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24화 (124/271)

124 :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 (5)

친절이 형 표 캔커피를 선택한 것은 굿 초이스였다.

순간적으로 집중력을 대폭 증가시켜주는 캔커피를 홀짝이면서, 처음 할아버지의 호출을 받았던 그 날 이후부터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할아버지의 호출을 받았고, 가업을 이으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중앙그룹의 강민철 회장님을 처음 만나게 되었고, 서울에 올라오면서 고속버스 안에서 처음으로 능력을 시험해보다 어느샌가 버스 안에 홀연히 나타난 할아버지에게 뒤통수를 맞았고, 이 능력을 함부로 썼다가는, 특히 아주 작고 사소한 욕망 때문에 능력을 썼다가는 일 나겠다는 두려움에, 뭐 할아버지에게 맞아 죽는 것은 둘째 치고 능력 자체가 워낙 캐사기니까, 잘못하다가는 인생 밸런스 붕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일단 봉인해두기로 마음을 먹었고, 평소처럼 수업 듣고, 평소처럼 알바하고, 평소처럼 그 벤치에 앉아서 찌질거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날 기억하냐? 겜방에서 전화 받고 치킨 타령하던 널 두고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날?”

“…하숙집에서 짐 뺀 날?”

“그래. 여자친구에게 차인 후 인생을 놓아버린 내가 도박판을 전전하다 쌓인 도박 빚을 감당하지 못해 자취를 감췄고, 그래서 사채업자가 나 대신 하숙집 할머니를 괴롭혔다는 소문이 돌았던 바로 그 날.”

내가 소문의 진원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날 그 전화, 강 회장님이었어.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 주신다고 하셨고, 내가 거절하고 어쩌고 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일이 진행돼버렸어. 새로운 거처라고 했을 때, 솔직히 나는 무슨 원룸 같은 거 하나 해주신다는 이야긴 줄 알았는데, 어디였는지 알아?”

“어딘데?”

“갤러리 포레스트.”

“서울숲?”

“그래. 거기.”

“그래서 성수동이라고….”

박승환이 무언가 곱씹듯이 중얼거린다.

“그래. 성수동, 할아버지 지인, 친척 집 비슷한 데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실제로 할아버지 지인은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에 명성이 자자한 중앙그룹의 수장 강민철 회장님이시고, 그분이 마련해 주신 새 거처는 아랫집에 한류스타가 사는 70평 크기의 주상복합이었단 말이지. 이번엔 내가 하나 물어보자.”

승환이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어땠을 것 같냐? 알고 보니 나는 신의 손자였다고,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 신의 손자, 시간까지 멈출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신의 후계자.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가지려 한다면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는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 자. 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니, 네가 만약 나였다면 어땠을 것 같아?”

***

나는 대치역 8번 출구 앞에 있는 카페로 들어갔다.

장영호에게 쳐들어가기 직전에, 승환이를 만났던 바로 그 카페였다.

박승환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뭐 당연한 이야기다. 저 자식 집이 바로 여기 코앞인데, 내가 먼저 도착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왔냐? 뭐 마실래?”

나는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진동벨을 보여주었다.

그 모습을 보고 박승환이 살짝 웃는다.

“왜 웃어?”

“신지수 생각나서.”

“그게 무슨 소리야?”

“있어. 그런 거. 일단 앉아라.”

나는 자리에 앉았고, 앉자마자 진동벨이 울렸고, 살짝 투덜거리고는 내 커피를 가져왔다.

승환이는 투덜거리는 나를 보고 작게 웃기는 했지만, 막상 내가 자리에 앉자 그 이후로는 아무런 말이 없다.

나도 그런 승환이를 재촉하지 않았다. 해야 할 말은 있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확실히 모르는 그런 상황, 나도 잘 알고는 있으니까.

그렇게 침묵 속에서 몇 분이 흐른 후, 승환이가 입을 천천히 입을 연다.

“생각을 해봤어.”

“뭘?”

