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 사이안화 포타슘(Potassium cyanide)
얼마 전, 정확히는 그저께.
할아버지가 서울 올라올 때마다 거처로 사용한다는 성북동의 대저택에서 뵈었던 요리연구가 선생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성함. 성함이 어떻게 되셨더라? 분명 소개를 받았는데?
“요리연구가 신소현 선생님이 우리 엄마예요.”
타이밍 좋게 서현 씨가 어머님의 성함을 다시 말씀해주신다.
맞다. 신소현 선생님.
선생님에게서 느껴지는 기품과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선생님께서… 서현 씨의 어머님?”
“네.”
서현 씨가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런 서현 씨의 얼굴을 보면서 선생님을 뵈었던 그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서재에서 차를 내려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 기품 있으시다는 생각과 함께, 어쩐지 아주 낯설지는 않다는 느낌도 받았었는데….
서현 씨 얼굴을 보니, 두 사람의 얼굴이 기묘하게 오버랩 된다.
그랬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미래의 장모님이셨구나가 아니라!
그날, 나 뭐 실수한 거 없나? 혹시 점수 깎일 만한 짓 하지 않았나?
나는 재빨리 그날 밤 기억을 리와인드 시켰다.
서재에서 차를 마실 때는? 나는 그저 조용히 있었지. 뭐 말씀을 드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밥 먹고 나서는? 공손하게 인사를 드렸던 것 같은데? 그랬나? 공손하게 인사드렸나?
“혹시, 어머님이 그날 저를 인지하고 계셨다는 말씀인가요?”
“어떤 부분이요? 한수 씨가 딸의 동거남이라는 사실?”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하고 또 쿡쿡 웃는다.
아니. 지금 이 언니가. 나는 심각해 죽겠는데!
“죄송해요. 당황한 표정이 좋아서 자꾸 농담을 하게 되네요. 네. 엄마도 알고 계셨어요. 한수 씨가 작은 어르신이라는 사실.”
“…뭐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어요?”
“어떤 특별한 말씀이요?”
서현 씨는 내가 무슨 질문을 하는지 잘 알면서 이렇게 되묻는다.
아니, 평상시 서현 씨는 이렇게 장난을 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눈에 장난기를 가득 담고 있다.
“아니. 뭐….”
뭐, 밥을 더럽게 먹는다든가, 가정교육이 부족한 거 같다든가, 뭐, 그런 책잡힐만한 그런 이야기들.
“고맙다고 하던데요?”
“네?”
“다식을 드실 때, 엄청 조심스럽게 드셨다고, 만든 사람으로서 기뻤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서현 씨의 말에, 내 머릿속에 그 예술작품 같은 다식(茶食)이 떠올랐다.
그대로 미술관에 가져가 전시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뭐라셨더라? 틀로 찍어낸 것이 아니라 직접 문양을 그려 넣으셨다고 그러셨었지.
아무튼, 그렇게 아름다운 작품이었기에 나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평소처럼 그냥 집어 들고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래서 사람이 항상 몸가짐을 조심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날지 모르는 일이니까.
“…다행이네요.”
다행이다. 다른 분도 아니고 서현 씨 어머님이신데,
“어땠어요? 우리 엄마?”
“네?”
“예쁘죠? 우리 엄마?”
“…네. 아니, 그 단어는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럼요?”
“처음 뵈었을 때 들었던 느낌은… 기품 있다?”
내 말에 서현 씨가 쿡 하고 웃는다.
아니, 이 아가씨가 오늘 왜 이러시지?
아무리 서현 씨라고 해도 자꾸 이런 식으로 반응하시면 나는 말 안 하렵니다.
나는 그런 표정으로 웃음을 참는 서현 씨를 바라보았다.
“미안. 미안해요.”
서현 씨가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재빨리 얼굴에 미소를 띠고 사과한다.
“그런 말 자주 들었어요. 기품 있고, 고상하다. 하지만 내가 아는 엄마, 집에서 보여주는 엄마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웃게 돼요. 미안해요. 진짜 미안해요.”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하며, 고개 숙여 사과한다.
뭐, 나도 내가 아는 할아버지와 어르신으로서의 할아버지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끼니 이해 못 할 건 아니지.
“아무튼, 처음은 기품 있다. 그다음은요?”
