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23화 (123/271)

123 :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 (4)

각각 소주 한 병씩을 마신 우리 두 사람, 중훈이와 나는 절대로 꺼지지 않는 우정의 불꽃을 영원히 지켜내겠다는 굳은 결의를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물론 이번에는 지난번처럼 계산도 까먹지 않았다.

까먹지 않은 것은 물론 조금 전 만났던 후배 녀석들 테이블도 몰래 계산해주었다.

남자 놈 이름 뭐였더라? 바로 조금 전에 들었는데? 형상이었나? 현상? 형태? 뭐든 상관없겠지. 아무튼 그 녀석하고 지금 1학년의 신지수라는 여자 후배. 민주라고 했지? 기억해둬야지.

나중에 계산하려고 할 때, 놀랄 거다.

사장 형님이 ‘너희들 먹은 건 한수가 먼저 계산하고 갔는데?’ 그렇게 말해주실 테고, 그러면 녀석들이 감격하겠지?

감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어서 빨리 친구와 동기들에게 바다처럼 넓고 넓은 선배님의 마음과 미담을 전하고 싶어 할 테고, 나의 미담은 사람들의 입을 타고 멀리 퍼져나갈 테고.

내가 뭐 그런 불순한 의도로 계산을 한 것은 아니지만, 후배들이 그렇게 한다는데, 또 그러지 말라고 행동을 강제하고 그럴 수는 없잖아.

존나 카리스마 있어! 이러니까 여자들이 뻑이 가지!

아무튼 그렇게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중훈이하고도 헤어졌다.

참으로 신기하단 말이지.

같은 소주 한 병이라고 해도, 어떤 때는 마치 사약처럼 한 모금도 안 넘어가는 그런 날이 있고, 또 어느 날은 소주 회사가 소주병에 술 대신 물을 넣어 놓았나 싶을 정도로 술술 넘어가는 날이 있고, 또 어떤 날은 ‘누가 소주에다 설탕 넣었어!’ 할 정도로 입에 착착 붙는 그런 날이 있다.

오늘은 맹물과 설탕의 중간 정도. 마음 같아서는 두 병 정도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컨디션이었다.

물론 마실 수 있다는 이야기지, 마시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컨디션이 좋아도, 아무리 술이 술술 넘어가도 중훈이와 단둘이 2차까지 가고 싶지는 않다. 중훈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남자와 단둘이 2차라니. 뭔가 우울하잖아.

우울한 것도 우울한 거고, 내일 아주아주 중요한 일정도 있다.

서현 님과 나 사이에는 ‘원활한 동거생활을 위해 상호 노력해야 하는 몇 가지 약속’이 있고, 그중 하나가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 토요일과 일요일, 주말 이틀 중 하루는 서로를 위해 시간을 낸다’는 약속이다.

오늘은 오전에 내가 유 선생님을 만난다고 나왔고, 서현 님도 저녁에 일이 생겼다고 나갔으니, 서로 합의한 약속에 따라 내일은 특별한 일이 있지 않는 이상, 같이 밥 먹고, 차 마시고, 산책을 하며 일요일을 보낼 예정이다.

그 말인즉슨, 내일은 나와 서현 님, 우리 두 사람만을 위한 일요일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지.

그러니 내일 뽀송뽀송한 간으로 서현 님과 행복한 데이트를 하려면 술은 그만 마시고,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자야 한다는 말씀.

그렇기에 나는 살짝 알딸딸한 기분에, 약간 술이 부족한 것 같다는 아쉬움에, 그런 아쉬움의 유혹을 이겨낸 내 자신에 대한 뿌듯함이 뒤섞인 기분으로 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 내일 서현 님을 어디로 모시고 가야 할까? 무엇을 점심으로 대접해 드릴까? 옷은 어떤 것을 입고 갈까? 서현 님은 어떤 옷을 입을까? 그런 행복한 고민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내 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이 부르르 떨어댄다. 열심히 진동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나는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액정에는 승환이의 이름이 떠 있었다.

나는 작게 숨을 고른 후,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디야?

승환이 녀석이 기본적인 전화 예절인 ‘여보세요’도 생략한 채, 바로 그렇게 물어본다.

