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 사문위원회(査問委員會) (1)
나는 부끄러워하는 진철이 형의 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양반이 무슨 일이랴? 갑자기 적응 안 되게 왜 이러는데?
선배가 아니라 친구였다면 일단 콧잔등에 쨉부터 한 방 날렸을 그런 웃음이었다.
내가 여기, 이 벤치에 앉아 있던 두 사람, 진철이 형과 수정 누나의 모습을 본 것이 토요일이었다.
정확하게 이틀 전.
처음 보았을 때, 두 사람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단어가 뜨문뜨문 들리기는 했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
하지만 나는 그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본 순간 딱 눈치를 챘었다.
뭔가 있다.
두 사람 사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성의 관계 사이에 무언가가 있다고 말이지.
그리고 그런 내 의심을 확인시켜주는 장면 하나.
진철이 형 어깨로 천천히 기울어가는 수정 누나의 머리.
빈혈을 일으켰을 수도 있다. 아니면 진철이 형 어깨에 모기가 앉아서 수정이 누나가 머리로 재빨리 찍어 눌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설을 떠올려보았지만, 바로 폐기.
최소 썸, 어쩌면 오늘부터 1일 하고 얼마 안 지난 상황. 결국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얼마나 되셨어요?”
내가 진철이 형에게 물었다.
“응?”
진철이 형이 그렇게 되묻는다.
이 양반. 선수끼리 왜 이래?
나는 ‘두 사람이 사귄 지 얼마나 되신 건가요?’라고 되묻지 않고, 그저 지긋이 진철이 형을 바라보았다.
“어. 대충 일주일.”
진철이 형이 쑥스러워하면서 그렇게 말한다.
대충은 또 뭐야? 여자 친구가 들었다면 혼날 말을 하고 있네.
아무튼 내 촉은 여전하군. 후후.
그리고 형의 대답에서 나는 가설 하나를 추가적으로 도출할 수 있었다.
이 양반 누구 만난 경험 별로 없다. 어쩌면 수정이 누나가 처음일 수도 있겠다.
불쌍한 수정이 누나, 고생 좀 하겠구나.
하지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축하드립니다.”
내가 웃으며 그렇게 말해주었다.
“축하는 무슨…. 고맙다.”
진철이 형이 쑥스러워하면서 그렇게 말한다.
진철이 형이 아니라 친구 같았으면 일단 사지부터 결박하고 나서 어떻게 된 건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숨김없이 모두 고하거라! 하며 취조를 하겠지만, 동방예의지국 유교 탈레반 전사로 성장한 내가 그럴 수는 없고.
“다른 사람들도 알아요?”
“다른 사람 누구?”
“예를 들면 형 동기들. 준호 형이나.”
내 말에 진철이 형이 작게 웃는다.
아직 말 안 했구만. 이 양반.
“아니. 아직.”
“어차피 맞을 매라면 미리 맞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래. 어차피 맞을 매라면.”
진철이 형이 그렇게 말하며 또 웃는다.
이 양반 맞으면서도 웃겠네.
아이. 왜 그래. 아파. 살살 좀 해.
그러면서 다구리 당하는 진철이 형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제였었지? 너에게 들킨 날이?”
“네.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래. 그날 널 만나고, 수정이가 그러더라. 자기는 괜찮다고.”
“…뭐가요?”
“그. 우리… 만나는 거. 비밀로 해도 자기는 괜찮다고.”
그 말을 드는 내 얼굴이 본능적으로 굳는다.
아니, 이 양반 큰일 날 사람이네. 여자 친구에게 그런 말을 하게 만들었다고?
“내가 좀 그런 부분이 있거든. 뭐랄까. 조금….”
“조심스럽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소심하다’였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조심스럽다…보다는 소심하다가 맞겠지.”
이 양반 잘 알고 있네.
“아무래도 좀 그런 부분이 있으니까. 만나기로 하고 나서 일주일 정도가 흘렀는데, 내가 뭐, 특별히 어떤 액션이 없으니까, 수정이도 그게 신경이 쓰였던 것 같아.”
그렇겠지.
내가 듣기로는 수정이 누나가 진철이 형을 먼저 좋아했었다고 했었지. 아무래도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조금 양보하는 것이 커플의 암묵적인 룰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날 널 만나고 수정이가 그렇게 말하는데, 내가 너무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더라. 수정이하고…. 그….”
이 양반 아직 멀었네. 멀었어.
“사귀는 것이.”
