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 (2)
쩌어어어기 멀리서 우리가 있는 도서관을 향해 걸어오는 저 생명체는 김창회처럼 보였다.
신장 192cm, 몸무게 120kg, 3대 600을 친다는 김창회 특유의 외형적 특성이 있다.
일단 빵빵한 근육, 창회라는 이름을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창회의 근육이지.
거기에 친구들만 아는 한 가지 특성이 더 있는데 바로 특유의 팔자걸음이다.
운동을 그렇게 하는 창회 저 자식, 덤벨을 들어 올릴 때, 어깨 각도를 그렇게 신경 쓰는 놈이 정작 걸을 때는 팔자로 걷는다. 허벅지에 근육이 너무 많이 붙어서 일자로는 도저히 못 걷는 거지.
아무튼, 저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딱 김창회 같은데, 김창회라고 확신을 못 하겠는 게….
일단 창회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저 사람. 저 여자. 아직 거리가 멀어서 확인은 못 했지만 높은 확률로 예쁠 것 같은 저 여자가 김창회의 존재를 의심케 하고 있다.
여자랑 걷고 있다고? 김창회가?
김창회 하면 찬희, 중훈이와 더불어 우리 과에서 ‘친구나 선배로서는 좋지만 남자친구로서는 조금 애매한 베스트 3’에 빠지지 않는 분 아니시던가.
아. 물론 김창회가 뭐랄까, 중훈이나 찬희와는 다르게 키도 크고, 여자들이 선호하는 몸매는 아니지만, 그래도 몸도 좋고, 평소에 말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얼굴도 뭐 잘생겼다고는 못 해고 그렇게 못난 얼굴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기는 한다.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 초에도, 그렇게 과묵한 김창회에게 호감을, 아니, 호감까지는 아니고 호기심을 보이는 신입생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김창회의 실체를 눈치 채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김창회의 실체가 뭐냐고?
한 단어로 정의가 가능하다.
고자.
아 물론 ‘고자 되고 10억 받기 vs 그냥 살기’에서 의미하는 육체적 의미의 고자가 아니고, 정신적인 고자라는 이야기다.
고환은 멀쩡하겠지? 멀쩡할 거다.
고환에서 분비되는 테스토스테론 도움 없이 저런 근육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할 테니까.
그렇게 육체적으로 멀쩡한 사지를 가지고 있음에도, 아니 보통 남자보다 훌륭한 하드웨어를 가지고 있음에도 여자에 도통 관심이 없다.
누가 예쁘다거나, 마음에 든다거나, 좋다거나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들어본 적이 없다.
최근에 지연이에 관해서 비슷한 이야기를 하기는 했는데, 그게 여성으로서 좋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괜찮다는 이야기였지, 중훈이처럼 짝사랑을 하고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가 남성잡지 막심 볼 때, 저 녀석은 멘즈헬스 보고 있고, 우리가 모델 수영복 사진 볼 때, 저 녀석은 우락부락한 남자가 수영복 입고, 포즈 취하는 사진 보면서 ‘근육 진짜 기깔난다’같은 소리만 하고 있으니, 정신적인 고자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창회한테 관심 있는 여자 후배가 ‘오빠, 오늘 저녁에 수업 끝나고 뭐 해요?’ 하니까 ‘응? 오늘은 하체 하는 날인데?’라고 얘기했다는 소문도 있고, 자취하는 여자 후배가 ‘오빠, 라면 먹고 갈래요?’ 하니까 ‘아니. 난 탄수화물은 보충제로만.’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소문도 있는 그런 김창회가 여자와 같이, 그냥 여자도 아니고 예쁠 가능성이 있는 여자와 같이 걸어오고 있다고?
***
‘일단 숨자.’
나는 중훈이에게 그렇게 수신호를 보냈다.
고개를 끄덕인 이중훈이 재빨리 도서관 입구 쪽 사각지대를 가리킨다.
나는 자세를 낮추고 재빨리 이중훈이 말한 곳에 몸을 숨긴다.
역시 얍쌉 이중훈 선생. 그 짧은 시간에 아주 기가 막힌 자리를 찾아냈다.
우리가 엄폐하고 있음을 적은 눈치 채기 어렵고, 그런 적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는 환상적인, 적도, 자기장도 걱정할 필요 없는 환상적인 위치를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안심해서는 안 된다.
적은 기습 한 방에 골로 보낼 수 있는 잡몸 박찬희가 아니라, 기본 20트는 기본으로 깔고 가야 하는 무명왕 김창회다.
