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27화 (127/271)

127 : 친구라는 확신 (3)

승환이는 그 날, 내가 제이슨에게 습격을 받은 그 날, 장영호를 보았다고 했다. 눈이 마주쳤다고 했다.

내가 원래 알던 사이였는지를 물었을 때, 승환이는 이렇게 말했었다.

-뭐, 좋은 인연은 아니고.

확실히 좋은 인연은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 16살. 친구 집이 불타버릴지도 모르는 행정대집행 현장에서 쇠파이프와 메가폰을 든 채로 험악한 말을 외치는 남자, 더군다나 그 옆에 14년 만에 나타나 아버지를 자처한 그가 서 있었다면, 절대로 잊지 못하겠지.

“할머니는 혼절하셨고, 이웃집 아저씨 몇 명은 병원에 실려 갔고, 몇몇 집은 포크레인 앞에 허물어져 내렸지만, 경식이네 집은 어떻게든 지켜낼 수 있었어. 하지만 다들 알고 있었어. 그래 봤자 몇 달, 어쩌면 며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식이는 소리 내지 않았어. 할머니와 이웃집 아저씨들이 실려 가는 구급차를 바라보는 두 눈에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그 녀석은 단 한 번도 울음소리를 내지 않았어. 그저 그렇게 서서 멀어져 가는 구급차를 바라만 보고 있었어.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처음으로, 그 초등학교 졸업식 날 이후 처음으로 내 의지로 무언가를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먹었어. 그래서 갔지. 서초동으로.”

“서초동?”

“법무법인 철주, 그 사람의 회사. 보안이 철저했어. 박기준 변호사를 만나러 왔다고, 들여보내 달라고 해도 들여보내 주지 않더라고. 내가 그 사람 아들이라고 그랬으면 바로 들여보내 줬겠지만, 죽어도 그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거든.”

“전화번호는?”

“당연히 몰랐지. 알려줬는데, 전화 할 일 없을 것 같아서 저장 안 했지.”

“일리가 있네.”

“일리가 있지. 아무튼, 그렇게 한참을 실갱이 하는데, 마침 누가 날 알아봤어. 처음 입학했을 때, 날 건드리는 세 명을 박살 내버렸을 때, 그 일을 수습하기 위해 찾아온 박 변호사의 부하. 그가 마침 거기 있었고, 날 알아봤어. 그때 알았지. 그 사람이 법무법인 철주라는 회사의 보안책임자이고, 이름은 정현식이고, 박 변호사의 오른팔이더라고. 아. 그리고 정현식 그 사람이 그때 그 사람이다.”

“그때 그 사람?”

“장영호 만났을 때, 처음 전화했던 사람. 그리고 제이슨 마약 사진 건네준 사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정현식이라는 그 사람이 박승환과 아버지 사이에서 일종에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날 알아본 보안책임자 덕분에 건물에 들어갈 수 있었고, 처음으로 그 사람 사무실에 들어가 볼 수 있었지. 책상에 앉아 거만한 얼굴로 서류를 보고 있더라고. 마치 오전에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얼굴로. 내가 다가가자 날 힐끗 바라봤어. 말 그대로 힐끗, 마치 너에게 내어줄 시간은 없다는 듯한 얼굴로.”

***

16살의 박승환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으로 눈앞의 남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눈동자만을 움직일 뿐이었다.

“뭔가요?”

“무엇이?”

“내가 해줘야 하는 역할이 무엇인가요?”

생물학적 아들에게 그런 질문을 받은 박기준 변호사는 손에 든 서류철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답은 하지 않았다. 그저 질문을 한 아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 생물학적 아버지의 감정 없는 눈을 바라보며 박승환이 말했다.

“그저 아들 역할을 해주면 되는 겁니까? 아버지를 존경하는 모범적인 아들 행세를 해주면 되는 거냐구요?”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나? 누구에게도 안 들킬 자신 없다면 그만 둬. 안 하느니만 못하니까.”

박기준 변호사가 말했다.

“그럼 무엇을 해주면 됩니까? 써먹을 데가 있으니까 데려온 것 아닙니까?”

“학업은 지금 수준을 유지해줬으면 좋겠군. 체력도 향상시킬 필요가 있고.”

