하셔야죠오. 자기 애 화상 입을 뻔했다고 소리를 지르면 어쩌란 말입니까? 피해 손님이 경찰 부른다는 거 겨우 달래느라 진땀을 뺐네.
그래. 그렇다고 치자. 뭐, 처음 겪는 일도 아니니.
하지만 ‘울 애기 자고 있으니 음악 꺼주세요’는 처음이었다.
참신하기는 한데, 참신한 것과는 별개로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저도 집에 가면 귀한 아들이란 말입니다!
아니, 난 엄마 없지.
귀한 손자란 말입니다!
…귀한 손자일까?
“나중에 내가 카페를 차리면 앞에다가 커다랗게 노키즈존, 노어르신존, 노미성년자존, 노공부족존이라고 써놓을 거야.”
같이 알바 하는 병진이 형이 인상을 쓰면서 그렇게 중얼거린다.
“…금방 망하겠네요.”
망한다. 백 퍼센트 망한다. 손님하고 싸우려 들면 절대로 망하지.
“그만둘까? 한수야. 우리 같이 그만둬버릴까?”
병진이 형이 날 보며 그렇게 묻는다.
그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다. 솔직히 오늘 아침에도 했었지.
내가 알바비 궁해서 이거 하는 거 아니잖아? 솔직히 돈 걱정 안 해도 되잖아? 내 뒤에 중앙그룹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는데?
하지만 그래서 더 못 그만두겠다.
왜냐고?
뽀대가 안 나잖아.
예를 들어 로또 1등에 당첨되었다 쳐보자.
바로 삼각별로 자동차 바꾸고, 명품관 가서 명품 둘둘 감으면 사람들이 멋있다고 할 것 같아?
부럽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멋있다는 이야기는 못 들을 거다.
로또 1등이 되어도! 통장에 수십억이 꽂혀도! 그래도 평소처럼 출근하고, 일 열심히 하고, 그런 게 멋짐이 폭발한다는 거지.
그런 기조로 나는 카페 알바를 계속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오늘처럼 ‘울 애기 자니까 음악 꺼주세요’ 같은 어이없는 말을 계속 듣게 된다면, 그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내가 금전적인 부분에서 크게 아쉬운 것도 없는데, 당장 때려쳐 버릴까 하는 생각이 솔직히 안 드는 것도 아니다.
“그만둘 거야?”
병진이 형 뒤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목소리.
길에서 마주치면 본능적으로 바라보고, 지나치면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 돌아볼 정도로 예쁜 점장 누나. 특유의 생글생글 미소가 진짜 예뻐서, 그 미소 덕분에 인근 경쟁 카페보다 2배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점장 누나가 슬픈 눈으로 병진이 형을 바라보고 있다.
“우리 병진이, 날 혼자 두고 가 버릴 거야?”
점장 누나가 슬픈 눈으로 그렇게 말한다.
“아니오오!”
병진이 형의 격렬한 반응.
“저는 죽을 때까지 누나와 함께 할 거예요!”
글렀어. 이 인간은 글러 먹었어.
점장 누나 말이라면 C4 컴포지션A를 등에 메고 불 속으로 뛰어들고도 남을 사람이야.
아니지. C4는 불붙어도 타지, 터지지는 않으니까 숨결만 닫아도 터지는 삼아이오딘회질소가 좋겠네.
“한수는? 한수는 그만둘 거야?”
저는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데용?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졸업한 선배들이 그랬다. 평생 다닐 것처럼 일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내일 그만둘 것처럼 준비하라고.
“저는….”
그때 타이밍 맞춰 손님 들어오는 소리.
“아. 손님 오셨네요.”
나는 재빨리 카운터로 도망쳤다.
“어서 오세…요?”
날 위기에서 구해준 손님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우리 과 후배들이었다.
그냥 후배도 아니고, 지연이와 며칠 전 만났던 박민주였다.
“어? 한수 오빠. 안녕하세요? 여기서 알바 하세요?”
날 보고 놀란 민주가 그렇게 인사한다.
반면에 내가 여기서 알바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지연이는 싱글생글 웃고 있다.
“어. 민주구나. 안녕….”
그렇게 인사를 하고 뒤를 힐끗 보니 점장 누나가 날 바라보고 있다.
“…하세요.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존댓말로 바꿨다.
아는 사람이고 모르는 사람이고 상관없이 손님에게는 경어를 사용하는 것이 점장 누나의 원칙이니까.
지연이는 여전히 싱글생글 웃고 있고, 민주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얼굴이고. 그런 상황에서 나는 주문을 받았다.
딱 보니 알겠다. 지연이가 데리고 온 거네.
***
“…아는 사람이야?”
주문을 받고, 두 녀석들이 카운터에서 멀어지자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병진이 형이 그렇게 물어본다.
“네. 학교 후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병진이 형이 눈치도 없이 우리 사랑하는 후배들이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본다.
그 더러운 눈으로 우리 후배들을 바라보지 말란 말이다! 그렇게 소리치면서 두 손가락으로 병진이 형 눈을 콕 하고 질러주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고.
“형. 아아메 디카페 레귤러. 허니 레몬티. 준비해 주세요.”
내가 그렇게 형의 등을 밀었다.
이 인간은 음료 만들러 가면서도 우리 두 후배에게 눈을 떼지 못하네.
뭐, 이해한다. 워낙 예뻐야지.
하지만 아무리 예뻐도, 점장 누나가 바로 옆에 있는데, 저렇게 다른 여자를 바라봐도 되는 거야? 이 양반 아직 멀었네.
아니, 사실 점장 누나도 평소답지 않게 우리 후배들을 바라보고 있다.
