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25화 (125/271)

125 : 친구라는 확신 (1)

“…같은 집에서?”

승환이가 나직하게 말한다.

“그래.”

내가 다시 답해주었다.

승환이는 손을 들어 얼굴로 가져간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눈두덩이를 가볍게 문지른다.

질문을 하기 위해 단어를 고르고 있는 것이다.

“같은 집에서 같이 살고 있다가 정확하겠지.”

내가 말했다.

승환이의 손이 멈춘다. 그 녀석의 시선이 날 바라보고 있다.

날 바라보는 시선이 날카롭다.

적의(敵意)까지는 아니어도 친구를 바라보는 눈빛은 아니었다.

저 눈을 보니 딱 알겠다. 이 자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고 있는지 말이지.

“같이 살고 있다고 해도 같은 방은 아니야. 각자의 방이 있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상대방의 방에 들어가는 일은 없어.”

“…특별한 일?”

“땀에 흠뻑 젖은 침대 시트를 갈아준다든가.”

나는 그렇게 말하고, 승환이에게 잠깐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땀에 흠뻑 젖은 침대 시트. 다양한 시나리오를 끌어낼 수 있는 소재 아니던가.

박승환이 ‘땀에 흠뻑 젖은 침대 시트’로 대략적인 시놉시스를 떠올리도록 몇 분을 보낸 후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얼마 전 내가 감기에 심하게 걸렸을 때, 그때 서현 씨가 내 방에 들어왔었어. 밤새 고열에 시달린다고 침대 시트가 흠뻑 젖어있었고, 그걸 갈아주기 위해서.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서현 씨가 내 방에 들어온 적은 없어. 내가 서현 씨 방에 들어간 적은 당연히 한 번도 없고.”

정확히 말하면 서현 님이 들어와도 된다고 했는데, 노크만 해달라고 했는데, 기회가 없어서 아직 못 들어가 본 거지만.

“같은 집에 살지. 하지만, 니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이상한 관계가 아니고, 일종의 하우스쉐어. 그런 관계라고. 거실이나 주방 같은 공동 공간만을 공유하고 있을 뿐, 서로의 영역은 철저하게 지킨다고. 화장실도 따로 쓰고, 밥도 번갈아 가면서 하고. 한 사람이 밥하면 다른 사람이 설거지하고! 도대체 질문의 저의가 뭐야?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승환이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날 바라보던 날카로운 눈빛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짜식이 말야. 까불고 있어.

“내가 할아버지의 후계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서현 씨를 막 부려먹고 그럴까 봐? 하녀처럼, 후궁처럼? 그래서 그런 질문을 한 거야?”

“…어.”

박승환이 솔직하게 자백한다.

아니라고, 그런 의도 아니었다고 거짓말하면 ‘너 이놈! 잘 걸렸다!’ 하면서 제대로 발라버릴 수 있을 텐데, 저렇게 솔직하게 두 손 들고 나와 버리니 오히려 힘이 빠지네.

“야. 이 자식아. 도대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구라는 놈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컵을 집어 들었다.

“내가 아는 너라면, 그런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은 했어. 했지만, 물어보지 않을 수는 없었어. 확신이 필요했으니까.”

승환이가 그렇게 말한다.

“확신? 무슨 확신?”

“너라는 사람에 대한 확신.”

승환이는 그렇게 말하면서 커피가 담긴 머그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그리고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한다.

“그냥 편하게 말할게. 내가 아까 그랬지? 내 어느 정도 나름대로 정리를 했다고. 너에게 말 해줘야겠다고.”

“그랬지. 그 이야기하기 전에 몇 가지 물어본다고 했고, 쓰레기 같은 질문을 한 거고.”

승환이가 쓰게 웃는다.

“그래. 그 쓰레기 같은 질문이 필요했어. 너라는 사람에 대한 확신,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한수라는 사람이 며칠 전 내 앞에 앉아 있었던 친구 한수와 같은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이 필요했으니까.”

“아니, 그게 무슨…. 그래서 그 확신이 없으면 말을 안 해주려고 했다?”

“아니. 말은 해줬을 거야.”

“그러면 내용이 달라졌을까?”

“내용도 같아. 방법이 달라졌겠지.”

“방법이 달라졌다고? 어떻게?”