“내가 만약 너였다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봤고 결론이라고 말할 것까지는 아니긴 한데, 일단 어느 정도 정리를 했고, 내 나름대로 정리한 부분을 너에게 말해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우리 둘이 할 이야기는 그것밖에 없겠지.

“그 전에 너에게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솔직하게 말해준다고 약속할 수 있어?”

승환이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그래. 솔직하게, 숨기는 거 없이 말해줄게.”

나도 승환이의 눈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해주었다.

“니가 가지고 있다는 그 능력. 사용한 적 있어?”

승환이의 첫 번째 질문이었다.

***

“…진철이 형 아버님이 나에게 손을 내미셨어. 작별 인사를 하시려고. 그 모습을 보는데, 알겠더라고. 내가 가진 능력 덕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확실히 알 수 있었어. 아버님께서 나에게 하시려는 인사가 마지막 인사라는 것을. 아들의 후배에게 건네는 삶의 마지막 인사라는 것을 말이지. 그래서 그때 두 번째, 내 의지로는 처음으로 시간을 멈추었어.”

승환이는 어제처럼 아무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어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놀이터가 카페로 바뀌었고 손에는 캔커피 대신 머그컵이 들려있다는 정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몰랐지. 어. 의학적인 지식이라는 것은 전무했으니까. 그래서 한참을 생각했지. 시간을 멈추었기에 역설적으로 생각할 시간은 많았으니까. 그리고 결론을 내렸어. 할아버지가 말한 대로 내가 다음 신의 후계자이고, 신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그 능력은 내 의지를 곡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모르겠어.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닌데, 꼭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진철이 형 아버님에게 능력을 썼어.”

“친절이 형 아버님은?”

“많이 좋아지셨다고, 조만간 통원치료로 전환하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는데, 그 이후에는 모르겠네. 진철이 형도 별 이야기 없는 걸 보니, 괜찮아지신 것 같은데.”

승환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다시 묻는다.

“그러면, 그때는?”

“언제?”

“제이슨 임이 장영호와 함께 널 습격했을 때. 그때는 왜 당하고만 있었는데?”

“그때는 능력이 없었으니까.”

“없었다고?”

“진철이 형 아버님과 만난 그날 이후, 능력을 봉인 당했어. 뭐, 길게 이야기하면 복잡한데, 내 생각에는 할아버지가 내는 일종의 시험이 아닐까 그렇게 추측하고 있어.”

“무슨 시험?”

“능력이 있다가 없으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까.”

승환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제이슨 임도 그 시험의 일부였는지는 모르겠어. 우리 할아버지가 가끔 너무 나갔다 싶을 때가 있기는 하지만, 능력을 빼앗고, 제이슨 임을 부추겼다? 그렇게까지는 안 했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야. 그냥 우연히, 두 시기가 겹쳤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할아버님에게 이야기 안 했어? 그랬으면 바로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너라면, 나가서 처맞고 왔다고 쪼르르 달려가서 아빠에게 이를 거냐?”

내 말에 승환이가 작게 쓴웃음을 짓는다.

“뭐 단순히 일대일로 싸운 것도 아니었고, 제이슨이 함정을 파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여러모로 불리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할아버지에게 해결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 없었다기보다는 최후의, 정말 마지막에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두고 싶었다가 정확하겠네.”

“왜?”

“특별한 이유는 없어. 꼭 이유를 들자면 나답고 싶었어.”

“…너답고 싶었다고?”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중앙그룹이라는 카드도 있었어. 강 회장님에게 말씀드리면 바로 해결해 주셨을지도 모르지. 솔직히 그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야. 하지만 그렇게 해결하고 싶지 않았어. 작은 어르신이고 뭐고, 내가 아는 나는 스물한 살의 대학교 2학년 학생이니까. 진철이 형 아버님 그렇게 고쳐드리고, 고쳐드렸다는 말은 좀 그렇네. 뭐,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아무튼 그 날 이후, 고향집에 내려가서 할아버지에게 이실직고 했지. 자수하면 덜 혼날테니까. 그때 내가 할아버지에게 그랬어.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

“신의 예비후보라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스물한 해 동안 사람으로 살았고, 그래서 아직은 사람으로서 생각한다고.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스물한 살 대학생으로 생각하고 싶다고. 뭐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어.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고. 그런 관점에서 할아버지나 중앙그룹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어떻게든 내 힘으로 해보려고 난리를 쳤던 거지. 결론적으로는 삽질이었지만.”

