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 하고 싶은 대로
레귤러 사이즈의 피자 한 판, 콜라 1.25L, 보이는 것보다 양이 상당한 오븐 스파게티와 마늘 빵 4개를 서현 씨와 내가 다 먹어치웠을 때, 타이밍 좋게 영화도 끝이 났다.
마치 옛날 성룡 영화처럼 NG 장면이 이어지는 엔딩 크레디트까지 다 보고 나서야 서현 씨와 나의 즐거운 점심식사가 마무리 됐다.
아주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기대 이상이었다. 배달음식, 특히 프랜차이즈 피자집에 대한 편견을 깨는 계기가 될 정도로.
“사과해야 되겠는데요.”
“네?”
“그동안 피자는 밥이 아니라고, 특히 배달 피자는 패스트푸드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그런 편견을 박살 내는 너무 만족스러운 한 끼였어요. 피자 프랜차이즈에 사과해야 할 것 같이요.”
“다행이네요. 한수 씨가 맛있게 드셨다니.”
“맛도 맛이지만, 조합이 좋았다고 할까요? 편한 복장으로, 편한 거실에서 배달 피자와 넷플릭스, 어쩌면 진짜 일요일 점심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한 끼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복한 점심이었어요.”
예전에 선배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머리가 복잡한 일이 있을 때 자기는 일단 걷는다고. 생각이라는 것이 눈 감아 시선 차단하듯 생각을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의지로 조절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니까, 두뇌는 그냥 생각하라고 냅두고 한강 같은 데 가서 한 대여섯 시간 동안 걸어버린다고. 그렇게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몸도 지치고, 배도 고파지고, 그 타이밍에 집으로 가서 밥 먹고 씻고 누우면 고민하던 것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진다고.
뭐, 한강을 대여섯 시간 걸은 것은 아니지만, 배부르고 등 따시니 할아버지고, 사주(四柱)고, 작은 어르신이고, 유 선생님이고 뭐고, 요 이틀 동안 내 머리를 아프게 했고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들이 말끔하게 씻겨 내려간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양이 부족하지는 않아요?”
“부족하다니요. 설마요.”
다시 말하지만, 서현 씨와 나. 우리 둘이서 레귤러 사이즈의 피자 한 판, 콜라 1.25L, 오븐 스파게티 1개와 마늘 빵 4개를 해치웠다.
서현 씨가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이 드시기는 했는데, 그래도 먹은 양으로 따지면 내가 훨씬 더 많이 먹었다.
“너무 많이 먹었어요. 식곤증 때문에 꾸벅꾸벅 졸겠는데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서현 씨의 눈빛이 반짝하고 빛난다.
응? 반짝?
“졸려요?”
“네. 이대로 누우면 내일 아침까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주무세요.”
“네?”
“낮잠 자면 되죠. 일요일인데,”
서현 씨는 그렇게 말하고는 싱글생글 웃는다.
“에이. 그럴 수는 없죠. 일요일인데.”
오늘은 서현 씨를 위해 이 한 몸 바쳐 봉사하기로….
잠깐만. 이거 혹시?
“저도 졸려요. 낮잠 자고 싶네요. 우리 한두 시간 정도 낮잠 잘까요?”
서현 씨가 그렇게 말한다.
‘우리’라는 말과 ‘잘까요?’라는 말 때문에, 미니미 해면체에 피가 급격하게 몰린다.
그런 의미가 아니야!
그렇게 소리쳐 보지만 이놈의 부교감 신경은 눈치 없이 미니미를 깨워 버린다.
아니야. 아닐 꺼야. 같이 자자는 이야기가 아닐 거야. 각자 방에서. 그런 의미지.
우리 아직 손 밖에 못 잡아 봤는데, 포옹도 못 해봤는데,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진도를 빼자는 의미가 아니겠지. 아니지. 혹시? 어쩌면?
그렇게 진행되던 망상이 어느 순간 뚝 하고 멈추었다.
예전에 서현 씨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낮잠은 최대한 피하려고 해요. 지금 당장 쓰러질 정도로 피곤하지 않은 이상, 해가 떠 있는 동안 눕거나, 낮잠을 자거나 하고 싶지는 않아요. 차라리 일찍 잠들면 잠들었지.
