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34화 (134/271)

134 : 사문위원회(査問委員會) (2)

“유지연 위원. 발언을 허락합니다.”

오늘 제대로 컨셉충이 되기로 했는지, 이중훈이 웬일로 ‘어. 그. 그래. 지. 지연아. 무슨 할 말 있어?’ 그렇게 어버버 거리지 않고 근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지연이의 눈동자에 주저함이 느껴진다.

나는 저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죄송해요. 제가 낄 자리가 아니었네요. 죄송하지만 먼저 일어나도 될까요?

그것 말고 뭐가 있겠어?

나야 뭐, 이 바보들에게 적응이 되어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문위원회 놀이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줄 수 있지만,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지연이가 이런 상황에 면역이 있을 리가 없다.

미안하다. 지연아. 오빠들이 못난 모습 보여서.

욕을 한다고 해도 탓하지 않을게. 하지만 비난을 해야 한다면 승환이에게 가장 강한 비난을 해주렴. 지금 이 상황을 만든 것은 8할이 승환이란다.

“제가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연이의 말이다.

응?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

“박승환 위원님의 말씀을 듣고 저의 짧은 소견으로 판단한바, 피사문인 찬희 선배, 이하 피사문인이라 칭하겠습니다. 그리고 관계자 유라 언니, 이하 관계자라 칭하겠습니다. 두 사람이 지금 연인 관계에 돌입했고, 오늘 이 자리는 그러한 두 사람의 관계 변화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라고 생각되는데, 제가 옳게 알고 있는 건지 알고 싶습니다.”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목소리는 평소의 예쁜 지연이 목소리 맞는데, 어투는 전혀 다르다.

저게 또 귀엽네. 마치 여고 연극반 단원의 어설픈 연기 같아서.

아니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제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지 확신이 필요하다고? 그게 왜 필요한데?

“정확합니다.”

이중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대답을 들은 지연이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여기 사문위원님들께서는 지금의 상황을 야기한 피사문인에게 그 책임을 묻고, 책임에 상당하는 처벌을 논의하실 생각이신 것도 맞으신가요?”

“그렇습니다. 유지연 위원. 우리와 함께하시겠습니까?”

이중훈이 그렇게 묻는다.

지연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여쭈어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시는 대로.”

아주 죽이 척척 맞네.

“사문위원님들께서는 피사문인과 관계자 사이의 관계가 연인에서 예전에 친구 상태로 다시 회귀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인지 여쭈어보고 싶습니다.”

그런 지연이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승환이었다.

“여러 가지 가능성 중 하나로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거짓말이다!

승환이가 원하는 것은 파국이다! 피눈물의 강이 흐르는 파국이다!

작게 고개를 끄덕인 지연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여러분들께서 원하시는 것이 두 분의 이별이라면 저는 함께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피사문인에게 책임을 묻고 합당한 처분을 내리는 것에는 동의합니다만, 그 끝에 피사문인과 관계자의 결별이 있다면, 저는 함께하지 않겠습니다.”

지연이의 말에 승환이가 움찔한다.

마귀 같은 자식.

“그런 일은 없습니다. 우리 사문위원들은 친구의 자격으로 피사문인의 사랑을 응원하며, 그 끝에 있을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친구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않은 피사문인에게 사소한, 아주 사소한 징계를 내리는 것뿐입니다.”

이중훈이 입술에 침도 바르지 않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

“동의합니다.”

김창회가 말했다.

“…동의합니다.”

박승환이 말했다.

당연히 거짓말이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었는데 빠질 수는 없지.

일단 상황이 재미있잖아?

“알겠습니다. 미력한 힘이지만, 저도 함께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유지연이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아무튼, 그렇게 지연이가 합류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고, 녀석들은 다시 어떻게 박찬희에게 책임을 물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다.

하지만 나는 분노를 토하는 이중훈의 열변을 한쪽 귀로 흘리면서, 조금 전 진철이 형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니네 학번에 유라라는 애가 있지? 어제 선릉에서 수정이랑 밥 먹고 나오다 우연히 봤는데, 남자애랑 같이 딱 붙어서 걸어가더라고. 우리도 좀 그래서 아는 척 안 하고 자리를 피했는데, 수정이가 그러더라. 유라 옆에 있던 남자애 우리 과라고. 그나저나, 요즘 확실히 연상연하 커플이 유행이긴 한가 보네. 수정이가 그러던데? 남자애 우리 과 1학년이라고.