“내 쓰레기 같은 질문에 니가 쓰레기 같은 답을 했으면 내가 해줄 이야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을 거야. 단 한 문장. 거기서 끝났을 거야.”

“아니라면, 한 문장 앞에 긴 설명이 따라오고.”

“그렇지.”

“그래서, 지금 내가 들을 이야기는 뭐야? 긴 버전이야? 짧은 버전이야?”

내 질문에 박승환이 작게 웃는다.

“철탄산. 들어봤어?

박승환이 물어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철탄산은 경상북도 영주시 북쪽에 위치해 있는 산 이름이야. 그리 높은 산은 아니야. 대충 200m 정도? 지역 주민들은 밥 먹고 운동도 할 겸 가볍게 오르는 동네 뒷산이야.”

박승환이 갑자기 그렇게 철탄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게 갑자기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철탄산? 경상북도 영주?

“철탄산 남쪽에 작은 학교가 있어. 영주초등학교,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에 비하면 학생 수도 적고, 시설도 교사도 부족한 학교지만, 일제 강점기 때 개교한, 아주 역사가 깊은 초등학교야. 산과 가까이 있어 계절이 바뀌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어. 5월 즈음에 얼마 안 되는 남자애들을 모아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으면,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담뿍 담겨있는 아카시아꽃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그런 학교야.”

나도 시골 출신이라 그런가, 승환이의 이야기에서 아카시아 향이 느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학교 정문을 나와 밑으로 조금만 걸어 내려가면 작은 성당이 있어. 안녕하세요 하면서 90도로 꾸벅 인사를 하면, 인자한 미소로 사탕 같은 걸 나눠주시던 수녀님이 계시는 작은 성당. 성당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철길 건널목이 나와. 하루 종일 철길 옆을 지키고 있어도 하루에 열차 한 번 보기 힘든 그런 건널목. 그 건널목을 지나 10여 미터를 걸어가 왼쪽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가면 연노랑색으로 칠해진 5층짜리 아파트가 있어.”

승환이의 목소리에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이 느껴졌다. 나는 그 그리움에 공명하는 마음을 느끼며, 승환이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초인종을 누르면 축구 한다고 온몸에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손자에게 잔소리를 하면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는 할머니가 있고, 그런 할머니 등 뒤로, 된장찌개를 담은 뚝배기가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곳. 경상북도 영주시 하망동 291 다시 8번지, 영주로열아파트 나동 301호.”

승환이의 시선은 나를 향해 있었다. 하지만 그 녀석은 그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당연히 알았지. 나는 다른 애들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 다른 애들은 다 가지고 있는 아빠, 엄마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억지로 나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야. 실제로 필요 없었어. 할머니가 주는 사랑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천둥번개가 치는 밤이면, 천둥번개 소리에 깨버리면, 나는 엉엉 우면서 할머니 이불로 기어들어갔어. 내가 그렇게 할머니 품으로 파고 들면, 우리 손주 괜찮다고, 할미랑 있으면 아무 걱정할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해주면서, 꼭 안아주면서 거친 손으로 내 등을 쓸어줄 때, 할머니 품에서 할머니 냄새를 맡으면서, 엄마 아빠 필요 없다고, 할머니하고, 할머니가 끓여준 된장찌개만 있으면 엄마 아빠도, 다른 사람도,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어. 그날까지는….”

“…그날?”

“그래. 그날.”

승환이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그리움이 형태를 바꾸고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하는 날이었어. 졸업식장에서 할머니와 사진을 찍고,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에 탕수육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어. 오랜만에 탕수육을 먹었다는 행복한 기분 조금, 이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우쭐한 마음 조금, 그리고 중학생이 된다는 두려움이 조금 뒤섞인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문을 열었을 때, 거실에 앉아 있던 그 남자를 봤어.”

그 남자.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것 같았다.

흐름을 생각한다면, 승환이 아버님, 그분이겠지.

“허락도 없이 거실에 앉아 있던 그 남자가 말했어. 자기가 아버지라고, 이제 14살이 되었으니 서울로 가야 한다고. 나는 어떻게 했을까?”

“…할머니.”

