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28화 (128/271)

128 : 일요일 점심에는 ‘배달 피자’

일요일 아침.

내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20분. 평소보다 2시간이나 늦은 기상 시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어제 집에 들어온 시간이 새벽 3시에 가까웠으니까.

자정 즈음에 서현 님의 전화를 받았고, 너무 늦지 않게 들어가겠다고 약속했건만, 결국 그렇게 늦은 시간이 되어 버리고야 말았다.

승환이가 해준 이야기는 중간에 끊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는 이미 새벽 2시를 넘어 버렸다.

매봉터널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독일에서 태어나셨다면 슈마허의 좋은 경쟁자가 되셨을지도 모를 택시기사님이 강남을 가로지르고, 한강을 건너 성수동 집에 도착하는데 12분이라는 새로운 트랙 레코드를 기록했지만, 이미 시침은 2보다는 3에 가까워 있었다.

거실에 있던 서현 님에게 인사하고 가볍게 씻고, 바로 침대에 누웠지만, 바로 잠들지는 못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으니 당연하겠지. 그렇게 30여 분 뒤척거리고, 찝찝한 꿈을 꾸고, 지금 일어난 거다.

잠을 잤는데도 피곤하다. 피곤이 풀리기는커녕 더 쌓인 느낌이다.

나는 침대에 누워있는 자세 그대로, 몸을 풀면서, 어제 하루 동안 일어난 일들을 다시 복기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유 선생님 전화를 받았고, 학교에 가서 선생님과 점심을 먹었고, 진철이 형이랑 수정이 누나랑 수상쩍은 모습도 봤지, 도서관 갔다가 찬희를 만났고, 묘령의 여성과 함께 있는 창회를 보았고, 저녁 먹으러 갔다가 후배들을 만났고, 집에 가다가 승환이의 전화를 받고,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눴지.

참으로 버라이어티한 토요일이었네. 어제 하루에만 만난 사람이 몇 명이야?

보자. 아홉이네. 아니, 서현 님까지 포함하면 열 명이다.

서현 님은 그 늦은 시간까지 날 기다리고 계셨다. 손에 책을 들고서 소파에 앉은 채로.

-책을 보다 보니 이 시간이 되었네요.

서현 님의 말이었다.

거짓말이다. 신력 따위는 쓰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는 거짓말이다.

나는 서현 님의 그런 거짓말이 너무 미안해서, 그저 잘 자라는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생각할수록 미안하네.

***

침대에 누워 그렇게 10여 분을 더 뒹굴거리다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빈둥거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지.

오늘은 정해진 일정이 있다.

서현 님과 점심 먹고, 서현 님과 차 마시고, 서현 님과 산책하고.

나 때문에 우리 서현 님 어제 제대로 주무시지도 못했는데, 내가 우리 서현 님에게 보답하는 방법은 오늘 최대한 알찬 일정을 짜서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일요일을 안겨드리는 것뿐.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고 있을 시간은 없다.

일단 정신이라도 차리게 물이라도 마시자는 생각으로 방문을 열고 나가니, 서현 님은 이미 소파에 앉아 계신다.

“벌써 일어나셨어요?”

서현 님이 문 열고 나오는 날 보고 반갑게 말씀하신다.

“네. 서현 씨도 일찍 일어나셨네요.”

완벽한 모습의 서현 님을 보면서 내가 말했다.

일요일 아침인데 서현 님이 출근 모드로 풀착장을 했다거나, 풀메이크업을 했다거나 그런 의미는 아니다. 편안한 홈웨어에 아마도 쌩얼? 아닌가? 옅은 화장?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일요일 오전에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모습을 하고 계신다.

자연스러운 모습이지만 서현 님은 그 존재만으로도 완벽하시다는 말씀.

“더 주무시지. 혹시 출출하셔서 깨신 거예요?”

서현 님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다.

그 동작 안에는 ‘너에게 먹을 것을 만들어 주겠어’라는 의미가 다분히 담겨 있다.

“아니에요. 충분히 잤어요. 배 안 고파요. 고파도 조금만 있으면 점심 먹을 시간인데 지금 뭘 먹기는 그렇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시계와 서현 님을 번갈아 보았다.