내가 도와주었다.
“그래. 사귀는 게, 숨길만 한 일이 아닌데, 수정이는 고마운 사람이고, 그 고마운 사람이 내 옆에 있어 준다는 것은 더욱 고마운 일인데, 내가 괜히 그 녀석 불편하게 한 것 같아서. 그래서 좀. 뭔가 미안하고, 부끄럽고 그렇더라고.”
“뭔가 미안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미안해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까지 단서로 볼 때, 이 사람은 연애와 관련해서, 아무것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빙빙 돌려 말하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래. 내가 잘못했지.”
진철이 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응? 어. 뭐. 대답 못 했어.”
순간적으로 진철이 형 때릴 뻔했다.
아이고 이 답답한 형님아!
대답을 못 해? 거기서 대답을 못 하면 안 되지!
“어제 수정이 누나 만났어요?”
“어. 어제 저녁 같이 먹었는데.”
“누나가 무슨 말 안 했어요?”
“어. 뭐, 딱히….”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진철이 형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 제가 형을 좋아하고 따르는 후배 입장에서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 어. 그래.”
“지금 바로 깨톡하세요.”
“수정이에게?”
“네. 깨톡으로, 어디 있냐고, 최대한 빨라 만나자고 하세요. 최대한 빨리. 1초라도 빨리.”
“그리고?”
“일단 보내세요. 지금 당장. 롸잇 나우!”
내 강건한 태도에, 형이 깨톡을 보낸다.
역시 막 시작한 연인들답게, 바로 답이 온다.
나는 신사답게, 두 사람의 깨톡을 훔쳐보는 대신 먼 하늘을 바라보며 진철이 형 특제 캔커피를 홀짝였다.
“만나기로 했어. 만나서?”
“수정이 누나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세요.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조금 전 나에게 이야기했던 것처럼. 고맙다고, 내 곁에 있어 줘서 더욱 고맙다고. 그리고 성격이 이래서 그런 거지, 수정이 누나가 부끄럽다는 생각은 추호도 한 적 없다고. 눈을 보면서 말해야 해요. 꼭 눈을 보면서! 기왕이면 손도 잡고.”
내 말에 진철이 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모태솔로다. 확실하건데 진철이 형 백! 퍼센트 모태솔로다.
진철이 형은 말없이 날 바라보다가 씩 하고 웃는다.
그리고 말한다.
“가끔 보면 넌 동생이라기보다 친구 같을 때가 있어,”
당연하죠! 연애에 있어서는 내가 형보다 선배입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지만, 선은 넘지 말아야지.
“바로 가봐야겠다.”
바로 만나기로 했는지, 진철이 형이 그렇게 말한다.
“넵. 다녀오십쇼.”
“고맙다. 나중에 밥 살게.”
“학생식당 말고 다른 곳에서 얻어먹겠습니다.”
“그래. 밖에서 먹자. 비싼 거 사줄게.”
진철이 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조금 걸어가다가, 뭔가 할 말이 생각이라도 난 듯 몸을 돌렸다.
“저기. 니네 학번에 유라라는 애가 있지?”
“네. 최유라.”
“그 친구도 CC야?”
“네?”
이게 갑자기 뭔 쌩뚱맞은 화제 전환이야?
“어제 선릉에서 수정이랑 밥 먹고 나오다 우연히 봤는데, 남자애랑 같이 딱 붙어서 걸어가더라고. 우리도 좀 그래서 아는 척 안 하고 자리를 피했는데, 수정이가 그러더라. 유라 옆에 있던 남자애가 우리 과라고.”
최유라, 박찬희 이 자식들이!
어디 감히 혼약도 맺지 않은 것들이 길거리에서 부비부비를 시전한단 말이냐!
내 당장 이 두 녀석을….
아니, 유라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고, 일단 박찬희 그놈을 당장 잡아다가 물꼬를 내버릴 것이다.
어디 집안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선릉?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감히 강남 유흥가에 얼쩡거리고!
“그나저나, 요즘 확실히 연상연하 커플이 유행이긴 한가 보네.”
“네?”
연상연하 커플?
이거 무슨 소리야
“수정이가 그러던데? 남자애 우리 과 1학년이라고.”
“…1학년이요?”
“축제 때 같이 일했다고 하던데? 아무튼, 난 먼저 가볼게. 다음에 보자. 오늘 고마웠다.”
진철이 형은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는 내 시야에서 멀어져갔다.