“집에 가는 중.”

-어디서?

“신림동에서. 형님네 정육 식당에서 밥 먹었거든.”

-누구랑?

그렇게 연달아 세 번 연속 질문을 받은 나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잘 들어’라고 말해 준 다음 오늘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었다.

“아침에 유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었어. 점심을 먹자는 권유를 받았고, 그래서 학교에 와서 유 선생님과 점심을 먹었고, 호칭과 관련해 작은 합의를 이끌어냈고, 집에 가기 전에 도서관에 가서 책을 한 권 빌리려다 중훈이를 만났어. 토요일이라 할 것도 없고 공부하러 왔다는 그 불쌍한 녀석하고 가벼운 잡담이나 좀 하다가 집에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김창회가 여자를 데리고 도서관에 나타났고, 창회가 데려온 여자가 스포츠음료 하나 쥐여 주고 사진 찍어 대충 포토샵질하면 바로 광고로 내보내도 음료 회사에서 바로 오케이 할 것 같은 미인이었고, 나와 중훈이는 어쩌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는지도 모르는 창회와 찬희를 위해 우리가 친구로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지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기왕이면 밥도 먹을 겸해서 형님네 정육 식당 가서 삼겹살 3인분에 소주 각 한 병씩 나눠 마시고 집에 가는 중. 자. 마지막 질문할 기회 딱 한 번 준다.”

숨도 안 쉬고 그렇게 이야기해주었다.

-김창회가 여자를 데리고 왔다고?

승환이가 소중한 마지막 질문을 허비해 버린다. 뭐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김창회와 여자. 확실히 매치 안 되는 단어이기는 하지.

“그래.”

-아는 척을 했어? 그 자식이 소개 시켜 줬어?

“아니. 재빨리 숨었지.”

-그럼 그 여자가 창회랑 어떤 관계인지 확실히 파악된 건 아니네.

“그렇긴 하지.”

-어머님… 아니실까?

박승환의 개드립이다.

“중훈이가 김창회 새아빠 되는 소리 하고 있네.”

-흠.

전화기 너머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들어온다.

뭐 이해한다.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두뇌에서 그 이야기를 사실로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는 것이다.

찬희와 유라? 백번 양보해서 있을 수 있다고 쳐도, 창회에게 여자친구?

나도 직접 보지 않았다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믿지 못했겠지.

“일단 그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해. 안 그래도 중훈이하고 대충 방향은 정했어,”

-어떻게?

“박찬희 쪽은 적극 개입, 김창회는 일단 정보수집.”

-그래. 목숨은 소중하니까.

박승환이 그렇게 납득한다.

“그나저나 왜 전화했어?”

-이야기 좀 하자고. 어디야?

“지금 삼성 출발, 다음에 종합운동장.”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 내가 너 있는 곳으로 갈게.

승환이가 대뜸 그렇게 말한다.

“어제 일?

-그래. 어제 일.

그거 말고는 없겠지.

“너 지금 어딘데?”

-집.

“도곡동?”

-어.

“알았다. 가서 전화할게.”

내 말에 승환이는 아무런 말이 없다.

“왜 말이 없어? 이야기할 거야? 말 거야? 가? 말어?”

-알았어. 이야기하자.

“기다려. 가서 전화한다.”

-그래.

그 대답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잠시 동안 액정에 떠 있는 승환이 이름의 잔상을 바라보았다. 그 잔상을 바라보면서 어제 승환이 녀석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빠르게 복기해 보았다.

할아버지의 전화를 받았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성북동으로 끌려갔다.

사주(四柱)를 소개받는 자리였고, 그 자리에 나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끌려온 승환이가 있었다.

그렇게 나와 승환이는 작은 어르신과 다음 기둥을 이어갈 주재목(柱材木) 중 한 명의 자격으로 처음 서로를 마주하게 되었다.

말도 안 되는 저녁 식사가 끝난 후, 승환이는 나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그래서 설명해주었다.

승환이는 믿지 못했다.

물론 내가 그 녀석에게 해준 이야기는 상식선에서 생각하는 현대사회의 일반인이라면 믿지 못할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박승환 그 녀석이 상식선에서 생각하는 현대사회의 일반인이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잖아?