“…삽질?”

“도움 안 받겠다고 해놓고, 결국 도움받았으니까. 그때 우리가 장영호 사무실로 쳐들어갔을 때, 그때 장영호가 받았던 두 번째 전화, 그거 강우현, 그 형님이 알려 준 번호거든. 그리고 전화하면 장영호가 고분고분해질 거라고 했고, 실제로도 그랬고. 아니, 사실 중앙의 힘이 없었다면 과연 쳐들어갈 수 있었을까? 윤기훈에게 돈 마련해줄 수 있었을까? 결론적으로 나 혼자서 다 하겠다고 날뛰기만 했지, 실제로 내가 한 건 아무것도 없는 상황인 거지.”

“능력은 언제 되찾은 건데?”

“기훈이 이삿날. 그날 되찾은 건지, 아니면 그 전부터 돌아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확인한 건 그날.”

“할아버님은 별말 안 하셨고?”

“능력이 돌아온 것을 확인하고 내가 전화를 했지. 뉘앙스는 뭐, 시험에 통과했다는 그런 뉘앙슨데, 워낙 속이 검은 양반이라 모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무튼 그날 할아버지에게 복수하게 능력 좀 쓴다고 허락을 받았어. 제이슨 같은 그런 놈은 허튼 생각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야 하거든. 그렇게 허락을 받았는데, 마치 우연처럼 그날 제이슨이 미국으로 도망치려고 했지. 오후 세시 정도였던 것 같은데, 그때 우리 짜장면 시켰을 때. 그때. 변호사라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왔어. 제이슨이 미국으로 도망치려고 했고, 출국금지를 걸었고, 면세구역에 잡혀있다고. 그래서 공항으로 갔지.”

“갔다고?”

“순간이동. 뭐 그런 거.”

박승환은 말없이 날 바라보고 있다. 믿을 수 없다는 그런 눈빛을 가득 담아.

“증명해줘?”

내가 말했고, 박승환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아니. 괜찮아. 아무튼 그래서?”

“그렇게 공항으로 가서, 시간 정지시키고 제이슨에게 물리적인 교훈을 내렸지. 그게 두 번째 능력 사용. 정확히 말하면 짜잘한 게 몇 개 있기는 한데, 아무튼 제대로 능력을 사용한 건 그거 두 번.”

“짜잘한 건 뭔데?”

“사물함 연 거.”

“뭐?”

“왜 지연이가 착각해서 내 사물함 잠긴 적 있잖아. 비밀번호 오류 초과로. 그때 신력으로 열었어. 할아버지가 내 능력을 거두면서 그걸 명분으로 삼았고. 그리고 어제 너에게 확인시켜준 거. 그 정도?”

“…정리하자면, 너를 위해서 능력을 사용한 적은 없다.”

승환이의 말이다.

“제이슨 팰 때 썼는데?”

“그건 공공의 정의 실현으로 면책.”

박승환 판사님께서 그렇게 면죄부를 주신다.

뭐. 나야 땡큐지.

“그렇게 말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내 개인적인 욕망을 추구한 적은 없다.”

승환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본다.

그렇게 또 몇 분이 흐른 후, 다시 나에게 말한다.

“하나만 더 물어보자.”

“그래.”

“갤러리 포레스트라고 했지? 지금 집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지금 그 집에서 너 혼자 살고 있어?”

승환이가 그렇게 물어본다.

나는 이어질 승환이의 질문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서현 씨. 혹시 그분도 거기서 같이 지내시는 거야?”

그리고 내 예상대로 승환이가 그렇게 물었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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