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 풍어(?漁)
“네 이놈! 당장 이실직고하지 못하겠느냐!”
이중훈의 고함이 터져 나온다.
결국 이렇게 되어 버리는구나.
사문위원회(査問委員會)니 뭐니, 시작을 그렇게 했지만, 결국에는 또 사또 나으리가 등장하시고야 만다.
“아니. 잠깐만! 잠깐만! 지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데! 일단 이것 좀 풀고 이야기하자. 이것 좀 풀고!”
오늘의 죄인 박찬희가 의자에 묶인 상태에서 그렇게 항변한다.
묶였다고는 해도, 실제로는 과방에 굴러다니던 노끈 같은 걸로 대충 묶는 척만 해놓은 것이기 때문에, 적당히 몸만 두어 번 꾸물꾸물거리면 바로 풀려 버리는데, 박찬희 저 자식은 진짜 온몸이 꽁꽁 묶인 것처럼 연기를 하고 있다.
“어허! 이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증좌가 확실하거늘!”
이중훈이 그렇게 소리치자, 어김없이 박승환이 등장한다.
“죄인 박찬희는 단체의 단결심을 고취시키고, 이를 통해 면학 분위기를 개선해, 새로운 동량으로 성장하자고 다짐하는 시간인 축제 동안 음심을 품고 흉계를 꾸몄다는 고변이 있었사옵나이다. 일단 주리를 틀어 죄인이 허튼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사또 나으리.”
“이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세 치 혀로 교묘하게 빠져나가려고 하느냐!
분명히 말을 맞추지는 않았을 거다. 귀찮아서 미리 대본을 쓰고 했을 놈들은 아니다.
그런데도 막상 판이 깔리니 아주 죽이 척척 맞는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사에서 아주 사소한 오류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사또, 지방관리를 의미하는 사도(使道)의 된소리 버전인 사또는 정3품 당상관 이상을 부르는 호칭이고, 안전(案前)은 정3품 당하관 호칭이다.
박승환이 사또 나으리라고 했으니, 이중훈은 안전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거다.
이 자식들, 사극에서 고증이 얼마나 중요한데. 역덕들이 분노하면 드라마 엎어지는 건 순식간이야.
아무튼, 뭐,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나는 일단 메소드 연기에 심취해 있는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괜히 그런 이야기를 했다가는 분위기를 깼다고 욕먹을 테니까. 또 재미있기도 하고, 매번 죄인의 입장에서 찬희 자리에 꿇려 있다가, 이렇게 향리의 자격으로 심문하는 것을 보니, 이것도 나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 아니면 뭐든 오케이.
“억울하오! 무엇을 고하란 말씀이오!”
박찬희가 그렇게 외친다.
확실하네. 즐기고 있네. 저 자식.
“얼마나 되었느냐!”
이중훈이 물어본다.
“…2주 되었나이다.”
박찬희가 씹어 삼키듯 말한다.
찬희 연기가 나쁘지 않네?
이 자식아. 한국대가 아니라 한국예대를 가지 그랬냐.
“벌써 보름이나 되었단 말이더냐!”
“그러하오.”
“네 이놈! 감히, 혼약도 맺지 않은 사이에 보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고하거라!”
이중훈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탁하고 내리치며 말한다.
저걸 현대어로 해석하면 ‘어디까지 갔는데?’가 된다.
야.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지금 지연이도 옆에 있는데.
그랬다. 지금 내 옆에는 지연이가 서 있다.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말로만 들었던 사또 나으리의 친정을 1열에서 관람 중이시다.
초롱초롱 빛나는 눈으로.
그런 지연이를 보고 있자니, 우리가 지연이에게 나쁜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드네.
“무. 무엇을 고하란 말이오.”
“안 되겠구나. 이놈!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저놈 같으니. 당장 주리를 틀도록 하여라!”
이중훈이 그렇게 전근대적인 수사기법을 동원할 것을 지시하자, 한쪽에 서 있던 김창회가 앞으로 나선다.
그런 김창회를 보면서 나와 이중훈, 박승환은 재빨리 눈빛을 교환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힘과 근육뿐인 김창회가 박찬희에게 고통을 가한다. 박찬희는 앙심을 품을 것이고, 다음 목표인 김창회를 공략할 때, 선두에 설 것이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 후후후.
주리틀기의 정식 명칭은 전도주뢰(剪刀周牢)이다.