“그렇네요. 좀만 있으면 점심 먹을 시간이네요.”

서현 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이야기 나온 김에, 오늘 점심 어떻게 할까요? 뭐 드시고 싶은 거 있으세요?”

내가 서현 님에게 물었다.

우리 부처님 같은 서현 님은 ‘한수 씨 드시고 싶은 거요.’ 이렇게 말할 것이 뻔하지만, 오늘 사죄하는 마음으로 서현 님을 모시려면 최대한 정보를 모아야 한다.

하지만 서현 님의 대답은 내 예상과 달랐다.

“배달음식 어떠세요? 중국 음식 같은 거.”

나는 순간적으로 서현 님의 말에 반응하지 못했다.

내 기억으로 서현 님이 이렇게 먼저 의견을 제시한 적은 없었다.

아니, 그것도 그거고, 배달음식? 중국 음식?

“중국 음식 싫으시면 피자는 어때요? 오븐 스파게티도 같이.”

내 무반응이 거절이라고 오해했는지, 서현 님이 재빨리 요리의 국적을 바꿔버린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이 언니가 혹시?

나는 소파로 다가가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서현 님과 눈을 맞췄다.

“중국요리 드시고 싶으세요?”

“네. 오늘은 어쩐지 중국 음식이 먹고 싶은데요? 짬뽕 같은 거.”

짬뽕? 서현 님이 짬뽕?

“서현 씨는 매운 음식 안 좋아하시는데….”

“그럼 저는 짜장면.”

“안 드시잖아요. 느끼해서.”

“잘 안 먹는 거지, 절대 안 먹는 건 아니에요.”

서현 님의 거침없는 대답.

나는 그런 서현 님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이 언니 준비했구나. 우리 서현 씨. 예상 질문을 뽑아 대답을 준비하고 있었어.

“저 속 괜찮아요.”

내가 말했다.

“네?”

“어제 술 많이 안 먹었어요. 승환이하고도 커피 마시고, 계속 산책했고, 집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술 다 깬 상태였어요. 저 속 완전 괜찮음. 해장을 위한 국물 같은 건 필요 없어요.”

서현 님은 말없이 날 바라보고 계신다.

“솔직히 짬뽕 좋죠. 해장하고는 상관없이 짬뽕은 언제나 환영이에요. 만약 서현 씨가 진짜로 중국 음식이 먹고 싶다면, 평소에는 기름져 그다지 좋아하지 않은 짜장면이 먹고 싶은 그런 날이라면 저도 오케이. 하지만 혹시라도 나 해장시키기 위한 의도라면, 저는 짬뽕 안 먹을래요.”

날 바라보는 서현 님의 눈빛은 평상시와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그 눈빛 안에 ‘들켰어. 이제 다 틀렸어.’라는 감정이 느껴지는 것은 단지 기분 탓일까?

“꼭 배달음식을 시켜야 한다면 피자가 좋기는 한데…. 꼭 피자를 먹어야 한다면, 배달 대신 밖에 나가서 더 맛있는 피자집을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일요일 점심이니까?”

일요일 점심식사는 단순히 영양분 공급행위가 아니다. 나가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가볍게 산책도 하면서 데이트 비슷한 걸 하는 일종의 의식이란 말이지.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떻게요?”

“피자는 배달시키는 걸로. 피자 먹고, 같이 영화 보다가 저녁을 나가서 먹는 건 어떠세요?”

서현 님의 제안이다.

“네. 저는 상관없어요. 서현 씨가 좋으면 저도 좋아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지만, 서현 씨가 왜 점심을 집에서 먹자고 고집하는지 선뜻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

밖에 비라도 온다면 날씨가 나빠서 나가기 싫구나,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밖에 날씨는 아주 끝내주는데 말이지.

“그럼 바로 주문할까요?”

서현 님이 전화기를 집어 들며 묻는다.

“배고프세요?”

“아니요.”

“그럼 조금 있다가 주문할까요? 아니다, 점심시간이니까 밀릴 수도 있겠구나. 제가 예약 주문할께요. 12시 반 정도에 도착하는 걸로 해서. 어떠세요?”

“네. 저는 좋아요.”