완벽한 공략법을 모르면 절대 쓰러트릴 수 없고, 설사 공략법을 완전하게 숙지하고 있다고 해도, 한 번만 타이밍이 어긋나면 바로 ‘You Died’가 뜬다.
그렇게 우리는 유리한 포지션을 잡았다고 해서 방심하지 않고 최대한 긴장감을 유지한 채로 김창회라는 최종 보스가 다가오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맞지?’
이중훈이 작게 물어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얼굴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왔고, 근육질에 팔자걸음으로 걸어오는 보스몹 김창회가 맞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김창회를 확인했으니, 당연히 나와 중훈이의 시선은 당연히 김창회와 동행하는 것으로 의심되는 여성에게로 향한다.
‘크흑.’
옆에서 중훈이가 억지로 신음을 참아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왜 그러는지 묻지 않았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도 같은 마음이었다.
왜 예쁘지?
창회와 나란히 걸어오는 여자는 예뻤다. 예뻐도 그냥 예쁜 게 아니라 아주 예뻤다.
우리 서현 님, 그리고 지연이와 비교하면 어떠하냐고?
그게, 누가 더 예쁘다 또는 덜 예쁘다 하고 단순 비교할 수가 없다. 장르가 다르다고 할까?
뭐랄까? 로드 자전거와 MTB, 그리고 BMX 모두 바퀴 두 개 달린 자전거이지만, 용도는 전혀 다르잖아.
마찬가지로 우리 서현 님이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스타일이고, 지연이는 달빛과 소녀와 처녀들의 신인 아르테미스 쪽 아름다움이라면, 지금 창회 옆에서 걷고 있는 저 언니는 지혜와 문명, 그리고 전쟁의 여신인 아테나(Athena)를 떠올리게 했다.
건강미(健康美)랄까? 손에 스포츠음료 한 병을 들게 하고, 거기에 로고 찍어서 그대로 광고로 내보내도 될 것 같은 그런 스포티한 아름다움이 그녀에게서 느껴졌다.
나는 재빨리 가능성 하나를 떠올렸다.
동행이 아닌 것이 아닐까? 서로를 알지 못하는 두 사람이 그저 우연히 근거리에서 걷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가설 하나를 떠올렸지만, 바로 폐기해야 했다.
도서관을 가리키며 뭐라 뭐라 설명하는 김창회와 그런 김창회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의 모습에서, 두 사람이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창회는 창회하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설명을 하는 얼굴이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고 감정 없는 얼굴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옆에 있는 여자는 웃고 있었다. 창회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처럼 보였고, 중간 중간 질문을 하거나, 추임새를 넣는 것처럼 보였다.
왜 여자가 남자에게 호감이 있으면 무의식적으로 보내는 시그널이 있다고 하잖아. 눈이 자주 마주친다거나, 의자를 땡겨서 앉는다거나, 이야기에 리액션이 좋고, 잘 웃어주고 한다거나.
나는 다시 이중훈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어떻게 하지?’
자. 우리에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능동적인 방식과 수동적인 방식.
일단 능동적인 방식은 쉽게 말해 직접적으로 컨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저 두 사람이 최단 거리까지 다가왔을 때, 기습적으로 등장해 동선을 차단하고, 어. 창회야. 토요일에 어쩐 일이야? 우연이네. 근데 이분은 누구셔? 아. 일단 우리 어디 앉아서 이야기할까?
그렇게 능동적인 방법이 직접적인 접촉을 의미한다면, 수동적인 방식은 뭐, 지금처럼 숨어서 지켜만 보는 거다.
아. 물론 방법이 하나 더 있기는 하다. 체포, 구금, 진실을 얻어내기 위한 물리적 수단.
하지만 김창회에게?
박찬희라면, 어제 보았던 것처럼 박찬희와 최유라가 저 지랄을 하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면, 아주 높은 확률로 마지막 방법을 채택했겠지만, 지금 우리에게 다가오는 저 괴물은 박찬희가 아니라 김창회다. 또 옆에 여성분은 모르는 분이고.
그러니 방법은 둘 중 하나. 우연히 만난 척을 하던가, 아니면 계속 이렇게 숨어 있든가.
‘지켜보자.’
이중훈의 대답이다.
뭐, 당연한 선택이다. 목숨은 소중하니까.
