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 바야흐로 사랑의 계절 (1)
유 선생님 연구실에서 나온 나는 땅을 바라보며 걷고 있었다.
걸을 때 땅을 바라보는 것은 초집중해서 생각할 때 하는 내 버릇이다.
나는 그렇게 땅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학교를 걸어 내려가고 있다.
그러니까 유 선생님이 지연이 딸….
아니! 뭔 헛소리야!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임마!
다시! 지연이가 유 선생님의 딸, 아니, 유 선생님의 영애(令愛)라는 말이지?
아니. 뭐 그림이 이상하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우리 지연이, 참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마음씨 깊고, 현명하고.
유 선생님이 따님도 참 잘 키우셨네. 역시 존경하는 유 선생님.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문제는 지연이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거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유 선생님도 그 사실을 알고 계시다는 것이고.
유 선생님은 내가 존경하는 스승님, 그런데, 할아버지를 보필하는 사주 중 하나, 그렇기에 나는 유 선생님에게 작은 어르신, 그런 나를 지연이가 좋아하고,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고 계시고, 나는 유 선생님을 존경하고….
으아! 머리 아프다. 갑자기 족보가 겁나 꼬이는, 빠른 생일 놈들 때문에, 앞뒤로 한 2년 정도가 꼬여 버리는 그런 느낌이다.
잠깐만, 나 혹시 뭐 말실수한 거 없을까? 지연이 앞에서 선생님 욕한 적 있던가?
아냐. 없다. 존경하는 유 선생님 욕이라니, 그런 건 있을 수 없다. 없어. 그런 적 없어.
그러면 선생님 앞에서 지연이에 대해 험담한 적은?
그것도 걱정할 필요 없겠네. 우리 지연이 그 녀석이 얼마나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마음씨 깊고, 현명한데 험담을 하겠어.
아니. 혹시? 설마 유 선생님 앞에서 ‘우리 지연이’ 어쩌구 한 것은 아니겠지? 아버지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내가 아직 결혼을 안 하고 딸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고향 형들 중에서 일찍 결혼해 딸 가진 아빠들을 보면, 아직 애가 걷지도 못하는데, 나중에 사윗감이라고 와서 따님을 달라느니 그딴 소리를 하면 죽여 버릴 거라고,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진짜로 죽여 버릴 거라고 그러고 다니던데.
설마 내가 유 선생님 앞에서 ‘우리 지연이’ 어쩌고 하지는 않았겠지?
‘제 여식은 한수 군이 작은 어르신이라는 것을, 어르신을 계승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딸이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애비의 어리석은 욕심으로 이야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문을 닫기 전 들었던 유 선생님이 마지막 말.
등골을 타고 땀이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경고지? 내 딸 건드리면 죽어. 그런 경고지? 그치?
***
피곤하다.
몸도 그렇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하다. 마치 날쌘 정찰병 〈^오^〉에게 독침을 맞은 기분이다. 맞아서 아픈데, 도트 데미지가 계속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고 ‘도트뎀 끝났네? 그럼 한방 더! 그건 좀 따가울 거야. 흫흫핳핳!’ 소리를 들으면서 추가 독침을 또 맞고, 또 맞고, 또 맞는 그런 기분이랄까?
이럴 때는 머리를 비워야 한다.
괜히 스트레스 풀겠다고 게임 같은 거, 특히 하늘이 점지해준 팀에 나 빼고 다 트롤뿐인 AOS나, 말도 안 되는 시점에 말도 안 되는 카드가 튀어나오는 운빨좆망겜 같은 거 하면 안 된다. 영구적으로 남는 트라우마 입는다.
머리를 비우고 싶을 때는?
나만의 방법이 있지.
신지수에게 차이고 1분 1초가 지옥 같던 그 엄혹하고 끔찍한 나날을 버티던 방법.
인문관 올라가는 도로 앞 벤치.
거기로 가자. 가서 오랜만에 나라 잃은 놈처럼 앉아있자.
물론 그 벤치가 저주받기는 했다. 거기 앉아 있으면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저주가 걸려있기는 하지만….
설마. 오늘 토요일인데, 학교에 사람도 없데, 누가 말을 걸어오겠어?
가서 한 30분만 앉아 있다가 가자.
나는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벤치 쪽으로 걸어갔다.
***
일단, 내가 걱정한 것처럼 벤치에 있는 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그 벤치에 앉을 수가 없었다.
왜냐. 이미 누가 앉아 있었거든.
