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 기이(奇異)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발간하는 옥스퍼드 한국어 사전에서는 ‘기이하다’라는 형용사를 한자 풀이 그대로 ‘기묘하고 이상하다’라고 설명한다.
지금이 딱 그 상황이었다.
기묘하고 이상한 상황.
바로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냐 하면, 학교에서 버스로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 위치한 중국집이다.
어떤 중국집이냐 하면, 작년에 내가 지수랑 사귈 때, 그 녀석하고 산책 데이트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그런 중국집이다.
내가 왜 공강 시간에 버스까지 타고 여기를 찾아왔냐 하면, 점심밥을 먹기 위해서다.
여기 잡채밥이 예술이거든. 진짜 내가 스물한 해를 사는 동안 여기만큼 맛있는 잡채밥이 나오는 곳을 본 적이 없다.
물론 단순히 잡채밥을 먹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일종의 사전답사라는 목적도 있었다.
오늘 오전에 점심을 뭘 먹을까 그런 고민을 하다가 여기 잡채밥 생각이 났고, 마침 여기 굴짬뽕이 맛있었다는 생각도 떠올렸다.
굴짬뽕, 하나도 맵지 않은 굴짬뽕이라면 매운 것을 못 드시는 우리 서현 씨도 맛있게 드시지 않겠는가 하는 착한 생각이 들었고, 나중에 모시고 오려면 사전답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일부러 찾아온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 내 앞에는 원래 먹으려고 했던 잡채밥 대신 하얀 국물의 굴짬뽕이 놓여 있다.
단지 그뿐이라면 기이하다는 말을 할 필요도 없겠지.
내 앞에 놓인 짬뽕 그릇 뒤로 박찬희가 앉아 있다. 그 옆에는 최유라 있고.
어떻게 된 상황이냐 하면, 내가 짬뽕을 막 한 젓가락 뜨려는 그 순간에, 저 두 사람이 식당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나를 발견한 저 두 녀석들도 놀랬지만, 나도 놀랐다.
이 식당에서 아는 사람을, 더군다나 저 두 녀석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나를 발견한 두 녀석은 자연스럽게 내 맞은편에 슬그머니 앉아버렸다.
뭐 당연한 이야기다.
어? 한수네? 여기는 어쩐 일이야? 몰래 데이트 겸해서 밥 먹으러 왔는데 딱 걸려버렸네. 뭐 어쩔 수 없지. 합석하고 싶지만, 우리는 데이트를 해야 하니까, 너하고 다른 테이블에 앉아도 되겠지?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을 테니.
설사 찬희가 그렇게 말하려 한다 해도 최유라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다.
최유라 안에는 상남자가 한 명 들어서 있으니까.
“굴짬뽕이네?”
유라가 내 앞에 그릇을 보면서 그렇게 묻는다.
이 녀석 화장도 했네?
아니. 원래 화장을 하기는 하지. 그런데 평소보다 더 공들인 느낌이랄까?
“어. 굴짬뽕.”
나는 그렇게 말하며 찬희를 슬쩍 바라보았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너는 착하게 살아라. 나쁜 짓 하면 얼굴에 바로 드러나니까.
유라가 나를 따라 굴짬뽕을, 찬희는 간짜장을 주문한 후 테이블에서 짧은 침묵이 흐른다.
내가 이 녀석들과 친구라는 관계를 맺은 이후, 이런 침묵은 처음이었다.
일단 침묵을 깨기 위해 내가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여긴 어떻게 알았어?”
실제로 그게 궁금했다. 나만의 보물 같은 이 중국집을 어떻게 알았는지.
“멍청아. 니가 알려줬잖아.”
찬희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말한다.
“내가?”
“어. 니가.”
내가? 내가 여길 소개해줬다고?
“작년 기말 끝나고 여기서 술 먹었잖아.”
찬희가 그렇게 말한다.
작년 기말?
…기억났다.
작년 겨울, 그러니까 내가 아직 지수랑 사귀고 있을 때, 기말고사 끝난 기념으로 중화요리에 고량주 먹자고 친구 놈들을 여기로 데려왔었더랬다.
그날 어떻게 집에 갔는지 기억 안 날 정도로 꽐라가 되었었더랬지.
밤새도록 토한 기억이 하도 강렬해서 그 녀석들을 여기 데려왔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네. 그랬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내가 말했다.
“그래. 지가 소개해놓고, 지가 까먹었구만.”
“그런데, 갑자기 여기는 어쩐 일로?”
