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22화 (122/271)

122 :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 (3)

막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다 나와 눈이 마주친 사람, 아니, 녀석.

우리 과 남자 후배였다. 지난 축제 때, 같은 요리팀에서 일했던 남자 후배 두 사람 중 하나.

이름? 당연히 모르지.

남자 후배 1, 아니면 2인데, 뭐 1이든 2든 뭐가 중요하겠어?

아무튼, 내가 겨우 얼굴만 기억하는 그 녀석은 선배들의 성지인 이 정육식당을 침범하려 하고 있었다. 감히, 선배들의 허락도 없이 말이지.

당장 꺼져라. 여기는 너 같은 애송이가 올 곳이 아니다!

농담으로라도 그렇게 말하면 사장 형님에게 혼나겠지.

아무튼, 귀한 손님 후배 놈이 이 식당에 들어오고 있었다. 그냥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여자랑 같이, 그냥 여자도 아니고, 나름, 아니 꽤 예쁜 여자와 같이.

“어머? 중훈 오빠. 한수 오빠. 안녕하세요?”

그렇게 먼저 인사를 건넨 것은 남자 후배 1 또는 2가 아니라, 옆에 있던 여자였다.

우리를 안다고?

“어? 민주구나. 오랜만이네.”

중훈이가 그렇게 여자애에게 아는 체를 한다.

역시 이중훈. 모르는 여자가 없구나.

그렇게 손을 흔들면서 기억을 뒤져보았다.

민주? 그런 이름이 내 데이터베이스에 있던가?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그런 마음은 재빨리 숨기고, 나도 재빨리 손을 흔들어 주었다 중훈이와 내 이름을 알고 있었지? 거기다가 중훈이가 저 여자애 이름을 알고 있었고.

높은 확률로 우리 과 후배다. 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남자 후배 1, 또는 2가 같이 있다는 것도 그러한 가설을 뒷받침하는 증거 중 하나가 될 테고.

“안녕하세요.”

남자 후배 놈도 뒤늦게 인사한다.

“어, 그래. 형태도 오랜만이다. 밥 먹으러 왔구나.”

“네.”

형태? 이름이 형태였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뭐 상관없겠지. 형태든, 형상이든, 형상기억합금이든 뭐든 어차피 금방 까먹을 거.

그나저나, 형태인지 뭔지 하는 저 녀석은 선배를 봤으면 재빨리 달려와서 180도 폴더인사는 못 할망정, 무슨 훼방꾼 바라보는 시선으로 하늘 같은 선배님을 바라보고 있다.

그거지. 여자랑 밥 먹으러 왔다가 예상 못 한 방해꾼을 만났다는 시선.

참으로 말세다. 남녀가 유별하거늘, 어찌 혼약도 맺지 않는 처녀, 총각이 한 상에서 밥을 같이 먹으려 한단 말이더냐. 어느 집안인지 모르겠지만 문중 어르신들이 보았다면 후손을 잘못 키웠다고, 조상님 뵐 면목이 없다는 소릴 듣게 될 것이야!

나도 작년에 신지수와 사귀었지만, 딴 사람들 있으면 재빨리 거리를 뒀었어! 그게 예의니까!

뭐 정확히 말하면, 둘이 있을 때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하고 같이 있을 때는 신지수 반경 1m 이내에 접근하지 않겠다는 각서에 강제로 서명을 해서였기는 했지만.

“그나저나 두 사람 뭐야. 토요일에 어쩐 일이야? 혹시 데이트?”

이중훈이 두 사람을 보며 그렇게 말한다.

“네? 아니. 뭐 그게….”

형태라는 놈이 뭔가 쑥스럽다는 듯 그렇게 얼굴을 막 붉히려는 찰나!

“아니에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냥 동기예요. 조별 과제 때문에 오늘 왔다가 그냥 밥이나 먹고 가려고요.”

민주라는 여자애가 그렇게 선을 일필 지휘로 그어 버린다.

형태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는다.

딱 알겠구만. 척 보니 딱 알겠어.

형태라는 저 녀석은 민주라는 여자애에게 마음이 있는 거다. 그게 뭐 호감인지, 사랑인지, 욕망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무언가가 있기는 한 거다.

하지만 저 민주라는 애는 아닌 거지. 아마도 친구, 그 정도까지는 괜찮은데, 그 이상의 관계는 생각해 본 적 없다. 생각해 봤지만 남자로는 아니라는 그런 뉘앙스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극명하게 선을 그을 리가 없지.

쯧쯧쯧. 제2의 이중훈이 여기 또 있었네.