나는 그렇게 사라져 가는 진철이 형의 뒷모습을 보면서 속으로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1학년? 1학년이라고?
***
시계의 시침이 7이라는 숫자에 다가가자, 하루 종일 대지를 괴롭혔던 뜨거운 햇살도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마치, 마지막 발악과 같은 저녁 햇살이 비치는 과방.
나는, 아니 우리는 과방에 앉아 있었다.
나, 박승환, 이중훈, 김창회, 그리고 유지연.
우리 다섯은 과방 가운데 탁자를 중심으로 ㄷ자 형태로 앉아 있었다.
“사문위원회 1차 사전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창을 등지는 위치에 앉아 있는 이중훈이 석양을 배경으로 사문위원회(査問委員會) 개회를 선언했다.
지연이를 제외하고 우리 모두는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연이만이 지금 이게 어떤 상황인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원래 오늘 참석자 명단에 지연이 이름은 없었다.
지연이가 우리 멤버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결정해야 하는 사안은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인 지연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연치 않게,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던 지연이가 과방에 들렀고, 일부러 과방이 비어있는 시간을 택한 우리와 딱 마주쳤고,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있을 것 같다고 눌러앉은 지연이에게 차마 우리끼리 해야 하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을 할 수 없었고, 어영부영 지연이도 사문위원회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어떠한 처분을 내릴 것인지를 논의하기 전에, 사실관계부터 명확히 하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이번 사안과 관련해 추가적으로 알아야 할 사항이 있다면 손을 들어 주십시오.”
이중훈이 그렇게 말하자 손 하나가 존재감을 드러낸다.
어김없이 박승환이다.
“박승환 위원. 말씀하십시오.”
“사문위원 박승환, 오늘 조사한 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피사문인 박찬희, 이후 피사문인으로 칭하겠습니다. 관계자 최유라, 이후 관계자라 칭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사람은 연인관계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설마 했거늘….”
이중훈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온다.
“아, 실례했습니다. 계속 말씀해주십시오.”
“오늘 본 위원은 하루 종일 피사문인과 관계자에 행적을 조사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관계자와 친분이 있는 A씨. 익명을 요구한 관계로 A씨로 칭하는 것을 위원님들께서 이해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A씨로부터 두 사람이 소위 ‘사귀는 사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언제부터랍니까?”
“A씨의 이야기로는 지난주 화요일부터였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더 빨랐을 수도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A씨의 증언에 따르면 피사문인은 예전부터 주기적으로 관계자에게 흑심을 표현해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예전부터라면?”
“축제를 전후해서부터입니다.”
“축제라면, 과의 단결심을 고취시키고, 이를 통해 면학 분위기를 개선해, 이 나라의 새로운 동량으로 성장하겠다고 다짐하는 성스러운 그 시간에, 피사문인은 그런 더러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말이군요. 용서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중훈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간음 한수 선생의 악행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에, 피사문인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차마 입에 담기 힘든 흉계를 꾸몄다는 이야기입니다.”
박승환이 날 보며 말한다.
“야. 이 자식아. 거기서 내 이야기가 왜 나와?”
내가 항변했다.
“한수 위원. 존칭을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이중훈이 나에게 그렇게 경고했다.
아나. 씹새들. 신났어. 아주.
저번에는 재판 놀이, 그다음에는 사또 놀이하더니, 이번에는 사문위원회냐?
“괜찮습니다. 사람은 가지고 있는 지식수준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크게 개의치 않습니다.”
박승환이 날 보며 그렇게 말한다.
저 자식이….
“한수 위원은 말을 조심해주시기 바랍니다. 박승환 위원. 발언을 계속해 주십시오.”
“축제 전후로부터 시작된 피사문인의 구애는 날이 갈수록 점점 강도를 더해간 것으로 보입니다. 음주 후 전화를 걸거나, 아무런 사전 약속 없이 관계자를 찾아가 차를 마시자고 강요하고, 알바비를 받았으니, 맛있는 것을 사주겠다며 관계자를 유혹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그럴 수가! 알바비는 부모님 드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위원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알바비는 부모님 드렸다며, 학생식당 정식으로 퉁친 바 있습니다.”
퉁친다가 뭐냐? 가지고 있는 지식수준의 언어를 사용한다며?
“참으로 용서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중훈이 다시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과방에 맑고 고운 목소리 하나가 울려 퍼졌다.
“저기 죄송한데요.”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보였다.
지연이가 손을 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