뭐 이해 못 할 바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증명해주었지.

제대로. 확실하게.

***

“시간아 멈춰라.”

나는 그렇게 소리 내어 말하고는 바로 후회했다.

시간아 멈춰라라니. 슈퍼히어로가 꿈인 중2병 중학생도 아니고.

하지만 언제나처럼 효과는 확실했다.

내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내 주변을 둘러싼 온 세상이 천천히 멈추어 서는 그런 기묘한 느낌, 이미 몇 번이나 느껴봤지만 여전히 적응 안 되는 그 느낌이 나에게 찾아왔다.

내 의지는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번에도 신력은 나의 의지를 곡해하지 않았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이 멈추었지만, 그렇게 멈추어 버린 세계에서 승환이는 살아 움직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 묻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무엇이냐고.

“증명.”

내가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이 땅의 수호신, 그러고 너희 아버님과 유 선생님을 포함한 네 분이 할아버지를 모시는 네 개의 기둥, 이 모든 것이 단순한 사이비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내 이야기에 대한 증명.”

내가 승환이에게 그렇게 말해주었다.

승환이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만 있다.

그렇게 나를 바라보던 승환이가 주변을 둘러본다.

어둠이 깔린 놀이터.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장면.

하지만 그렇게 주변을 둘러봄으로써 눈앞의 나와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멈추어 있다는 것을 승환이는 알아차릴 수는 있을 것이다.

“시간 정지가 가능한 것은 둘째 치고, 시간이 정지해봤자 아무런 소용없다고 생각했어. 빛 반사가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볼 수 없을 테니까.”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승환이의 첫 마디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기껏 시간을 정지해봤자, 아무것도 못 보는 장님이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테니까.”

승환이가 날 바라본다.

“시간이 멈추면 공기도 멈춰야 정상이지 공기가 멈춰버리면 소리를 전달하는 매질로서의 기능도 멈춰버리니까 말을 하는 것은커녕, 아무런 소리도 안 들려야 정상인데, 이렇게 대화가 가능한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시간 정지는 일종에 치트 같아. 볼 수도 있고, 소리도 들을 수 있고, 숨도 쉴 수 있으니까.”

나는 그런 승환이를 보며 말했다.

“해봤냐?”

“뭘?”

“여탕.”

“아니.”

내가 말했다.

“왜?”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범죄라는 것 정도의 인식과 양심은 있으니까.”

내가 말했다.

“진짜로 그렇게 생각했다고?”

“뭐 반쯤은.”

“나머지 반은?”

“할아버지가 알아.”

“네가 시간을 정지시켰다는 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 올라오면서, 할아버지가 보여준 능력이 진짜일까? 나도 그런 게 가능할까 싶은 마음에 이것저것 하다가 의도치 않게 시간을 멈춰봤는데, 할아버지가 바로 나타나 내 뒤통수를 때렸어.”

박승환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뭐야? 납득한 거야?

“믿어?”

“아니. 솔직히 못 믿겠어. 하지만 반박할 수가 없네.”

승환이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주변을 둘러본다.

못 믿겠다. 하지만 반박할 수가 없다.

지금 상황에서 그보다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다시 시간을 제 상태로 되돌렸다.

멈추어 있던 모든 것이 다시 제 속도를 찾아갔고, 나와 승환이는 그렇게 다시 움직이는 시간을 느끼며, 서로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나는 가방에서 캔커피, 진철이 형이 물처럼 마시는 그 캔커피 두 개를 꺼냈고, 그중 하나를 승환이에게 건넸다.

물론 내가 진철이 형처럼 캔커피 중독자도 아니고, 가방에 넣고 다녔던 것은 아니고, 어쩐지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집중을 위한 달달함이 있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고 해서, 신력으로 캔커피 두 개를 빌려온 것이다.

물론 비용을 지불하겠다는 생각도 했으니까, 내 의지를 곡해하지 않는 신통방통한 신력이 어디선가 대가를 지불하고 이 두 개의 캔커피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나는 캔커피를 따면서 말을 시작했다.

“4월 중순쯤이었어. 할아버지로부터 고향 집에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을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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