할아버지, 강 회장님의 규칙 중 하나이고, 서현 씨는 그 규칙이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자신도 따르고 있다고. 덕분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불면증이라는 걸 겪어본 적이 없다고.
그런 서현 씨가 낮잠을 자고 싶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서현 씨의 표정이나 눈빛 어디에서도 피곤함 같은 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데.
나는 그런 서현 씨의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거였구나. 그런 그림을 그리고 계셨던 것이었구나.
***
서현 씨가 처음 배달음식, 중국 음식 이야기를 꺼냈을 때만 해도, 그저 나를 해장시키려는 목적인 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 자상한 서현 씨의 계획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점심밥을 먹이고, 낮잠을 재우는 것까지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내 옆에 앉아서 ‘왜요? 오늘 일요일이잖아요. 그냥 낮잠 자면 되는데.’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이 아가씨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며칠 사이에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과 가장 친한 친구가 사실은 자신을 모시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 내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를. 그리고 어제 새벽에서야 설치듯 잠든 내가 얼마나 피곤했을지를.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배달음식으로 포만감과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가벼운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낮잠을 재우려고 하는 것이다.
알고는 있었다.
서현 씨가 날 위해서 많은 것을 해주고,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어제만 해도 그렇다. 새벽까지 서현 씨는 날 기다려주고 있었다. 그 늦은 시간까지 거실 소파에 앉아 읽히지도 않는 책을 들고서 나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내가 집에 들어갔을 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반겨주고, 혹시라도 배가 고프지는 않은지, 목마르지는 않은지 물어봐 주었다.
나라면 궁금했을 거다. 그 늦은 시간까지 무엇을 했는지, 승환이와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물어봤을 것이다. 내가 서현 씨라면 간단하게라도 물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서현 씨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금도 묻지 않는다.
그저 날 위해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런 서현 씨를 보면서 나는 어제의 승환이가 떠올랐다.
강서현과 박승환.
가장 가까운 곳에 있고, 나에 대해 알고 있는 두 사람.
“어제 승환이가 그러더라고요.”
나는 서현 씨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를 모시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고.”
***
“나는 너를 모시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승환이가 내 눈을 보며 말했다.
“아까 내가 그랬지. 내 나름대로 정리를 했고, 그 정리한 것을 말해주겠다고. 이게 내가 정리한 결론이야. 나는 너를 모실 생각은 없어. 네가 어떤 존재고, 나에게 부여된 의무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나는 절대로 너를 모시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나는 말 없이 승환이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확신이 필요했어. 너라는 사람에 대한 확신. 너라는 사람이 그 날, 그 장소에서 그렇게 만나기 전까지 내가 아는 그 한수인지, 내가 친구라고 생각하는 한수가 맞는지 확신이 필요했어. 그래서 질문을 한 거고.”
승환이가 말했다.
“확신에 따라 방법이 달라진다고 했지. 내가 쓰레기 같은 답을 했다면 단 한 문장으로 끝났을 거라고 했고.”
내가 말했다.
“그래. 한 문장. 너를 모시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 한 문장.”
“오답은 아니었나 보네. 긴 이야기를 해준 것을 보니.”
승환이가 작게 웃고는 계속 말을 잇는다.
“경식이 이후에도 친구라는 이름의 녀석들이 내 주위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 이야기를 해줘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경식이 이후에 친구라는 것은 적당한 친분, 적당한 거리, 나중에 도움이 되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고. 그 정도 존재에 불과했지.”
승환이가 그렇게 말한다.
평소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면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이렇게 삐뚤어졌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한마디 했겠지만, 승환이의 지난 이야기를 들은 지금 상황에서, 승환이가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대학 들어와 친구를 사귀게 된 것도 같은 이유였지. 아니, 한국대 출신 친구들이라면 나중에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된다. 그런 계산이 있었지. 그러다 널 만나게 된 거지.”
거기까지 말한 박승환은 잠시 말없이 날 바라본다.
“우연이야?”
승환이가 물어본다.
“같은 학교, 같은 과?”