“…뭐, 그다음에는 식사 끝나고 인사해 주셨는데, 훌륭한 음식을 대접해주셔서 감사했다. 다식이 예술작품 같았다. 그리고….”
새 할머니 후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는 이야기는 빼버렸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지.
“그리고요?”
“그리고…. 어쩌면 또 뵐지도 모르겠다? 뭐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내 이야기를 들은 서현 씨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수 씨는 확실히 감이 좋은 것 같아요.”
그런 이해 못 할 말을 한다.
“네?”
“어제 엄마 만나고 왔거든요.”
어제, 그러니까 토요일.
내가 학교에 간 사이, 서현 씨도 저녁에 일이 있어서 다녀온다고 했었는데, 그게 어머님과의 만남이었나보다.
“안 그래도, 엄마가 한수 씨에게 저녁 대접을 해드리고 싶다고 했거든요.”
“저녁이요?”
“네. 그 날 드셨던 무거운 식사 말고, 가벼운 집밥. 한수 씨가 불편해하실지도 모른다고 말했는데, 마침 한수 씨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하시니 부담 없이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괜찮다고 말씀드리도록 할게요. 한수 씨는 언제가 편하세요?”
그렇게 말하는 서현 씨의 눈이 웃고 있다. 장난기가 가득 담겨있다.
아니. 우리 서현 씨, 이런 캐릭터 아니었는데? 이성적이고 차분한 그런 캐릭터였는데?
오늘 서현 씨는 마치 남자친구에게 말장난으로 끊임없이 도발하는 여자친구 같다.
여자친구?
그렇게 생각하니 지금 서현 씨 모습도 나쁘지 않은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머님께서요?”
“네. 우리 엄마 집밥도 맛있어요.”
그렇겠지. 우리 서현 씨도 요리 솜씨가 보통이 아닌데, 서현 씨 어머님이시자 한식요리연구가 선생님이시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왜 부담스러우세요?”
내가 대답을 못 하자 서현 씨가 그렇게 묻는다.
“아니요.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 저기. 뭐랄까. 그….”
“아니라?”
이 언니. 오늘 확실히 작정을 했다. 날 놀리려고 작정을 한 것이 분명하다.
“…아니요. 저는 언제든 좋아요.”
나는 일단 백기를 들었다.
솔직히 말하면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단순히 한식요리연구가 선생님께서 밥을 대접해주신다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아니, 그것도 부담스럽기는 부담스럽지.
부잣집 도련님 중훈이 녀석이 가끔씩 ‘역시 무언가 맛이 부족해’ 같은 뻘소리를 해대는 학생식당도 나는 겁나 맛있게 잘 먹고, 어쩌다 교수님 따라서 만 원짜리 한 장으로는 밥 먹기 힘든 교수식당에 가서 밥 얻어먹으면 ‘오늘 개꿀’이라고 좋아하는 나인데, 그런 나에게 언감생심 요리연구가 선생님의 밥이라니.
하지만 요리연구가라는 타이틀보다 더 부담스러운 것이 서현 씨의 어머님이라는 사실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아니요. 저는 부담스러운데요’ 할 수도 없지. 내가 바보도 아니고.
일단 좋다고 말할 수밖에.
“알겠어요. 엄마에게 그렇게 말해놓을게요.”
내 말에 서현 씨는 빙긋 미소를 짓고는 말한다.
나는 그런 서현 씨의 미소를 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큰일 났네.
***
다음 날.
공강 시간에 나는 인문관 올라가는 도로가 한적한 벤치에 앉아있었다.
역시 머리가 복잡할 때는 이곳처럼 완벽한 장소가 없다.
아니, 사실 완벽하지는 않다.
날씨가 본격적인 여름에 접어들면서 오후 시간에는 좀 덥다. 쾌적하지는 않다.
그래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기에 이 벤치만 한 장소는 없지.
나는 벤치에 앉아서 서현 씨 어머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분이셨지. 말씀과 행동에서 아우라처럼 기품이 느껴지는 분이셨다.
뭔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재벌가의 기품과는 조금 다르다.
뭐랄까?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가 사모님의 명품 옷과 가방에서 풍겨 나오는 도도한 기품과는 다르게, 영혼 깊은 곳에서 은은하게 우러나오는 난초와 같은 그런 기품이랄까?
서현 씨 어머님도 따지고 보면 재벌가 사람 아니던가.
