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내 말에, 박승환은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만 있을 뿐.
이 자식은 나한테 대체 뭘 기대 한 거야?
내가 ‘이놈! 어찌 네놈이 감히! 천벌을 받아야 생각을 바꿔먹겠느냐! 영겁의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당장 이 작은 어르신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거라!’ 같은 대사라도 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야. 나도 마찬가지야.”
말없이 날 바라보고 있는 승환이에게 내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불러서 고향 갔더니 갑자기 다음 수호신이라고 그러지. 중앙그룹 강 회장님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지. 갑자기 이사 가라고, 짐 다 옮겨놨다고 해서 따라갔더니 한류스타가 사는 초호화 주상복합이지. 한도가 수천만 원인 신용카드에 삼각별 그려진 자동차 키도 내 꺼라고 주는데, 내가 무슨 생각했을 것 같냐? 무슨 길 가다 5만 원 지폐 주운 것도 아니고, ‘아싸. 오늘 갸꿀!’ 이랬을 것 같아? 니가 아는 내가 그런 놈이냐?”
승환이는 계속 말없이 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나도 그런 승환이를 바라만 보았다.
너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 이야기를 진행하지 않겠다. 그런 눈빛을 담아서.
“아니. 그럴 사람은 아니야.”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박승환이 작게 고개를 가로젓는다.
“올해 4월이었어. 할아버지에게 그 이야기 듣고, 강 회장님 만나고, 이사 가고, 돈벼락 맞은 게. 나 안 바꼈잖아. 바뀐 거 하나도 없잖아. 내가 돈 많다고 잘난 척하고 그랬냐? 학교에 삼각별 끌고 간 적 있어? 없어. 나 그런 적 없어. 그대로야. 예전 그대로야.”
승환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능력도 마찬가지야. 내가 무슨 야동 속 남자 주인공도 아니고, 그런 능력이 생겼다고 막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랬을 것 같아? 물론 상상을 안 해봤다, 그런 이야기는 아니야. 솔직히 남자라면 그런 생각할 수 있잖아. 이건 너도 인정해야 해.”
내가 아는 박승환이라면, 이 녀석도 나처럼 시간 정지나 투시나, 뭐 그런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으로 무궁무진하게 활용이 가능한 능력이 생겼다고 해서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동을 할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상상은 할 거다. 내가 했던 상상보다 더욱 과격하고, 더더욱 비윤리적인 상상을 말이지.
“하지만 그런 상상을 실제로 현실화하려고 해본 적은 없어. 이거는 할아버지를 걸고 맹세할 수 있어. 단 한 번도. 상대방이 인지하든 인지하지 않든 상관없이, 나의 욕망 실현이 타인의 인권을 침해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진철이 형 아버님, 그거 사회상규에 어긋나는 행위 아니잖아. 사물함? 관계자인 나와 지연이에게는 이득이고, 다른 이에게는 피해가 없잖아, 그게 내 저열한 욕망을 채운 것은 아니잖아. 난 그 부분에서는 당당해. 할아버지 앞에서도 그랬고.”
솔직히 난 능력 사용에 관련해서는 당당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다.
“서현 씨도 마찬가지야. 서현 씨가 그랬어. 같은 집에서 머물겠다고. 날 모실 거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좋아했을까? 어? 어떻게 생각해? 네가 아는 한수라는 놈은 마냥 좋아했을 거 같아? 다음 날 어땠는지 알아? 출근 복장 갖춰 입고서, 내 아침밥 차리고 계시더라.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 출근도 안 하고.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같이 살고 싶지 않다고 했어. 몸종이 주인 모시는 것 같은 그런 관계라면 난 싫다고.”
-저는 서현 님과 같이 살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때 서현 씨 눈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었지.
“나를 위해, 아니, 내가 아닌 누구라 하더라도, 누군가를 위해 다른 누군가가 희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게 맞지. 조선 시대도 아니고, 지금 21세기에는 당연한 이야기지. 내가 아니라 할아버지라도, 할아버지가 아니라 그 누구라도 용납할 수 없다고.”