그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었다.

***

창회가 화장실에 감으로써 사문위원회 1차 사전 회의는 잠깐의 휴식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왜 그랬어?”

내가 지연이에게 물었다.

“네? 뭐가요?”

“왜 동참하기로 한 거야?”

내 질문에 지연이가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재미있을 것 같아서요.”

악마다! 여기 지옥에서 가장 예쁜 얼굴을 한 악마가 여기 있다!

“그리고 거부할 수 없었어요.”

“응?”

“오빠들하고 같이 놀 수 있는 기회인데, 어떻게 거부하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헤 하고 웃는데, 아오. 이 녀석 진짜 예뻐 가지고, 그런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면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냥 와락 안아주고 싶네.

그 순간 머릿속에서 유 선생님의 말이 리플레이 되었다.

-아시고 계시겠지만, 제 여식이 한수 군에게 연심을 품고 있습니다.

-물론 한수 군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는 있지만 딸 가진 아버지 입장에서 걱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더군요.

-제 여식은 한수 군이 작은 어르신이라는 것을, 어르신을 계승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딸이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애비의 어리석은 욕심으로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지금 눈앞에 지연이는 평소에 내가 알던 그 지연이와 같은 지연이이지만, 그런 지연이를 바라보는 내 시선은 예전과 완전히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지연이는 존경하는 유 선생님의 영애(令愛)님 아니시던가.

참 여러모로 복잡하다. 승환이도 그렇고 서현 씨 어머님도 그렇고, 지연이도 그렇고. 나는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내 의도와는 다르게 자꾸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변하고 있다.

에휴 모르겠다.

일단 지연이는 지연이. 내가 뭐 지연이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지연이가 날 선배로 대하고 있으니, 나도 지연이를 사랑하는 후배로 대하면 되겠지.

복잡한데, 일단 그렇게 정리하자.

나는 그렇게 정리하고 중훈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창회 저 녀석은 왜 부른 거야?”

내가 목소리를 낮춰 이중훈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 안 불러? 너도 이제부터 피사문인이다. 목을 닦고 기다려라. 그렇게 말해?”

중훈이가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하긴 그것도 그렇지.

김창회는 필드 잡몸 같은 박찬희와는 다르다.

최소 던전 보스, 아니, 레이드 보스급이다.

그냥 생각 없이 대충 공대 짜서 들어갔다가는 전멸을 면치 못한다.

전멸은 둘째 치고, 서로 니가 잘했니, 내가 잘했니 하면서 쳐 싸우다가 얄팍한 우정까지 산산조각 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우리가 김창회의 그 끔찍한 장면을 두 눈으로 목도한 이상, 모르는 척 넘어갈 수는 없지.

준비를 제대로 해야지.

공대도 제대로 꾸리고, 공략집도 확실히 숙지하고, 그다음에 저 보스몹을 쓰러트리러 가야지.

그리고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일단 박찬희. 그 자식에게 피의 제재를 내릴 때, 김창회의 무력은 필수적이다.

일단 김창회의 무력을 이용해 박찬희를 까고, 박찬희가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그 녀석을 살살 꼬셔서 김창회 공대의 매인 탱커로 세우면 되겠지.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아니던가. 후후후.

“왜요? 창회 선배도 뭐 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지연이가 그렇게 묻는다.

나는 재빨리 토요일 도서관 앞에서 목도한 그 끔찍한 참상을 빠르고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창회가 학교에 여자를 데려왔는데, 그 여자가 엄청 예뻤다는 그런 이야기.

“창회 선배가요?”

지연이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그렇게 되묻는다.

지연이의 반응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

김창회에게 여자라니!

오이소박이를 마요네즈에 버무려 먹는 느낌 아니던가?

“일단, 찬희 녀석부터 마무리하고 저 녀석도 처리해야 하니까, 지연이 너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 창회 저놈은 사문위원회 가지고 안 될 텐데. 혁명위원회라도 설치해야 하나?”

중훈이의 말에 지연이는 마치 기밀정보를 입수한 스파이처럼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귀여워. 이 녀석은 뭘 해도 귀여워!

아무튼, 그렇게 비밀회의 중 작은 비밀회의를 진행하다가 김창회가 돌아왔고,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박찬희를 칠성판에 올려놓고 말로 난자하기 시작했다.

