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 “정답입니다.”
“진짜로 그렇게 말했어요?”
승환이와의 대화 내용을 끝까지 들은 서현 씨의 질문이다.
“네?”
“시간아 멈춰라. 그렇게. 손들어 올리면서?”
서현 씨가 눈에 웃음기를 가득 담아 그렇게 물어본다.
“…네. 아뇨. 손은 안 들었어요.”
나는 수치스러움을 느끼며 그렇게 긍정하면서 동시에 부정했다.
심히 수치스럽다.
‘시간아 멈춰라’ 그렇게 말하는 내 모습을 3인칭 관점에서 떠올리니, 부끄러워서 왼팔에 봉인된 흑염룡이 깨어날 것만 같다.
“저도 보여주시면 안 돼요?”
“네에?”
“보고 싶어요. 한수 씨의 ‘시간아 멈춰라!’ 손도 번쩍 들어주세요.”
서현 씨가 싱글 생글 웃으면서 그런 끔찍한 말을 한다.
“싫어요. 안 돼요. 절대로.”
내가 단칼에 거절했다.
아니, 이 언니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승환이와 내가 나누었던 이야기의 핵심은 그런 게 아니란 말입니다.
그 녀석과 내가 서로 간에 생긴 작은 오해를 극복하고, 예전과 같은 친구 사이를 유지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 핵심이라는 말입니다.
그 부분이 시험에 나온다는 말입니다.
“보여주면 안 돼요?”
서현 씨가 다시 그렇게 말한다.
“아니. 그게 왜 보고 싶으신데요?”
“귀여울 것 같아서요.”
서현 씨가 다시 싱글 생글 웃으며 그렇게 끔찍한 말을 한다.
“…안 돼요. 절대로.”
내가 못을 박았다.
다시는 안 한다.
‘시간아 멈춰라’라든가, ‘힘이여 솟아라’ 같은 명령형 지시어를 사용하면 내가 성을 바꾼다. 한수가 아니라 막수다.
서현 씨는 잠깐 실망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말한다.
“아무튼 다행이네요. 승환 씨와 오해가 풀렸다니. 아. 그러면 승환 씨도 이제 아시는 거네요? 한수 씨가 여기서 머문다는 거. 저랑 같이 지내는 것도 알고.”
서현 씨가 그런 말을 꺼낸다.
응? 이거 느낌이 싸한데.
“그. 그렇죠?”
“그러면 놀러 오라고 하세요.”
“네?”
“승환 씨 놀러 오라고 하세요. 제가 맛있는 거 해드릴께요.”
더욱 끔찍한 말씀을 하신다.
아니, 왜? 그 녀석을 왜? 서현 씨와 나의 보금자리에 그런 더러운 영혼을 왜?
“승환이를요?”
내가 물었다.
“네.”
“왜요?”
“원래 친구 사이라는 게 그런 거잖아요. 친구 집에 스스럼없이 놀러 가고. 놀러 가서 밥도 얻어먹고, 놀다가 늦어지면 하룻밤 신세 지기도 하고, 그런 게 친구 사이잖아요.”
그렇기는 하다.
특히 우리 나잇대의 남자 놈들은 친구 집에 자주 놀러 간다. 넉살 좋게 ‘어머니! 밥 주세용!’ 그러면서 애교도 부리고, 놀다가 밤늦어지면 그냥 자고 가기도 하고.
하숙집 살 때도 그랬다.
원칙대로라면 하숙집에 친구 놈들 데려오는 건 금지였는데, 자주만 아니라면, 그리고 이성만 아니라면 가끔씩 친구 데리고 오는 건 하숙집 할머니도 뭐라고 안 하셨지.
작년까지만 해도 찬희나 창회, 승환이도 밤늦게까지 술 퍼마시다 차 끊기면 내 하숙방에 기어들어 와 처자고 뻔뻔하게 아침까지 얻어 처먹고 가고는 했었더랬다.
전 여자친구 지수도 가끔 놀러 오고는 했었지.
그 녀석 통금 시간에다가, 이성 동침 금지 원칙에 따라 잠은 못 자고 갔지만, 하숙집에 놀러 와 할머니랑 수다 떨거나 저녁 만드는 걸 돕고는 했었다.
할머니가 지수 참 예뻐했는데….
아니. 지금 그럴 생각 할 때는 아니지.
승환이를 여기로 데려온다?
“절대로 안 돼요.”
나는 단호히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다른 녀석이라면 몰라도 승환이는 안 된다.
물론 승환이 그 녀석이 목숨이 위험한 상황이라면, 예를 들어 좀비 아포칼립스 같은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라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등을 맡길 수 있는 녀석이기는 하지만, 집에 데려오는 것은 그런 상황과는 결이 다르다.
학교에 어떤 소문이 돌지 장담할 수가 없다.
생각만 해도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다.
승환이를 여기로 데려오느니 차라리 쫄쫄이를 입고, 헬멧도 쓰고 ‘시간아 멈춰라’를 백번 외치겠다.
“네. 한수 씨 좋을 대로 하세요.”