“과 후배?”
점장 누나가 물어본다.
“네.”
“친해?”
“네.”
“둘 다 예쁘네. 어느 쪽?”
“네?”
이상한 질문을 던진 점장 누나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우리 한수와 썸 타는 후배는 어느 쪽 후배분?”
그렇게 말한다.
아니. 지금 이 언니가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야?
“설마…. 양쪽 다?”
“아니에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진짜로?”
“네. 진짜로 그냥 후배예요.”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점장 누나의 여전히 장난기 가득한 눈은 날 바라보고 있다.
“우리 한수는 여자 눈에 눈물 흐르게 하는 그런 남자 아니죠? 그렇죠?”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린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 그런 사람 아니란 말입니다!
***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쟁반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사실 여기가 음료 가져다주는 매장은 아닌데, 점장 누나가 한가한 시간이니까, 직접 가져다주라고 해서 내가 이렇게 쟁반을 들고 온 거다.
허니 레몬티는 지연이 꺼, 디카페인 아메리카노는 민주 앞에. 그리고 그 가운데에 생딸기가 올라간 초콜릿 케이크를.
“이건 서비스.”
내가 주는 건 아니다. 점장 누나가 주라고 한 거다.
뭐 점장 누나가 주라고 안 했어도 내가 케이크 하나는 사 줄라고 했는데. 뭐, 덕분에 돈 굳었지.
“고맙습니다.”
민주가 그렇게 말하며 작게 고개를 숙인다.
지연이는?
그저 예쁘게 웃어 준다.
옛날 주나라 유왕의 총희(寵姬)였던 포사(褒?)는 비단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에만 웃었다고 한다. 그래서 왕은 그 애첩의 웃음을 보기 위해 온 나라의 비단을 징수해 포사 앞에서 찢어버렸다지.
덕분에 나라 살림이 거덜 나고, 나라 망하고.
천금매소(千金買笑)란 고사성어의 기원이다.
지연이의 미소를 보고 있으니, 유왕의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어쩐 일이야?”
물론 나는 그런 마음은 드러내지 않은 채, 평소와 같은 말투로 물었다.
“차 마시려고요.”
지연이가 말한다.
“차 마시겠다고 여기까지 오셨다?”
“네. 여기 허니 레몬차 맛있거든요, 케이크도.”
지연이가 그렇게 능숙하게 받아넘긴다.
무서운 녀석. 벌써 이렇게 커버렸다니.
잠긴 사물함 앞에서 어쩔 줄 몰라 발 동동 구르던 지연이가 그립다.
“그래. 이야기 나누고,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비싼 거 아니라면 사 줄께.”
“비싸다는 기준이 얼만데요?”
“5천 원 미만.”
“있어요? 5천 원 미만이?”
“아메리카노.”
내 말에 지연이가 입술을 삐죽 내민다.
“민주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편히 쉬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점장 누나는 한가하니 같이 놀아줘도 괜찮다고 했는데, 나는 어쩐지 두 사람이 무언가 할 이야기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
혹시라도 지연이가 내 알바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아니, 정확히는 걱정 반, 기대 반 하고 있었는데, 지연이와 민주는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서는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먼저 일어섰다.
그렇게 두 사람을 보내고, 병진이 형이 점장 누나에게 휘둘리는 모습을 감상하면서 마감을 하고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걸어가고 있었다.
지하철 입구를 50여 미터 남긴 시점에 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폰이 울렸다.
깨톡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으로부터 온 깨톡이었다.
-늦은 밤에 죄송합니다. 혹시 통화 괜찮으세요?
윤기훈이 보낸 깨톡이었다.
윤기훈, 참으로 요상한 인연으로 엮인 녀석.
처음에는 신림동 집단 폭행 사건의 공범이었던 녀석이, 어찌어찌하다 보니 김창회의 의동생이 되어 있었다.
이 자식이 어쩐 일이지?
김창회는 무슨 피를 나눈 형제처럼 따르면서, 나에게는 데면데면하게 구는 이 자식이 어쩐 일로 깨톡을 보냈디야?
설마 모라토리엄(Moratorium) 선언?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 같은 개소리를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나는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렇게 바로 전화가 올 줄 몰랐던 것일까?
“왜? 무슨 일인데?”
설마 배 째라는 것은 아니겠지? 배 째 달라면 째 준다. 기필코 째 준다.
-네. 그게. 저기 다른 게 아니고….
뭐야. 불안하게 이 자식 왜 이래?
-저기…. 계좌번호 좀 알려주세요.
“내 계좌번호? 계좌번호는 왜?”
-돈… 드리려고요.
녀석이 주저하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데,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내가 윤기훈이 이 녀석에게 주기적으로 상납받는 줄 알겠네.
“지금 어딘데?”
-지금 체육관인데요.
“유도장?”
-아니요. 헬스장.
들었던 것 같다.
윤기훈 이 미친놈이 새벽에는 우유배달하고, 배달 없는 날에는 유도장 가고, 승환이 아버님 회사 가서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헬스장 가서 알바한다고 그랬었지? 주말에는 편돌이하고.
“헬스장이 어딘데? 면목동?”
-네.
“면목역? 사가정역?”
-사가정역 쪽이요.
“언제 끝나는데?”
-거의 끝났어요.
“그럼 잠깐 얼굴이나 보자. 사가정역 가서 전화하면 될까?”
-네? 네.
“몇 번 출구?”
-2번입니다.
“알았어. 가서 전화할게. 사가정역 2번 출구 앞에서 머리 박고 기다리고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 자식, 오랜만에 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