***

무겁게 시작한 사문위원회는 언제나처럼 시답잖은 수다로 변질되었다.

연애 이야기에서 성적과 취업으로 이어졌다가, 최근 국제사회의 경제 동향과 미 중간의 날 선 대립이 한반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토론으로 발전했고, 그렇게 한참을 아무런 실익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1군 걸그룹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가지고 심도 깊은 토론을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10시가 넘어버렸다.

얼마나 떠들었는지, 허기지다고 피자까지 배달시켜서 먹었더니, 시간이 이렇게 된 지도 몰랐네.

진짜 이놈의 배달 어플 지워버리든가 해야지, 배달비 모았으면 차도 샀겠다.

꼴랑 한 조각 주워 먹은 창회는 칼로리 태우겠다고 학교 앞 헬스장으로 갔다. 저 괴물은 집 근처에도 헬스장을 등록해놓고, 학교 근처에도 헬스장을 잡아놨네.

오늘 엄마 차 가져온 중훈이는 지연이에게 데려다주겠다고 제안을 했지만, 지연이는 반대 방향이라는 핑계로 정중하게 까버렸다.

날 데려다 달라고 했더니, 중훈이 녀석은 반대 방향이라면서 싫다고 인상 쓰고는 주차장으로 가버렸다.

결국 또 지연이와 나, 두 사람만 지하철을 타고 가게 되어버렸다.

“지연아. 니네 학번에 민주라는 녀석이 있지?”

지하철 안에서, 내가 지연이에게 물었다.

“네. 박민주. 민주가 왜요?”

“아니. 얼마 전에 고깃집을 갔는데, 그때 우연히 만났거든.”

나는 며칠 전, 고깃집에서 민주하고 그 형태인지 형상인지, 형상기억합금인지 아무튼 그런 이름을 가진 남자 후배 놈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형태. 형태였지. 젠장. 결국 남자 놈의 이름을 외워버렸네.

“그랬군요. 아마 조별과제 때문에 만났을 거예요. 잠깐만요. 단톡방 확인해볼께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꺼내 든다.

“아니야. 뭐, 그럴 필요까지는 없고. 근데 친해? 걔네들이랑?”

“네. 친해요. 친구예요.”

“얼마나 친한 친구?”

내가 그렇게 물었다.

나도 전 여자 친구인 지수에게 들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여자들 사이에서 친구라는 관계는 엄청나게 복합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나도 그렇고, 남자들은 보통 단순하게, 친구, 적, 모르는 사람. 이렇게 세 단계로 구분하는데, 여자들은 친구와 모르는 사람 사이에 훨씬 더 복잡한 분류법을 적용한다더만.

사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진짜 친한 친구, 친한 친구, 조금 덜 친한 친구, 아직 친하지는 않지만 친해지고 싶은 친구, 친해질 가능성이 있는 친구, 친해지고 싶지 않은 친구, 만나면 친한 척하는 친구, 인사 정도는 웃으며 해주는 친구 정도의 분류는 가지고 있다고.

말만 들어도 피곤하다.

“음…. 민주는 적당히 친한 친구? 형태하고는 이야기 많이 해보지는 않았어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하고는 작게 웃는다.

지수의 분류법에 따르면 민주는 ‘친하지는 않지만’ 범주에 들어가는 친구인가 보다.

“근데 왜요? 민주에게 관심 있어요?”

지연이가 그렇게 묻는다.

“아니이. 전혀!”

내가 재빨리 정색하면서 부정하자 지연이가 다시 작게 웃는다.

“아니. 그냥. 그날 나였나, 중훈이였나. 두 사람 오는 거 보고 둘이 사귀냐? 뭐 그렇게 농담했는데, 민주라는 그 친구가 정색하는 것 같아서. 괜히 우리가 실수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달까?”

“역시 한수 오빠. 섬세하네요.”

이거 소심하다는 소리는 아니지?

“근데, 저는 뭐, 두 사람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는 없는데요. 아마 조별모임이라서 그냥 자료조사 하다가 밥 먹으러 온 거 아닐까요? 제가 좀 알아볼까요?”

“아니.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물어본 거야. 그나저나, 요즘은 어떻게 지내? 특별한 일 없고? 좀 있으면 방학인데, 뭐 할 거야?”

나는 그렇게 주제를 돌렸고, 우리 두 사람은 평소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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