“밥 먹으러 온 거야?”

내가 재빨리 주제를 바꿨다.

“네? 아. 네.”

“응. 그래. 여기 고기 맛있지. 그럼 저녁 맛있게 먹어라.”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두 사람에게 가벼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뭐, 형태라는 놈이 미소 뒤에 숨어 있는 의미, ‘얼른 꺼져’를 읽어냈는지 모르겠지만, 맛있게 드세요. 어쩌구 하면서, 지 동기와 함께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테이블로 사라져갔다.

“누구야? 우리 과 후배야?”

후배들이 적당히 멀어지자 내가 중훈이에게 물었다.

“응? 누구? 민주?”

“우리 과야?”

내 질문에 이중훈이 자세를 낮추고 얼굴을 가까이한다. 그리고 속삭인다.

“박민주, 몰라?”

“모르겠는데?”

“저 녀석이 쟤네 학번의 신지수야.”

그게 뭔 소리야?

“저 학번에서 가장 예쁘고, 성격 좋고 해서 대시 가장 많이 받는 애라고.”

이중훈이 그렇게 설명한다.

“그래? 왜 난 몰랐지?”

“너는 신지수랑 깨지고 나서 정신 못 차리고 해롱대고 있었으니까.”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학기 초에는 매일 그 저주받은 벤치에 우울하게 앉아만 있었으니까.

그런데. 잠깐만. 지금 중훈이 저 녀석이 뭔가 잘못 말한 것 같은데?

저 민주라는 애가 제일 예쁘다고?

“지연이는? 지연이가 있는데, 쟤가 제일 예쁘고 인기 있다고?”

내가 그렇게 물었다.

뭐 내가 그 지연이랑 뭐 친하고 그래서 이런 말 하는 게 아니고, 객관적으로 봐도 지연이가 더 예쁘고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인간계.”

“응?”

“인간계에서 제일 예쁘고 인기 있다고. 지연이는 레벨이 다르지.”

이중훈이 그렇게 깔끔하게 설명한다.

뭐, 간단히 이야기하면 민주라는 저 친구가 인간계 최강이다. 뭐 그런 이야긴가보다. 지연이는 천상계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연이 칭찬을 들으니 이상하게 기분 좋네.

***

잠깐 방해를 받았지만, 우리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삼겹살을 굽고, 소주를 마시면서 일단 박찬희와 최유라, 이 두 사람의 행복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심도 깊은 토의를 가졌다.

그렇게 심도 깊은 토의를 통해서 우리는 유라보다는 찬희를 우선순위에 두기로 하고, 그런 찬희를 위해 소극적 방관 대신,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으로 그렇게 방침을 정했다.

사실대로 말하면, 친구들의 연애가 나에게 있어서 어떤 느낌이냐면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지 같은 그런 느낌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내가 전단지를 받는데 드는 수고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잖아? 즉 나에게는 손해가 없다는 이야기. 나에게는 손해가 없는데, 전단지를 나눠주는 사람에게는 이익이 된다.

나에게는 손해가 없는데 상대에게는 이익.

안 할 이유가 없다.

친구들의 연애도 마찬가지다. 찬희와 유라가 연애를 하든, 김창회가 새 여친을 사귀고, 테스토스테론이 근육 합성 말고도 다른 기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기회가 되든 나에게는 손해가 없다. 나쁠 것이 없다.

반면에 친구들은 행복을 느낄 테니, 이익이고.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이냐.

그런데도 왜 내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중훈이와 내가, 비장한 얼굴로 심도 깊은 토의를 나누었는가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걱정이 되어서 그렇다고.

사람들은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알고 있는데 외면하는 진실이랄까?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회사원은 언젠가는 퇴사한다. 커플은 언젠가는 깨진다.

이 진실을 모르기 외면하기 때문에,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미래를 걱정하고, 영원히 다닐 것처럼 회사에 목숨을 걸고, 영원히 사랑할 것처럼 상대방에게 목을 매는 거다.

사람이 언젠가는 죽고, 언젠가는 회사를 그만두는 이야기는 일단 미뤄두고, 커플에 집중해보자.

커플, 특히 대학생 커플은 높은 확률로 깨진다. 가끔, 아주 가끔, 결혼이라는, 남녀의 동침을 사회적으로 용인하는 단계까지 가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은 이별이라는 단계로 진행된다.

그게 걱정 되는 거다.

찬희는 참 좋은 친구다.

물론 가끔씩, 아니, 상당한 빈도로 ‘저 녀석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 건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착한 친구다.