승환이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하숙집 주인 할머니가 그랬어. 같은 지붕 아래에서 잠자고, 식탁에서 마주 보고 앉아 밥 먹으면 식구라고. 꼭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아도,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면서 오늘 하루는 어떠했는지, 내일은 어떠한지,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식구라고. 내가 서현 씨에게 그랬어. 그런 식구라면 나는 상관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인이 주인님 모시듯 하는 절대적 상하관계라면 내가 싫다. 나는 같이 살지 않겠다.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나도 모르게 소리가 커진다.
화를 내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서현 씨에 관한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머리가 뜨거워졌다.
나는 잠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진정해. 진정하자. 한수야.
숨을 들이마시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담배나 한 대 피자.”
내가 말했다.
***
양재천변 산책로에서 나온 우리 두 사람은 가까운 편의점으로 갔다.
나는 담배 한 갑을, 승환이는 음료수를 사 들고 우리는 도롯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음료수를 마셨다.
니코틴이 들어가니 바로 머리가 핑하고 돈다.
그동안 잘 참았는데, 결국 또 피우게 되네. 이거, 신력으로 금연 할 수 없을까?
아무튼 니코틴 덕분인지, 아니면 잠시 분위기를 바꾼 덕분인지, 열이 올랐던 머리가 조금은 식는 기분이 든다.
“다른 건 몰라도 서현 씨에 관한 질문은 친구 박승환이라면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아니, 질문이 문제가 아니라 방식의 문제라고 할까. 물론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야. 내가 너의 입장이었어도 먼저 서현 씨를 떠올렸겠지. 하지만 그 질문보다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수는 없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조금은 차분해진 목소리로 승환이에게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승환이가 솔직하게 사과한다.
“이해는 해. 친구라는 녀석이 갑자기 작은 어르신이라고 전직해 나타났으니. 그냥 전직도 아니고, 무슨 전근대 시대 신분제 사회의 대감마님 댁 도련님 같은 존재라고 하니 혼란스러웠겠지.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숨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물론 들었겠지. 나도 널 처음 봤을 때 그런 생각을 했었으니까. 하지만 너도 몰랐고, 나도 몰랐어. 이건 팩트. 맞지?”
“그래. 팩트.”
승환이가 말한다.
“그리고. 작은 어르신이고 어쩌고, 그런 거. 나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상황이야. 애써 무시하고는 있지만, 혼란스럽고, 또 두렵기도 하고. 두려워. 내가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 할까봐.”
승환이가 날 바라본다.
“스물한 해를 시골 작은 책방이 수입원의 전부인 가난한 집 장손으로 살았어. 너도 옆에서 봤잖아. 장학금 타겠다고 시험 기간마다 피똥 싼 거. 알바도 꼬박꼬박했지. 지금도 하고 있고. 갑자기 중앙그룹이 내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사고 싶은 거 다 살 수 있고,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실감도 안 날뿐더러 나는 작년하고 그다지 많이 바뀐 것 같지는 않아. 장학금 타겠다고 작년처럼 공부하지는 않지만, 그거 빼면 작년에 나나, 지금의 나나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모르지,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니가 보기에는 어떠냐? 나 좀 변했냐?”
“아니.”
“그치? 쉽게 변하지 않고 싶더란 말이지. 지난 20년을 한수로 살아왔으니까, 앞으로도 한수로 살고 싶더라고. 나답게.”
“너답게?”
“그래. 나답게. 모르지, 나중에 미쳐 가지고 정신 못 차리고 아방궁을 꾸려서 거기다가 이것저것 다 깔아놓고 플렉스 하고 있을지. 아무튼, 지금은 그냥 살아왔던 것처럼 살고 싶어. 중심 잡고. 나답게.”
내 말을 들은 승환이는 고개를 끄덕인다.
“너도 많이 혼란스럽겠지. 아니, 어쩌면 더할지도 모르겠네. 아버님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거기다가 고작 이틀 밖에 안 지났으니, 아마 지금은 나보다 네가 더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어. 하지만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하나뿐이야. 어제 그 일이 있었다고 해서, 내가 알던 박승환이 지금 박승환과 다른 사람은 아니라는 거.”