박승환은 그런 박기준 변호사의 말에서, 자신이 언젠가는 진열대(陳列臺)에 오를 상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가격을 올리기 위해 품질을 높이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박승환이 말했다.

***

“조건? 어떤 조건?”

“뭐, 고작 중3짜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었겠어. 당신 돈 많으니까 경식이하고 할머니 머물 수 있는 작은 아파트 마련해 달라. 월세나 전세 말고 직접 매입해서, 혹시라도 나중에 또 쫓겨나는 일 없도록. 생활비도 마련해주고. 목돈 말고 연금식으로.”

그 말을 들은 나는 말 없이 박승환을 바라보았다.

뭐랄까, 중학교 3학년이 고안해낼 방법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면서, 그냥 중3이 아니라 박승환 이 자식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그래서 뭐라셨는데? 아버님은?”

“그 아버님 소리 듣기 굉장히 거북한데?”

“니가 이해해라. 할아버지 밑에서 유교 탈레반 전사로 자라서 그래.”

“뭐. 그렇다면. 아무튼, 내가 그렇게 말하니까,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럼 나는 팔아먹을 수 없을 거다. 상품으로서 가치가 없을 테니까. 그랬지.”

“어쩔 생각이었는데?”

“딱히 어쩌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어. 계산은 있었지.”

“계산?”

“나와 그 사람이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부자라고는 해도, 정서적인 교류는 없었지. 그런 상황에서 내가 ‘컴퓨터 안 바꿔주면 가출할 꺼야!’라고 떼 써봤자 먹히기나 하겠냐? 아들로서의 가치가 없는데. 하지만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있다고 생각했지. 가짜 할머니를 동원하면서까지 키워낸 아이를 데리고 왔다는 것이 그 증거라고 생각했어. 내가 다른 상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대체재가 없다는 거지. 갑자기 다른 아들을 데려올 수는 없을 테니까.”

“입양?”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야. 하지만 그 사람 입장에서 절대로 유리하지 않다는 계산이 나왔지. 절차도 복잡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고, 무엇보다 입양은 생물학적 연관이 없지. 1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영주에 처박아 둔 날 직접 데리러 온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했을 때, 결국 혈연이 가장 큰 요소였다고 가설을 세운 거지.”

“중3 때.”

“그때.”

16살의 박승환은 그때도 박승환이었구나.

“그래서 제안을 거절하면 너는 어쩔 생각이었는데? 혹시. 그….”

입에 담고 싶지도 않은 끔찍한 가설이 떠오른다.

“자살?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그러면?”

“일단 가출한 다음, 숙식 해결되는 알바 자리 구해서, 열심히 알바하면서 공부도 하고, 그러다 성인 되면, 대학 가던가, 상황이 안 좋으면 군대 부사관으로 가서 몇 년 정도 군 복무하고, 그렇게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면, 그때부터 착실히 준비해서 그 사람 등에 칼을 꽂아 버리겠다는 생각이었지.”

“스메르쟈코프처럼?”

“그래. 표도르는 죽어 마땅한 아버지니까. 그렇게 생각 안 해?”

“…내가 답할 수 있는 질문이 아니네. 그래서 그분은 뭐라고 하셨는데?”

“그분이 아버님보다는 괜찮네. 팔아먹을 수 없을 거다. 상품으로서 가치가 없을 테니까. 그 말에 그 사람은 딱 세 음절로 답하더라고. ‘알았다.’ 그렇게.”

“끝?”

“어. 그 사람과의 첫 번째 거래는 그렇게 끝이었어. 경식이는 인천으로 이사를 갔어. 먼 친척이 인천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 사람이 그걸 알았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인천 쪽 아파트로 이사를 갔어.”

“전학 갔겠네. 그 친구도.”

“그렇지.”

“쓸쓸했겠는데.”

“뭐, 친구 이사 간다고 질질 짜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그리고 인천 생각보다 안 멀어. 지하철 타면 한 시간 남짓이야. 주말마다 만나서 놀았으니까 쓸쓸하다는 생각은 안 들었어.”

“다행이네. 그래서 그 친구는? 요즘도 연락해?”