“우리는 자주 왔었어.”
대답한 것은 유라였다.
“응?”
“그날 니가 알려준 이후, 중국요리 먹고 싶으면 여기 와서 먹었어.”
그런 찬희의 말을 반증이라도 하듯, 사장님이 이거라도 먹고 있으라면서 군만두를 턱 하고 내어주신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던가요?”
찬희가 사장님께 그렇게 너스레를 떤다.
“백번도 넘게 했다.”
사장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린다.
“왜 니가 사장님 아들이 된 사실을 난 모르고 있지?”
내가 물었다.
“그거야 니가 오기 싫다고 했으니까. 지수와의 추억이 깃든 장소라서. 이것도 기억 안 나나 보지? 올해 초, 지수에게 까이고 찌질거릴 때 우리가 여기 가자고 했더니 니가 싫다고 했었어.”
최유라가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하는 찬희의 옆구리를 쿡 하고 찌른다.
아니야. 유라야. 그렇게 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쿡 찔러서 될 게 아니야.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힘껏 후려쳐야 갈비뼈에 실금이라도 낼 수 있는 거야.
그런가? 뭐,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당연한 이야기지.
아무튼 정리해보면, 내가 이 식당을 친구 놈들에게 알려줬고, 지수 때문에 여길 안 오는 동안 친구 놈들은 찔끔찔끔 다니면서 여기서 사장님과 친분을 쌓았다 이거구만.
보아하니, 유라도 몇 번 왔었던 것 같고.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괘씸하네.
나는 아픈 추억 때문에 눈물짓고 있을 때, 힘들어하는 친구는 안중에도 없이 지들끼리 맛있는 거 먹겠다고 나 빼놓고 여기 왔다는 이야기 아냐.
사장님과 모자 관계도 맺고, 보아하니 올 때마다 염치도 없이 군만두 서비스로 받아먹고.
“그나저나, 어쩐 일로 둘이 온 거야?”
내가 화제도 돌릴 겸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어? 그게. 저기. 그게.”
핵심을 찌르는 내 질문에, 새가슴 박찬희가 말을 더듬는다.
이 자식아. 너는 법 지키며 살아라.
“학생식당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오늘 메뉴도 별로고, 갑자기 여기가 생각나서 내가 같이 가자고 해서 온 거야.”
버벅거리는 박찬희가 못 미더웠는지, 유라가 대신 답 한다.
최유라, 역시 대범해. 그짓말도 아주 잘해.
저번에 친구 놈이 찬희보다 유라가 돈 더 잘 벌 거라고 했는데, 나도 그 생각에 동의한다.
“그랬구나.”
“어. 그, 그런 거지.”
어버버한 박찬희. 넌 입 안 여는 게 좋겠다.
“그나저나 니들 주말에 뭐 하고들 지냈냐?”
내가 물었다.
내가 이 두 녀석들이 학교에서 저지른, 차마 눈 뜨고는 보지 못할 목불인견의 참상을 목도한 날이 금요일이었다.
토요일에는?
시작하는 연인이라고 가정했을 때, 토요일에는 만났을 거다. 분명. 백 퍼센트.
시작하는 연인 사이인데 주말을 같이 보내지 않았다?
한쪽에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주말?”
“어. 토요일에 뭐했어?”
내가 유라에게 물었다.
진실에 쉽게 다가가려면 찬희 녀석을 조지는 것이 가장 쉽고 빠른 길이지만, 자고로 게임에는 어느 정도의 난이도라는 것이 있어야 재미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냥 집에 있었는데?”
유라는 최대한 자연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했지만, ‘그’와 ‘냥’ 사이에 짧은 호흡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천하의 최유라도 사랑 앞에서는 여자라 이건가?
“너는?”
나는 찬희에게 물었다.
“나도 집에.”
뻥 치고 있네.
집? 누구 집? 유라 집?
유라가 부모님하고 사니까, 유라 집은 아니었겠지.
아무튼 뻥이다.
“일요일은?”
“하루 종일 과외했지.”
찬희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말투로 말한다.
조금 전 당황하던 말투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자연스러운 말투다.
“과외?”
“일요일에 몰아서 하잖아. 점심부터 거의 자정까지. 7월 모의고사 준비한다고 죽는 줄 알았다니까.”