박승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내가 선택했어.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고. 사실 고2 때까지 내 고등학교 성적을 생각하면 한국대는 기적이지. 그리고 이건 확실히 말할 수 있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나를 위해서 성적을 조작해주고 그럴 사람이 아니야. 손자를 위해 다른 수험생에게 피해가 가는 행동을 할 그런 사람은 아니야.”
내가 말했다.
박승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믿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유 선생님을 흠모해 우리 과를 선택했다는 것은 저 녀석도 알고 있겠지.
“특이한 녀석이었어. 처음부터 자꾸 눈에 들어왔지. 너는.”
승환이가 말한다.
“엄마, 아빠는 어릴 때 돌아가셨고, 지금은 할아버지와 살고 있다. 그렇게 소개하는 너의 모습에서 경식이가 떠올랐어. 마치, 마음속에 어둠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당당한 너의 모습에서 경식이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날이 떠올랐어.”
“거기에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는 부분도 작용을 했을 테고.”
내 말에 승환이가 다시 작게 웃는다.
“그래. 그 부분도. 확실히 작용을 했지. 아무튼 그렇게 너희들을 알게 되었고, 친구라는 이름으로 뭉쳐 다녔지. 그렇지만 너희들을 완전히 친구로 생각했냐고 물어보면 너희들과 같은 마음이었다고 말해줄 수는 없어. 적당한 거리감, 내 진짜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너희들을 대했어.”
나는 지난 1년 반 동안의 승환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특이한 녀석. 재미있는 녀석. 어딘가 모르게 무서운 녀석. 승환이에 대한 친구들의 평가였다.
“그랬는데, 어제, 아니, 자정이 지났으니 그제가 되겠네. 그제 그곳에서 널 만났을 때, 내가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알아? 배신감. 널 봤을 때, 네가 작은 어르신이라는 존재이고, 내가 혐오해 마지않는 그 사람의 뒤를 이어 너를 모셔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배신감을 느꼈어.”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무슨 사이비종교 집단이었다면 오히려 안심했을지도 몰라. 뒤를 이어 교주의 후계를 모시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그저 무시해버리면 될 테니까. 넘기 힘든 성벽처럼 느껴지는 그 사람이 그저 사이비 집단의 일원, 그냥 그 정도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니까. 하지만 시간이 멈춰버렸으니, 단순한 사이비종교 집단으로 치부할 수도 없게 되어버렸고.”
시간 정지 대신 카드 마술 같은 걸 보여줬으면 안 믿었겠지.
“그리고 네가 쓰레기같이 나왔으면, 우리 둘 사이에 관계가 바뀌었으니까 윗사람처럼 굴려고 했다면, 만약 서현 씨를 여러모로 착취하고 있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했을 필요도 없었겠지.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주인만 보면 꼬리를 흔드는 개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으니까.”
“…개는 좀 그렇지 않냐? 북한도 있고, 다른 것도 있는데.”
“불쾌하다면 사과할게. 하지만 그 당시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개였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야.”
“뭐. 가장 직관적인 비유이기는 하지.”
“자꾸 말이 길어지네. 슬슬 정리하자면 그래. 배신감을 느꼈어. 아이러니하게도 필요에 의해 친구들을 만든 내가, 나의 진짜 모습을 위장하기 위해 친구들이라는 위장막을 이용한 내가, 진짜 내 모습을 감춘 채로 가면을 쓰고 있던 내가 너에게 배신감을 느꼈어. 자격이 없다고 생각은 했어. 하지만 확인을 하고 싶었어. 내가 알고 있던 한수가 맞는지. 그걸 확인하고 싶었어. 그리고 내가 직접 말해주고 싶었어. 나는 너를 모시거나 하지는 않을 거라는 말을 직접 해줘야겠다 싶었어.”
그렇게 말하고 날 바라보는 승환이의 눈에서 무언가 후련하다는 그런 기분이 느껴진다.
요 하루 사이에 자기 나름대로 고민을 했나 보다. 나름 마음고생을 했나 보다. 저런 눈빛인 거 보니까.
승환이의 말을 들은 내 대답은?
하나뿐이지.
“난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폼을 잡나 했네. 뭐, 그래. 그렇게 해.”
이게 내 답이다.
“…뭐?”
“그렇게 하라고. 너 하고 싶은 대로.”
승환이는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