“요즘에는 연락이 잘 안 되고 있지.”

“왜? 무슨 일 있었어?”

“배 타거든.”

“응?”

“경식이 그 녀석 배 타. 상선. 고등학교를 해사고로 갔거든. 해사고 알지?”

“상선 선원 되는데.”

“그래. 빨리 돈 벌겠다고 해사고 갔고, 졸업하고 바로 취업해서 지금 배 타고 있어. 배 타면 연락 잘 안 되거든. 나중에 한국 들어오면. 소개시켜 줄게. 너 하고도 잘 맞을 것 같아. 술 얻어먹자. 그 자식 돈 많이 버니까.”

나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박승환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그날 이후, 그 사람하고 나는 일종의 계약 관계가 된 거지. 나는 그다지 손해 본 것은 아니었어. 공부 잘하는 아들만 연기하면 됐었으니까. 아버지를 존경하는 아들 연기까지 하라고 했으면, 아마 못했을 거야. 아무튼, 그렇게 고등학교 가고, 한국대에 입학했고, 널 만났고, 어쩌다 보니 친구가 되었는데, 알고 보니 넌 작은 어르신인지 뭔지 라고 하고, 내가 그렇게 증오해 마지않는 그 사람은 너네 할아버지 분하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내가 너 부하가 될 거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나는 한수 니가 그 사실을 알고서 접근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는 이야기지.”

“몰랐어.”

“그래. 그런 것 같다.”

“그런 것 같다가 아니라 진짜 몰랐다고.”

“알았어.”

“그런데 두 번째는?”

내가 물었다.

“응?”

“니가 그랬잖아. 그분과의 첫 번째 거래가 끝이 났다고. 그럼 그다음도 있다는 이야기처럼 들리는데?”

내 질문에 박승환이 작게 웃는다. 그 웃음이 어딘가 조금 쑥스럽다는? 그런 느낌을 주었다.

“윤기훈.”

“응?”

윤기훈? 그 윤기훈? 장영호의 지시를 받아 나를 불러내고, 폭행을 가했던 공동정범. 하지만 바다보다 깊고, 하늘보다 넓은 마음을 가진 나를 만난 덕이 용서는 물론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까지 갖게 되었지만, 나보다 김창회를 더 따르는 그 배은망덕한 그 윤기훈?

“윤기훈이 사라진 것을 알면 장영호 그 인간이 기훈이 할머니에게 해코지할 수도 있겠다 싶었고, 그래서 보호를 요청했어.”

“아버님에게?”

“실질적으로는 그렇지만, 중간에 정현식, 내가 아까 말했지?”

“아버지의 오른팔이라는.”

“그래. 그 사람을 만났어. 우리 아까 커피 마신 그 카페에서.”

“기훈이 할머니 지켜달라고.”

“그래. 그러니까 그 사람이 그러더라고. 가능은 하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은 하다. 하지만 누군가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겠지.

“조건이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 이유를 불문하고 지시 하나를 따르겠다고.”

“이유를 불문하고?”

“그래.”

나는 말 없이 승환이를 바라보았다.

승환이치고는 너무 손해를 보는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승환이는 내 눈빛을 읽어내기라도 한 듯 작게 웃는다.

그 웃음을 보며 내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설마….

“…기훈이 할머니?”

승환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밑에서 자란 박승환, 비록 가짜 할머니였지만, 그런 박승환이었기에, 기훈이의 할머니를 그냥 두고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손해 보는 제안을 한 것이고.

“어제 전화 와서 그러더란 말이지. 가야 할 데가 있다고. 당연히 거부했지. 그랬더니 그 망할 놈의 카드를 쓰더라. 그래서 거기 간 거고, 그렇게 된 거야. 널 만난 거고. 자. 이제 내가 너에게 해줄 이야기는 다 했다.”

승환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구룡마을이 있던 방향을 바라본다. 그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걸 말 안 했네. 가장 중요한 이야기.”

오늘 처음 만났을 때, 승환이가 그랬다. 생각을 해봤고, 어느 정도 정리를 했고, 나에게 말해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박승환이 천천히 말을 시작한다.

“…생각해봤는데.”

“그래.”

“나는 너를 모시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승환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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