“….”
“나는 네가 아는 그 한수야. 너도 내가 아는 그 박승환이고. 어른들이 무슨 말을 하든, 어떤 결정을 내리든 나는 전혀 상관 안 해. 안 하려고. 그냥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살아왔던 대로 그렇게 살려고. 나는 정말로 그럴 생각이야. 니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모르겠지만, 솔직한 내 심정을 말하면 너도 중심을 잘 잡았으면 좋겠다 싶다. 이로써 내 할 말은 여기서 끝. 아, 한 가지 더. 앞으로 그런 유치한 이야기 하지 말고.”
“…유치한 이야기?”
“그래 이 자식아. 너 아까 뭐랬냐? 진짜 모습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위장 용도로 친구들을 사겼다고?”
내 말에 승환이 녀석이 고개를 숙인다. 지도 알겠지. 유치한 소리 했다는 거.
“이 녀석들을 친구로 삼아야 되겠다. 그렇게 니가 결정하면 친구가 되는 거냐? 친구는 그렇게 되는 게 아니야. 우리도 널 친구로 선택한 거라고. 그리고, 우리가 멍청이라서 가면 쓴 박승환이 가식적으로 친구를 만드는 것도 모르고, 니가 보여주는 모습에 속고 있는 것 같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거, 특히 친구나 연인처럼 자발적인 감정을 기반으로 하는 그런 관계는 억지로 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우리가 보는 너의 모습이, 니가 보여주는 모습 말고, 우리가 보는 모습이 바로 박승환이라고.”
“보여주는 모습 말고, 보는 모습.”
“그래. 우리가 우리 눈으로 바라보는 모습. 니 말대로 가면을 쓰고 있었다면 우리가 몰랐을 것 같아? 우리에게 안 걸렸을 것 같아? 너의 말 그대로 필요에 따라 친구를 만들려고 했다면, 우리가 눈치 못 챘을 것 같아?”
“….”
“그 통장. 이비자 클럽 투어 가겠다고 모아둔 그 통장. 그거 왜 건넨 건데? 나한테 빚을 지워두겠다는 계산 하고서 그 통장 가져온 거야? 그리고 그렇게 죽을 만큼 싫어하는 아버지에게 고개 숙이면서까지 기훈이 할머니의 보호를 요청한 이유는 뭔데? 나중에 나하고 기훈이를 써먹기 위한 포석이었던 거야?”
“….”
“그리고, 가장 말이 안 되는 게, 나중에 도움 되는 친구가 필요했으면 다른 놈들을 골랐어야지, 그놈들을 고른다고? 야. 박찬희야. 이중훈이야. 김창회라고. 지금도 도움 안 되지만 나중에는 도움 될 것 같아? 안 돼. 도움 안 되는 놈들이야. 니가 도와줘야 하면 모를까.”
“…그러네.”
박승환이 쓰게 웃으면서 그렇게 말한다.
“에휴. 아무튼, 정리하자면 니가 많이 혼란스럽겠지만, 나도 아직 많이 혼란스럽다고. 그래도 나는 나이고 싶고, 니가 알던 예전에 그 한수와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 달라 이거야. 나는 내 나름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고, 또 할 거니까 너도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란 얘기고. 기왕이면 너도 내가 알던 박승환이었으면 좋겠고.”
승환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야. 집에나 가자. 서현 씨한테 혼나겠네. 금방 들어간다고 했는데.”
내가 그렇게 투덜거리자, 박승환이 날 보며 웃는다.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자조적인 웃음이나 쓴웃음과는 다른 웃음이다.
“왜 웃는데? 뭐 더 할 말 있어?”
“할 말. 있지..”
승환이가 말한다.
“뭔데.”
“하지 마. 그거.”
“뭘?”
“육성으로 ‘시간아 멈춰라’ 그렇게 말하는 거. 졸라 구려.”
그렇게 말하는 박승환은 내가 알던 그 박승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