“그래. 할머니를 돌아봤어. 그리고 물어봤어. 저 사람의 말이 진짜냐고, 저 사람이 내 아버지냐고, 저 사람 말대로 서울에 가야 하냐고, 그리고 할머니도 같이 가는 거냐고. 하지만 할머니는 대답하지 않았어. 대답하지 못한 것이 아니야. 안 했어. 그래서 내가 다시 물었어.”

불길한 예감이 든다.

“맞냐고, 진짜 내 할머니 맞냐고. 그렇게 물어봤어.”

불길한 예감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역시 대답은 없었어. 그저 말없이 날 바라보고만 있을 뿐. 그게 마지막이야. 그 날 이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할머니는, 널 바라보는 할머니는 어떤 표정을 하고 계셨는데?”

내가 물었다.

“…눈물 때문에, 볼 수 없었어.”

나는 그렇게 대답하는 승환이를 보면서, 14살의 승환이가 할머니에게 매달려 있는 모습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는 승환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

나와 승환이는 양재천을 따라 걷고 있었다.

카페를 나가 잠깐 걷자는 권유를 한 사람은 나였다. 진정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싶었다. 승환이 녀석에게 차가운 공기를 맡게 해주고 싶었다.

아니, 차가운 공기가 필요한 사람은 나였다. 내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도 할아버지 밑에서 컸으니까.

가족이라고는 할아버지뿐이었다. 승환이처럼 내 초등학교 졸업식에 함께한 유일한 가족이었다. 나 또한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다른 사람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14살의 박승환의 모습이, 잔상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차가운 공기로 서로의 마음을 다스리며, 말없이 양재천변을 걷고 있었다.

그렇게 남자 둘이 산책을 시작하고 10여 분이 지났을 때, 내 휴대폰이 울렸다.

서현 님에게서 온 전화였다.

나는 눈짓으로 승환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걸음을 조금 늦췄고, 승환이와 나 사이의 거리가 5m 정도 멀어졌을 때 통화버튼을 눌렀고, 서현 님의 목소리가 전화기에서 흘러나왔다.

-한수 씨. 혹시 통화 괜찮으세요?

“네. 괜찮아요.”

-늦으셔서 전화했어요.

나는 재빨리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40분. 자정까지 20분밖에 안 남았다. 승환이의 심각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까지 흘러간 줄도 몰랐네….

“죄송해요. 시간이 이렇게 된 줄 몰랐어요. 승환이 만나서 잠깐 이야기하다 보니. 지금 대치동이에요. 미안해요. 미리 연락했어야 하는데.”

-아. 네. 승환 씨랑.

나는 어제 집에 들어가서 서현 님에게 승환이와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나마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기에 서현 님도 승환이와 만나고 있다는 말에서,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많이 늦으실까요?

“아니요. 확실히 언제라고는 못하겠는데. 그렇게 많이 늦지는 않을 거예요. 먼저 주무세요.”

-네. 알겠어요. 저녁은 드셨죠?

“먹었죠. 혹시 출출하세요? 들어갈 때 야식 좀 사 갈까요?”

-아니요. 저 말고 한수 씨요. 대치동이라고 하셨죠?

“네. 지금 양재천이에요. 대치역 근처.”

-제가 데리러 갈까요?

“아니요. 택시 타면 금방인데요. 출발할 때 문자 보낼게요. 먼저 주무시고 계세요. 진동모드로 해놓고.”

-알겠어요. 들어오실 때 연락 주세요.

서현 님의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나는 잠시 전화기를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드니, 5~6m 앞에서 승환이가 날 바라보고 있다.

“오시라고 해. 밤길 무서워서 혼자 못 가겠다고.”

승환이가 그렇게 말한다.

“이 자식아. 매너 없이 전화통화를 엿듣고 있냐.”

“엿들은 게 아니고 그냥 들렸어. 귀는 눈하고 달라서 닫을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너 서현 씨하고 사귀는 거야?”

“응? 아니. 사귀는 건 아니고….”

“아니고?”

“시끄러워.”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려는 나를 바라보는 승환이의 얼굴은 내가 알고 있던 평소의 승환이의 얼굴이었다.

“뭔데? 왜 그런 표정으로 보는데.”

“거짓말은 아니다 싶어서.”

“뭐가.”

“서현 씨가 널 모시는 게 아니라는 거. 보면 통화하는 거 보니까, 니가 머슴 같다.”

그렇게 말한 승환이는 몸을 돌려 다시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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