초창기 주뢰의 형태는 가운데에 나무토막을 세워두고 노끈으로 묶어 놓은 다리를 좌우에서 잡아당겨 다리를 부러트리는 형태의 형벌이었는데, 조선의 고문 기술자들은 어떻게 하면 죄인에게 더욱 큰 고통을 줄 수 있을까를 연구하다, 줄을 사용하는 대신, 두 다리 사이에 나무를 껴서 비틀어 정강이에 엄청난 고통을 가하는 버전 업을 이루어 낸다.
이를 교목주뢰(交木周牢), 또는 가위처럼 양쪽으로 벌어지는 모양이 가위가 같다고 해서 전도주뢰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이게 우리가 흔히 사극에서 보는 주리가 바로 이 전도주뢰이다.
물론 마음 같아서야, 박찬희 다리 사이에 굵은 까시나무 기둥을 끼워놓고 힘차게 으쌰 하고 땡기고 싶었지만, 현대 사회에서 그럴 수야 있나.
그냥 김창회가 가진 그 엄청난 악력으로 흔히 허벅지 앞쪽 근육이라고 불리는 대퇴사두근에 기분 좋은 마사지를 해주는 그런 정도지만.
내가 지수 사귈 때 당해봐서 아는데, 김창회 표 마사지 진짜 좋다. 너무 좋아 진실이 줄줄 흘러나올 정도로 끝내주게 좋다. 진실뿐이더냐, 온몸의 땀샘에서 식은땀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신세계도 경험할 수 있지.
아무튼 그렇게 창회가 양손을 풀면서 다가가는데! 그 순간!
과방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들어온다.
“응? 여기 다 모여 있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바로 박찬희의 여자 친구로 의심되는 최유라.
우리의 시선은 박승환에게 모였다.
박승환이 그랬거든. 최유라 집에 갔다고. 분명히 학교 밖으로 나갔다고.
우리가 그래서 안심하고 박찬희 저 녀석을 잡아 온 건데, 갑자기 최유라가 등장해 버린 거다.
박승환은 ‘진짜야! 맹세코!’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뭐 하고 있어? 지금?”
최유라가 의자에 묶여 있는, 아니 묶여 있는 척을 하고 있는 박찬희를 바라보며 묻는다.
찬희를 바라보는 유라의 시선은 남자친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다.
‘또 무슨 사고 쳤는데?’하고 바라보는 초등학교 선생님의 시선이다.
“마침 잘 되었도다.”
분위기 파악 못 한 이중훈이 그런 최유라를 보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한다.
“최유라, 너도 당장 죄인 옆에….”
“나중에.”
최유라가 이중훈의 말을 끊는다.
“응?”
“나중에 어울려줄게. 나 바로 도서관 가야 하거든.”
“어? 응. 그. 그래.”
이중훈이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역시 최유라. 마음속에 상남자를 품고 있는 최유라.
상남자 최유라의 시선이 박찬희를 향한다.
“오래 걸려?”
“어? 아. 아니. 그리 오래는….”
박찬희가 언제 묶였었냐는 듯 몸을 움직여 손쉽게 노끈을 풀어내며 그렇게 얼버무린다.
그 모습에서 분리수거 대충하다 걸려 혼나는 남편의 모습이 떠오른다.
“알았어. 나 도서관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깨톡 해,”
그렇게 말한 유라의 시선이 내 옆에 서 있는 지연이에게로 향한다.
“지연아.”
“넵. 언니.”
지연이가 부동자세로 대답한다.
“오빠들이랑 노는 거 재미있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너무 깊게 엮이지는 마.”
“넵. 언니.”
“그리고 니들도 지연이에게 나쁜 물 들이지 말고.”
유라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한다. 특히 박승환에게 시선이 잠시 머문다.
“넵.”
우리의 빠른 대답.
“그럼 먼저 간다. 적당히 해. 너무 아프게는 하지 말고. 적당히.”
유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과방에서 자기 물건을 챙겨서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유라가 나가자 찬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나는 그런 찬희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최유라의 난입으로 사또 마당놀이는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김이 새버렸다는 핑계로 그만하자는 합의를 이끌어냈고, 우리는 각자의 길로 향했다.
아니, 향하는 척했다.
그렇게 김창회를 체육관으로 보내버리고, 우리는 다시 과방에 모여 있었다.
“진짜야?”
박찬희가 놀란 눈으로 그렇게 되묻는다.
“그래. 진짜로! 우리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니까.”
이중훈이 그렇게 말하자, 찬희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여 긍정을 표시해 주었다.