그 말을 들으니, 예전에 찬희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찬희가 생긴 건 저래도 나름 한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한국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고, 작년에 동생하고 동생 친구 수학 과외를 했는데, 그게 입소문이 나서 고객이 늘었다고. 그래서 일요일에는 점심때부터 밤까지 과외를 한다고. 그게 짭짤하다고.
잠깐만.
일요일 자정까지 과외?
근데, 진철이 형 말에 따르면 유라는 일요일에 선릉에서 남자와 부비부비를 하고 있었다?
처음에 1학년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수정이 누나가 잘못 봤거나, 아니면 찬희를 1학년으로 착각을 했거나 그렇게 생각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확실히 뭔가 이상하다.
나도 모르게 유라를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유라는 특별한 반응이 없다.
애초에 진철이 형하고 수정 누나가 착각을 했을까?
유라가 아닌데, 유라라고 착각을 한 것인가?
“너는?”
유라에게 물었다.
“나? 집에 있었는데?”
“너 집이 어디랬지?”
“삼성동. 근데 삼성역 쪽은 아니고, 선정릉역에서 더 가까운 삼성동.”
유라가 그렇게 말한다.
***
기묘하고 이상한 일은 점심의 우연한 만남이 끝이 아니었다.
점심을 먹고 어서 빨리 내가 꺼져줬으면 좋겠지만, 차마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없어 쭈뼛거리는 찬희와 유라를 뒤로하고 학교로 돌아왔을 때, 기이하게도 수정이 누나를 만났다.
시간 괜찮으면 잠깐 차나 마시자는 권유를 받았고, 수업까지 시간이 있는 나는 그 권유를 받아들였다.
“오빠한테 이야기 들었지?”
수정이 누나가 그렇게 묻는다.
“네? 아. 네.”
그 이야기겠지. 그거 말고 뭐가 있겠어?
“축하드립니다.”
내 말에 수정이 누나가 쑥스러운 듯 작게 웃는다.
참으로 위대한 사랑이여. 너는 많은 것을 이루어낼 수 있구나.
“그래. 고마워. 그나저나, 니가 시켰다며?”
“네?”
“어제 깨톡하라고.”
그거 말이구나.
연애에 있어서 선배인 내가 진철이 형에게 조언을 좀 했었더랬지.
그 이야길 하는 건가 보다.
그나저나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뭘까? 쓸데없이 오지랖을 부렸다고 뭐라고 하려는 것일까?
“고마워.”
다행히도 혼나는 건 아닌가 보다.
“아니에요. 죄송해요. 제가 오지랖을 부려서.”
“아니야. 오빠에게는 그런 부분이 필요한데, 한수 니가 딱 좋은 타이밍이 짚어 줬어. 고마워.”
나는 머리를 긁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결과적으로 잘 되었나 보다. 뭐 결과가 좋으면 만사 오케이지.
“그나저나, 누나, 당분간 고생하시겠어요.”
분위기도 나쁘지 않겠다, 나는 그렇게 말했다.
내 말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지, 수정 누나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솔직히 싫지 않아.”
수정이 누나의 답이다.
“네?”
“오빠. 답답한 성격인 거, 나도 알고 있지…. 뭐 1~2년 본 사이도 아니고. 그런데, 나는 그런 오빠의 모습이 좋아. 어른스럽고, 듬직하고, 신뢰도 가고.”
수정이 누나가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알고 있던 수정이 누나가 아닌 것 같다.
다른 사람 같다.
세상에, 사랑이라는 무형의 감정이 이토록 대단하다니.
“솔직히 뭐, 좀 더. 뭐. 아니야. 아무튼, 연애에 있어서는 한수 니가 선배니까, 오빠 만나면 조언도 해주고 그래 줘.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줄게.”
“네. 하하. 네. 네. 뭐. 하하.”
나는 그렇게 얼버무리며, 앞으로 이 두 사람 사이에는 절대로 개입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딱 보아하니 진철이 형은 당분간 계속 어리버리 모드일 테고, 그리고 누나가 뭐 잘 알아서 하겠지.
괜히 누나 말 듣고, 내가 열심히 도와줘야지 같은 생각 하다가 나중에 문제 생기면 욕 한 바가지 퍼먹을 것 같다.
애초에 남의 연애에 개입하는 건 손해 보는 장사다.
사이가 좋으면 자기 둘이 좋아서 그런 거고, 싸우면 주변 사람들 탓이고.
속으로 그런 계산을 하고 있는데, 누나가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한다.
“그나저나, 한수 너는 어때?”
“네? 뭐가요?”
“지연이 하고.”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