큰 의미를 담아 한 이야기는 아니었는지, 서현 씨가 그렇게 바로 수긍을 한다.
***
결국 낮잠은 자지 않았다.
거실 소파에 앉아 서현 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긋한 일요일 오후를 보냈다.
주로 친구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서현 씨는 내 친구들에 대해 궁금해했고, 나는 서현 씨에게 대학에 오기 전, 고향에서 친구 녀석들과 벌였던 몇 가지 해프닝을 이야기해주었다.
뭐, 내가 말하니까 해프닝이지만, 법학의 관점에서 보면 ‘사고’의 범주에 들어갈 이야기다.
예를 들어, 고향 친구 중 한 녀석이 짝사랑하는 여자애에게 고백한다고 해서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까이는 걸 구경하려고 따라갔다가 겁먹은 여자애가 울면서 소리 지르고 도망가고, 그 모습을 본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를 했고, 까인 녀석을 신나게 놀리던 우리가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나, 겨울에 빈집 들어가 놀다가 춥다고 불 피웠는데, 미친놈들이 신난다고 불쏘시개를 계속 집어넣다가 빈집을 홀라당 태워 먹을 뻔해서 동네 어르신들에게 조리돌림을 당했다는 이야기라든가, 옆 학교 애들과 사소한 오해가 생겼고, 오해를 풀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는데, 그게 ‘패싸움’이라는 오해를 사서 경찰서에 또 갔었다든가.
사실 패싸움이라고 오해해도 할 말이 없다.
애초에 내가 그 학교 대표하고 합의한 건 ‘대화의 자리’였는데, 망할 놈들이 각목이나, 야구 배트 같은 걸 들고 와서 문제가 되었었지.
야구도 안 하는 놈들이 집에 왜 배트가 있는데? 러시아야? 여기가 러시아야?
아무튼 그런 소소한 추억들을 서현 씨에게 이야기해주었다.
서현 씨는 ‘어머’ 하며 놀라거나, 웃음을 터트리거나, 끔찍한 표정을 짓거나 하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서현 씨가 집중해서 들어주니 말하는 나도 신나서 이야기를 하기는 했는데, 점수 깎이는 거 아닌가 몰라.
아무튼 그렇게 이야기는 계속 연결되고 연결되어 할아버지 이야기로 발전되었다.
내가 20년 동안 할아버지 밑에서 얼마나 핍박을 받고 자랐는지,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웠는지, 한번 이야기가 시작되자 끝도 없이 에피소드가 흘러나온다.
“…할아버지가 절 바라보는 눈빛에 네 단계가 있거든요. 1단계가 한심한 놈. 2단계가 고얀 놈. 여기까지는 괜찮아요. 물리적인 힘이 뒤따라오지는 않으니까요. 근데 3단계 ‘벌레 같은 놈’이라는 시선은 위험해요. 실제적인 물리력이 작용할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아파요?”
“아프죠. 진짜 아파요. 망할 할배, 나 몰래 책방에서 덤벨이라도 드는지, 힘이 엄청 좋거든요. 그 양반이 한번 손을 쓰겠다 마음먹으면 피한다는 건 꿈도 못 꿔요. 그래도 내가 고향에서는 어디 가서 주먹질로는 꿀리지 않는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역시 시베리안 한수키!”
서현 씨가 조금 전 말해준 고향에서의 별명을 말하며 쿡쿡하고 웃는다.
“아. 그건 좀 잊어주세요. 아무튼 할아버지가 손을 움직이면 피하는 건 둘째 치고,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니까요. 순식간에 번쩍.”
나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떨었다.
아우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움찔움찔한다.
“또 아프기는 얼마나 아픈지. 뼈까지 아려온다니까요.”
“…너무하시네요.”
서현 씨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다.
역시 우리 서현 씨는 마음도 착하다.
아름다운 얼굴로 그렇게 말해주니, 사고치고 혼나길 잘 했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뭐, 그건 그거고, 일단 오해는 풀어야지. 할아버지 폭력 가장 오명 쓰겠다.
“저는 크게 불만 없어요. 할아버지가 항상 그렇게 매를 드는 건 아니고, 확실히 큰 사고를 쳤을 때만, 제가 생각해도 혼나도 싸다 싶을 때만 그랬으니까. 뭐 자주 그랬던 것도 아니고, 20년 동안 한 서너 번? 대부분 고등학교 때 몰려있었고요. 아무튼 감정에 기반한 가정폭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내 말에 서현 씨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할아버지가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하고 있어요. 저는 엄마 아빠가 없으니까, 그래서 밖에 나가서 부모 없이 자랐다는 이야기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아서?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예의범절을 엄청 강조했었거든요. 뭐 손자를 유교탈레반 전사로 키우고 싶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유교탈레반 전사로 키우시려고 했다면 실패하셨는데요? 생각이 깊고, 마음이 따뜻한 손자를 키워내신 것 같아요.”
서현 씨가 그렇게 대놓고 면전에서 칭찬을 한다.
아이고. 쑥스러운데.
“무엇보다 사랑받고 자랐다는 느낌이 들어요.”
사랑받고 자랐다.