우리는 그렇게 사각지대에 몸을 숨긴 채로, 실체를 알 수 없는 분노를 씹어 삼키면서, 김창회가 아름다운 여성분과 도서관 주변을 산책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형님! 쏘주도 주세요!”
이중훈이 외친다.
“오케이!”
주방 안에서 들려오는 사장 형님의 시원한 대답.
여기가 어디냐 하면 신림역 근처에 있는 정육식당, 우리 단골집이자, 아지트이자, 지난번 제이슨 임 사건 났을 때, 고기 먹었던 바로 그 식당이다.
여기에 지금 나와 이중훈이 앉아 있다.
이중훈이 공부할 기분 아니라고 술이나 먹으러 가자고 했고, 평소 같으면 너 혼자 죽을 때 까지 마셔라 하고 싶지만, 타이밍 좋게 우리 서현 님도 오늘은 저녁 먹고 들어올 것 같다고 문자를 보내셨거든.
그러니 겸사겸사, 저녁도 먹을 겸, 앞으로의 대책을 의논도 할 겸, 단골 정육식당으로 찾아온 것이다.
“근데 오늘은 어쩐 일로 니들 둘만 왔냐?”
사장 형님이 삼겹살 3인분과 소주 한 병을 내려놓으며 물어보신다.
“그러니까요. 어쩌다 우리 둘만 오게 되었는지….”
내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하니까 사장 형님이 특유의 시원한 웃음과 함께 내 등을 팡팡 쳐주고는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셨다.
저 형님 다 좋은데, 가끔 저렇게 장난식으로 때려 주는 거. 얼마나 아픈지 모르는가 보다.
불판에 고기가 올라가고, 소주잔이 채워진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고기를 굽고, 소주를 마셨다.
소주 한 병이 다 비워질 무렵, 이중훈이 말을 시작한다.
“어제. 찬희 그 자식하고 유라. 확실해 보였지.”
“어. 최소 썸.”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최소 썸. 어쩌면 그 이상.
“그 썸이 연애로 발전할 확률은?”
“상당히 높지.”
원래 오래 아는 사이가 한번 제대로 불붙으면 무섭다. 감점이 거의 없으니까.
감점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이냐 하면, 소개팅 같은 경우, 처음에 서로에게 100점을 부여하고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처음 만났을 때 외모나 조건이나 그런 부분에서 추가점수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100점이 시작점이 된다.
반면에, 아는 사이면? 예를 들어 나와 유라와 같은 진짜 친구 사이라면? 보통은 한 65점 정도. 잘 주면 한 70점, 그 정도에서 시작한다고 보는 게 맞다.
다시 소개팅으로 돌아가 보자. 100점에서 시작한 두 사람은 썸 단계로 들어가고, 처음에야 서로 뭐 잘 해줄라고 난리들을 치니까 110점이 되기도 하고, 미쳐서 1,000점이 되기도 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감점이 시작된다.
서로에 대한 감점이 각자가 정해 놓은 기준점 아래로 떨어지지만 않으면, 썸에서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것이고, 만약 ‘오늘부터 1일’ 이 지랄하기 전에, 기준점 아래로 떨어지면 빠이빠이 하는 것이고. 그런 이야기다.
반면에 오래 알고 지낸 사이는? 특히 찬희와 유라 같은 관계는?
일단 점수가 잘 안 떨어진다. 왜냐하면 서로 볼꼴 못 볼 꼴 다 지켜봤으니까. 그러니까 한쪽에서 아주 미친 짓을 하지 않는 한, 처음 시작점 밑으로 점수가 떨어지는 경우는 없다. 기본적으로 플러스 게임이라는 이야기다.
마이너스가 되기는 어려운데, 플러스는 또 쉽다. 소위 말하는 콩깍지 필터 효과. 그냥 친구일 때는 별것도 아닌 행동들이, 썸 단계로 들어가면 의미가 부여된다. 그게 다 점수가 된다는 이야기다.
물론 케바케, 커바커, 사바사이긴 하지만, 보통 그렇다는 이야기다.
“예상처럼 찬희와 유라가 최소 썸의 단계라면? ‘오늘부터 1일’ 이 지랄까지 진짜 멀지 않았다는 이야기. 아니, 어쩌면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나의 냉정한 판단에 이중훈이 주먹을 꽉 쥔다.
“그럼 창회는….”
우리가 그렇게 창회에게로 넘어가려는 그때, 식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적으로 나와 중훈이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막 식당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어라?
저 녀석이 갑자기 여긴 어떻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