서현 님이 좋으면 저도 좋아요.

“그런데, 한수 씨, 그때까지 출출하지 않으시겠어요? 아침도 안 드셨는데?”

“괜찮아요. 매일 먹는 것도 아니고. 우유라도 한잔 마시면 괜찮겠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서현 님은 뭔가 생각난 듯, 잠시만요, 하면서 주방으로 도도도 걸어간다.

그리고 몇 분 후, 서현 님의 우유가 담긴 쟁반을 들고 다시 거실로 돌아온다.

아니, 진짜, 그러지 마시라니까. 이런 모습 남들이 보면 오해한다니까요? 승환이처럼? 내가 서현 님 막 부려먹고 그러는 줄 안다니까요?

“일단 이거라도 드세요.”

서현 님이 그렇게 말하며 쟁반을 내려놓는데….

쟁반 위에는 우유가 담긴 유리컵뿐만 아니라. 무언가가 올려져 있다.

“…한과?”

“네, 드셔보세요.”

거기에는 그저께, 할아버지 집에서 맛보았던, 그 환상적인 맛의 한과가 놓여 있었다.

***

우리는 거실에 앉아 피자를 먹으면서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았다.

처음 서현 님이 넷플릭스에서 같이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했을 때, 순간적으로 내 맥박수가 빨라졌었다.

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관용구 있잖아. ‘라면 먹고 갈래요?’ 그거. 그 관용구의 영어식 표현이 ‘넷플릭스 앤 칠(netflix and chill)’이잖아.

칠리는 아니지만, 비슷한 피자가 있으니 ‘넷플릭스 앤 핏자’ 시츄에이션이고.

우리 유학파 서현 님이 설마 ‘넷플릭스 앤 칠’을 모르지는 않으실 테고, 설마 일요일 대낮부터 이리도 대담하게?

그런 생각을 잠깐 했었지만 그냥 영화 보자는 거였다. 그냥 영화도 아니고, 피자에 대한 영화.

리틀 이태리 동네에서 각기 다른 피자집을 운영하는 원수 같은 두 집안의 아들과 딸이 서로 한눈에 반한다는 미국영화.

서현 님은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하는데, 나는 아다치 선생님의 러프가 떠오르네.

아무튼, 뭔가 B급 감성 충만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면서 서현 님과 미국식 배달 피자를 먹었다.

서현 님 이야기로는 대학 다니던 시절에 중앙그룹, 정확히 말하면 현재는 중앙그룹에서 분리된 미디어 계열사가 저 영화를 만드는 제작사에 투자를 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 프로젝트를 잠깐 도왔단다.

역시 서현 님. 나는 카페에서 알바하는데, 서현 님 알바는 영화제작사 투자 프로젝트네.

아무튼 그때부터 저 제작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그러다가 나중에 저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서현 님의 기억 속에는 소중하게 남아 있었고, 오늘 피자를 먹게 되자 생각이 났고,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유학생에게 피자는 거의 소울 푸드였어요. 피자 한 판에 보통 10달러 정도 하는데, 샐러드 한 접시에도 10달러를 줘야 하니까, 가성비로 따지면 피자를 이길 음식은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았어요. 한국으로 치면 삼각 김밥에 컵라면 포지션이라고 할까요? 중국에서 온 유학생들 중에서 피자를 정말 좋아하는 친구도 있었어요. 고향에서는 피자헛에 가서 가족 외식을 했다면서, 자기에게는 절대로 피자가 정크 푸드가 아니라고, 항상 포크와 나이프를 준비해서 피자를 먹고는 했어요.”

서현 씨는 그렇게 유학 시절 피자와 관련된 추억들을, 이 영화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하는 부분을, B급 감성이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피자를 베어 물면서, 평상시에는 먹지도 않는 콜라를 ‘피자에는 오리지널 콜라죠. 제로 콜라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요’ 하면서 거침없이 꿀꺽꿀꺽 마시는 서현 씨를 보면서 어쩐지 행복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서현 씨에 대해서 조금 더 알게 되었다는 그런 기분, 그리고 더 알고 싶다는 그런 기분을 느끼며, 나는 영화보다 더 서현 씨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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