뭐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는 하지만 때려 죽어도 내 입으로 그런 말은 못 하지.
“그나저나, 서현 씨도 부모님께 크게 혼나고 그랬던 적 있었어요?”
나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렇게 일단 질문을 하고 나서 생각해보니, 나는 서현 씨에 대해서 그렇게 아는 것이 많지가 않다.
일단 할아버지하고, 오빠는 만나봤고, 학교는 하버드를 나왔고. 그리고?
더 이상 아는 게 없다. 다른 가족이나, 친구들이나.
“음. 한수 씨에 비하면 저는 그렇게 혼난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냥 꾸중 정도?”
뭐, 당연하겠지.
우리 서현 씨가 혼날만한 일을 하는 사람인가?
아기 서현이나 어린이 서현이나, 소녀 서현이도 지금처럼 아주 예쁘고, 착하고 바른 사람이었을 텐데?
그리고 설마, 아기 서현이나 어린이 서현이나, 소녀 서현이가 아주 사소한 잘못을 했다고 쳐도, 저 예쁜 눈으로 ‘죄송해요’라고 바라보면 누가 혼을 낼 수 있겠어?
“그래도 엄마한테는 많이 혼났어요. 아빠가 안 계시니까, 아빠 역할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겠지만.”
응? 아버님이 안 계신다고?
“아버님이…?”
“제가 세 살 때 돌아가셨어요. 유럽 출장 중에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 작게 미소 짓는다.
지금까지 보여주던 서현 씨의 미소와는 확실히 다른, 처연함이 묻어나는 그런 미소를.
“사실 전 잘 기억 안 나요. 아주 어릴 때 일이라서. 검은 한복을 입고, 장례식장에서 놀았던 기억 정도만 뜨문뜨문 남아있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서현 씨도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저보다 엄마나 오빠가 많이 힘들어 했을 거예요. 할아버지도 그렇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편을 잃은 슬픔, 자식을 잃은 슬픔, 더군다나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상실감의 깊이는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절대 알 수 없다.
“아무튼, 할아버지는 그런 손녀가 불쌍했는지, 세상에서 가장 좋은 할아버지가 되어주셨어요. 어리광은 다 받아주고, 한 번도 혼난 적도 없어요. 아. 꿀밤은 한 번 맞아봤어요. 얼마 전에.”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뭐 즐거운 추억이라도 떠올렸는지 작게 웃는다.
할아버지에게 꿀밤 맞은 기억이 즐거울 수도 있는 건가 싶지만, 일단 넘어가고.
“오빠도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오빠였어요. 친구들 오빠 보면 맨날 여동생 괴롭히고 그런다고 그랬는데, 우리 오빠는 동생 부탁은 뭐든지 다 들어주는 착한 오빠였어요. 뭐, 나이 차이가 많이 나기도 하고, 아마 오빠도 아빠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겠죠?”
서현 씨 오빠. 강우현. 그 형님.
내 머릿속에 딱딱한 강우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분하고는 몇 번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었지만, 개인적인 대화는 아니었지.
다 어떤 목적이 있는 대화였었고, 그분 얼굴만큼 딱딱한 대화였었다.
그렇게 기본 베이스가 깔리니 아무리 그분 얼굴을 재구성해도, 우리 여동생 오구오구 우쭈쭈쭈 하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가는데?
“유일하게 엄마가 좀 엄했어요. 어릴 때는 그게 좀 속상하고 야속하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의 마음이라는 그런 것이겠지.
“사람을 보면 그 가족을 알 수 있다고 했어요. 서현 씨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우신 걸 보면 어머님도 참 마음이 깊은 분이시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나는 미래의 장모님이 되실지도 모르는 서현 씨 어머님을 상상하면서 그렇게 말했다.
분명 아름다운 분이시겠지.
한 번도 뵙지 못했지만, 분명 마음이 아름다운 분이실 거다.
서현 씨 어머님이니 미모도 대단하시겠지. 그러고 보니 강우현 그분도 겁나 미남이잖아.
“엄마에게 전해 줄께요. 작은 어르신이 그렇게 말해주셨다고 하면 엄마도 분명 기뻐할 거예요.”
“…어머님이 알고 계세요? 저에 대해서?”
내 말에 서현 씨가 싱긋 웃는다.
“당연히 아시죠. 딸과 동거하는 남자인데,”
동거라는 단어에 본능적으로 몸이 굳어 버린다.
하지만 다음 이어지는 서현 씨의 말에, 굳어 버린 내 몸에 전류가 흘렀다.
“한수 씨도 얼마 전에 만나보셨어요. 우리 엄마.”
내가 만나 뵈었다고? 장모님, 아니 서현 씨 어머님을? 얼마 전에?
“네? 제가요?”
“네.”
“언제요?”
나는 머릿속으로 재빨리 예전 기억들을 스캔했다.
중년 여성, 서현 씨 어머님 후보가 될 만한 중년의 아름다운 여성분을 스캔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설마….”
“설마?”
“요리연구가 선생님…?”
내 말에 서현 씨가 웃으며 말한다.
“정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