중앙그룹 맏며느리 되시고, 미래 중앙그룹의 수장인 강우현 그 형님의 모친 되신다.
조선시대로 따지면 미래의 대왕대비마마란 말씀이지.
하지만 그날 뵈었던 어머님의 모습에서는 그런 분위기는 전혀 읽어낼 수 없었다.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은 있었지만, 꼭 따지자면 예술가 같은 그런 아우라지, 고압적인 재벌가 맏며느리?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아무튼, 그분께서 서현 씨 남매의 모친 되시고, 내가 작은 어르신이고 본인 딸과 같은 집에서 사는 남자라는 사실도 알고 계시고, 그런데 밥을 차려주고 싶으시다고 하셨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차라리 서현 씨가 내 여자 친구였다면, 여자 친구의 어머님 자격으로 한 번 불러다 밥을 차려주겠다는 이야기라면 이렇게 머리가 복잡하지는 않을 거다.
뭐 여자 친구 어머님 만난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고.
지수 어머님이 날 참 예뻐하셨는데.
아무튼 그런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고, 이런 복잡 미묘한 상황에서 밥을 차려주신다니, 옙! 알겠습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렇게 심플한 이야기는 아니란 말이지.
일단 나부터 어떤 포지션으로 어머님을 대해야 할지 혼란스럽다.
작은 어르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서현 씨 남자친구?
아니고.
썸남?
썸남이 어머님 뵐 일이 뭐가 있겠어?
동거남?
만약 내가 사랑하는 내 딸의 동거남에게 밥을 차려줄 기회가 있다면 밥그릇에 사이안화 포타슘(Potassium cyanide), 흔히 청산가리(?酸カリ)라고 불리는 그 물질을 코팅해 놓을 테다.
아무튼, 애매하다. 어떻게 하지? 무를 수도 없고?
아씨. 머리 아프네.
“한수구나.”
내가 막 머리를 쥐어뜯으려는 그 순간에,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
“어. 형. 안녕하세요?”
내가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 진철이 형이 서 있다.
“그래. 혹시 내가 방해한 걸까?”
진철이 형이 그렇게 말하며 벤치로 다가온다.
“아니요. 그냥 앉아 있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라도 못 믿겠다.
막 머리를 쥐어뜯으려는 타이밍이었으니까.
“마실래?”
내 옆에 앉은 진철이 형이 가방에서 어김없이 캔커피를 꺼내 나에게 건네준다.
“넵. 감사합니다.”
나도 거절하지 않고 캔커피를 받아 들었다.
자연스럽게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달달한 커피가 내 미각과 후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처음에는 너무 달아서 별로였는데, 마시다 보니 또 나름의 맛이 있다.
이거 나도 이 양반처럼 중독되는 거 아닌가 몰라.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가방 안에 몇 개나 더 들어 있어요?”
내가 진철이 형에게 물었다.
형은 말없이 가방을 열어 나에게 안을 보여준다.
두 개가 더 들어 있다.
내 손에 하나, 진철이 형 손에 하나. 그러면 총 네 개가 들어있었다는 소리네?
“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한 다섯 개씩 들고 오세요?”
“예전에는 열 개씩 들고 다녔어.”
진철이 형이 그렇게 말한다.
열 개? 열 개면 무게만 해도 얼마야? 등에 덤벨 넣고 다니는 거랑 뭐가 달라?
“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내가 그렇게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까지는 말 안 했겠지. 그저, 네. 하고 넘어갔을 거다.
아니, 애초에 몇 개 들고 다니는지 물어보지도 않았겠지.
하지만 최근에는 진철이 형이랑 조금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살짝 잔소리를 해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고 해서 그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진철이 형이라면 ‘어디 건방지게 후배 놈이.’ 같은 말은 안 하겠지.
역시 진철이 형은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작게 웃을 뿐.
그런데, 평소에 보여주는 웃음과는 조금 다르다.
진철이 형 동기들이 붙여준 별명처럼 ‘우울 박진철 선생’ 특유의 씁쓸한 웃음이 아니라, 어딘가 모르게 부끄러운, 거기에 아주 작은 행복감이 담긴 그런 웃음이었다.
“그래. 그러더라. 과하다고.”
진철이 형이 말한다.
응? 그랬다고? 누가?
“…수정이 누나가요?”
“어.”
부끄러워하는 웃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이 양반이 캐릭터하고 안 어울리게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