그렇게 마음 여린 내 친구 찬희가 만약 깨졌어 봐. 그럼 어떻게 되겠어?

나도 해봐서 아는데, 솔직히 실연의 상처라는 거 아프다고. 굉장히 아프고 괴롭단 말이지.

실연의 아픔은 홍역처럼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꼭 겪어야 할 고통이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그거 굉장히 무책임한 말이다. 아니, 애초에 홍역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데, 의료체계가 제대로 구축되어있지 않은 개발도상국에서는 여차하면 줄초상 날 수 있는 그런 병이다.

특히나 연애경험이 전무하다시피 한 우리의 둘도 없는 친구 찬희가 마치 의료체계가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개발도상국처럼 홍역과도 같은 실연을 겪기라도 한다면….

우리 여린 찬희는 실연의 고통에 괴로워하다 술 먹고, 길거리에서 울고불고, 그러다 주취자로 신고 되어서 지구대 끌려가고, 끌려가서 난동부리다 결국 훈방될 거 입건되고, 기소되고, 빨간 줄 가고 그럴 거 아닌가.

아무튼, 우리는 그런 최악의 상황만은 어떻게든 막아내야겠다고 결정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결의를 채택한 거다.

어떻게 할 거냐고?

일단 최악의 경우, 이미 두 사람이 ‘오늘부터 1일’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가정했을 때, 두 사람의 이별을 기정사실화 하고, 둘이 깨졌을 때 발생할 수 있는 시나리오별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거다.

예를 들어, 휴학의 이점과 더불어 휴학을 했을 때 찬희가 할 수 있는 알바를 알아본다던가, 자원입대 절차에 대한 브리핑을 준비한다든가. 그런 식의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지원방안을 마련하는 것이다.

아. 물론 그 방법은 최후의 수단이다. 둘이 이미 커플이 되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마지막 수단.

그런 말도 있잖아. 최고의 방역은 예방이라고.

이 시점에서 가장 좋은 시나리오와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응방안은 할 수만 있다면, 우리 연약하고 연약한 심성의 찬희에게 트라우마 급의 상처, 절대로 치유되지 않는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처음부터 ‘실연’이라는 단계가 성립되지 못하도록, 즉, 커플이 아닌 썸 단계에서부터 막아내는 것이 가장 최선이다.

뭐, 일부 생각이 얕은 사람들은 우리의 그런 마음을 ‘훼방’이라느니, ‘시샘’이라느니 하면서 오해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오해’다. 잘못된 생각이다.

진짜, 사랑하는 친구를, 찬희를 위해서 이러는 거다. 찐 우정이란 말이다.

왜 미시마 유키오가 그랬다잖아.

배신은 우정의 양념이라고, 배신의 요소도, 위험성도 없는 우정이 싱겁다고 느껴졌을 때에야 한 사람의 독립된 어른이 된 거라고.

이게 다 찬희를 위해서 그런 거라는 이야기지.

***

“찬희는 그렇다 치고, 창회 그 자식은 어떻게 하지?”

중훈이가 그렇게 새 화두를 던진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당연히 우정의 이름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친구를 위해서.”

내 말에 이중훈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찬희 때 만큼의 패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뭐,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나저나. 그 여자 누굴까?”

“스포츠음료에 나올법한 건강한 상콤발랄함. 그런 분위기였지. 이런 말 하고 싶지 않지만, 창회랑 뭔가 잘 어울리는?”

이중훈의 평가다.

나도 일단 고개를 끄덕인다.

태릉선수촌의 국가대표 커플 같은 타이틀을 달았어도 잘 어울릴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지.

“학교를 소개하는 느낌이었지?”

중훈이가 물었다.

나는 조금 전 도서관 앞에서 보았던 창회 모습을 떠올렸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학교를 소개하는 모습이었다.

여기는 도서관이고, 저기는 뭐고. 그런 식으로.

설명을 들은 여자는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뭔가를 묻기도 하고 그런 모습이었지.

“일단. 지금은 잠자코 지켜보면서 정보를 모으자고. 김창회 그 자식은 확실히 찬희랑은 달라. 여차하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고. 일단 정보를 모으고, 그때 봐서 움직일만하다 싶으면 그때 움직이자고. 아무리 우정이 중요해도 목숨보다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소주잔을 집어 들었다.

중훈이도 고개를 끄덕이며 소주잔을 들어 올렸다.

두 개의 유리잔이 만들어 내는 맑고 청명한 소리가 진심으로 친구들을 위하는 우리의 무언의 결의를 알리는 듯 작지만 강렬하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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