실제로 진짜였으니까.
“그러니까, 김창회 그 자식이 토요일에, 우리가 아무도 학교에 안 나오는 그 틈을 이용해 감히 신성한 캠퍼스에 여자를 데려왔더란 말이지? 그래 놓고서, 오늘 자기는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 뻔뻔하게 주리를 틀려고 했고?”
박찬희가 진짜 열 받았다는 듯, 그렇게 분노를 쏟아냈다.
“사실, 우리의 목표는 네가 아니었어.”
박승환이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을 시작한다.
“우리는, 아니,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너와 유라를 응원하고 있다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난 평소부터 두 사람이 참 잘 어울린다고, 둘이 제대로 잘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잘 되었다. 기쁘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물론 그래도 친구인 우리에게는 이야기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섭섭함도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두 사람을 축복하고 있어. 이건 솔직한 심정이야.”
박승환은 분명 죽어서 지옥에 갈 거다. 지옥에 가서 분명 악마들을 등쳐먹으며 잘 먹고 잘살 거다.
“나도.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
이중훈이 옆에서 말한다.
찬희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나도 재빨리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창회는 다르지. 창회가 여자를 사귀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만날 수 있지. 사귈 수 있고. 하지만 아직 일러. 우리 친구 창회는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어. 연애라는 건 단순한 이성 간의 만남이 아니야. 서로의 영혼을 공유하는 고차원의 심적 교류라고. 우리가 창회에게 알아서 하라고 방치하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장전된 총을 가지고 놀라고 주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 상처가 남을 거야. 창회에게도,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박승환의 진지한 개소리가 계속 이어진다.
“너무나도 큰 상처가.”
이중훈이 옆에서 추임새를 붙인다.
“치유할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는 그런 큰 상처가.”
나도 그렇게 살짝.
찬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승환이가 찬희에게 작게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이번에 있었던 일은 일종의 명분 쌓기라고 할 수 있지. 친구들 몰래 나쁜 짓을 하면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 명분 쌓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네가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고?
그건 나지. 너는 임마 험한 꼴을 주도하고 있었지!
“미리 이야기해 줘도 됐었잖아.”
찬희가 투덜거린다.
“어쩔 수 없었어. 적군을 속이려면 아군부터 속여야 했으니까.”
이중훈이 옆에서 말을 보탠다.
“선배들이 찬희 선배에게 엄청 미안해했어요.”
지연이도 그렇게 지원 사격을 한다.
유라야. 미안하다. 지연이는 이미 깊게 물들어 버렸단다.
“…어쩔 수 없지. 이해는 한다. 작전에 있어서 보안은 생명이니까.”
찬희가 그렇게 수긍한다.
으이구. 이 멍청아.
“아무튼 찬희, 너의 희생 덕분에, 일단 명분은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명분은 등산으로 치면 고작 산 초입에 들어선 것에 불과해. 실제로 정상이 이르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박승환이 다시 사기 스킬을 시전한다. 저놈의 스킬은 쿨타임도 없다.
“우리가 올라야 하는 정상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창회야. 개나 소나 다 올라가는 에베레스트나, 겸사겸사 올라가는 로체가 아니야. K2. K2도 그냥 K2가 아니라 K2의 북벽. 등정은커녕 도전조차 허용하지 않은 K2 노쓰페이스.”
최고의 서폿! 이중훈!
아주 죽이 척척 맞는다.
그리고 어김없이 거기에 걸려드는 박찬희.
“…그래서, 안 할 거야?”
“응?”
“안 할 거냐고? 뭐 에베레스트는 예전부터 막 올라갈 수 있었나? 오르고 또 오르니까 오르게 된 것 아냐? K2 북벽 사면이라고 해서, 그 누구도 오르지 못했다고 해서, 그래서, 안 할 거야? 못한다고 포기할 거야?”
박찬희가 결의에 찬 눈으로 그렇게 말한다.
“…앞장 서주겠는가? 친구.”
대악마 박승환이 도발 스킬을 연속기로 시전한다.
보기에는 응원 버프 같지만 실제로는 저주다. 도트 데미지가 들어가는 저주다.
“내가 선두에 서겠어.”
박찬희가 주먹을 꽉 쥐면서 그렇게 말한다.
“…고맙다.”
감격한 얼굴의 이중훈이 찬희에게 손을 내밀자, 찬희가 그 손을 꽉 잡는다.
그렇게 악수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소리쳤다.
월척이구나! 풍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