나는 멀리서 누군가가, 아니, 누군가들(?)이 내 전용 벤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처음이었다. 나 말고는 저 자리에 누가 앉는 꼴을 본 적이 없는데. 누가?
뭐 마음 같아서는, 니들 어디 식구야? 어디 식군데 기본적인 예의를 지킬 줄을 몰라? 니들 위에 누구야? 함부로 남의 나와바리에 침범해도 된다고 그렇게 배웠어?
그렇게 강짜를 부리고 싶지만, 평화를 사랑하고 상식을 가진 민주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내가 그럴 수는 없고, 근처에 가서 내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은 벤치를 먼저 선점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나 슬쩍 보고 오겠다는 생각으로 그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걸어가는데, 점점 가까워 보이는 뒷모습이 어딘가 모르게 낯설지 않다.
누구지? 내가 아는 사람인가? 가서 인사해야 하나? 앉아 있으면 누군가 찾아와서 말을 거는 저주는 결국에는 실현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 더 다가가니!
진철이 형이었다.
진철이 형은 뭐, 앉아 있을 만하다. 내가 저기 앉아 있을 때, 가장 많이 찾아온 사람이 저 냥반 아니던가.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럼 그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야? 여자처럼 머리를 길게 기른 저 사람은?
설마. 진짜 여자? 여성? XX염색체?
에이. 설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철이 형인데.
지식인의 우울함이 일종의 매력 요소로 어필하는 일제강점기도 아니고, 진철이 형의 그 우울한 아우라를 뚫고 들어갈 수 있는 여자가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조금 더 다가가니!
여자였다. 여자도 그냥 여자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여자.
수정 누나.
4학년. 축제 때 우리 서현 님에게 살갑게 말 걸어준 수정 누나. 진철이 형 꽐라 되었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가 진철이 형을 챙겼던 수정 누나. 진철이 형 술 많이 먹였다고 다른 선배들을 갈구던 수정 누나. 진철이 형이 우울해할 때 진철이 형에게 다가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했다던 수정 누나.
승환이가 그랬지. 수정 누나가 진철이 형 좋아한다고. 나하고 진철이 형 빼고 다 알고 있다고.
근데 두 사람이 앉아 있다고?
이런 상황에서 평화를 사랑하고 상식을 가진 민주시민이 취해야 할 행동은?
당연히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평화를 사랑하고 상식을 가진 민주시민이기는 한데, 거기에 한 가지 특징을 더 가지고 있다.
바로 ‘호기심이 많은.’
나는 조용히, 발소리 안 나게 주변을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도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릴 가능성이 있는 최대거리와 혹시라도 발각된다면 ‘어? 우연이네요. 마침 그냥 여길 지나가던 길이었어용’이라고 변명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거리의 교차점.
그 주변을 서성거렸다.
“…오빠가… 그때는… 그렇다고… 아니고…”
“…상황이… 상황도… 아니고… 변명이라면…”
그렇게 두 사람의 대화가 뜨문뜨문 들려온다.
그렇게 들려는 오는데, 너무 단편적이라 흐름이 파악이 안 된다.
흠. 뭔가 심증은 가는데 물증은 없는 것 같은 그런 답답함.
조금 더 다가갈까? 발각될 것을 각오하고서 말야. 정보라는 것은 희생 없이는 얻을 수 없는 것이니까.
정보 하니까 생각나네. 만약 승환이가 있었다면 그 자식은 어떤 방법을 선택했을까? 머리 좋은 그 자식 분명히 뭔가 방법을 찾아냈을 것 같은데…까지 생각했는데!
세상에!
수정 누나의 머리가 천천히 옆으로 기울더니, 진철이 형 어깨에 닿는다.
갑자기 빈혈을 일으킨 수정 누나가 정신을 잃었다? 아니면, 진철이 형 어깨에 모기가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최대한 빠른 시간에 모기를 처리하기 위해 머리로….
쓸데없는 상상이다.
저건 그거다. 누가 봐도 그거다.
최소 썸, 내 생각에는 오늘부터 1일 하고 1주일 안 지난 상태. 그렇게 본다.
철수. 나는 그렇게 내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뭐 해요?’ 하면서 두 사람을 놀라게 하는 방법도 생각 안 해 본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 불쌍한 진철이 형, 나중에 장가 못 가면 어떻게 해.
그때 한수 그 자식이 내 앞길을 망쳤어! 그러면서.
그러니 조용히 발을 빼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뒷걸음질을 치는데!
바사삭!
지난가을에 떨어져 아직까지 남아 있던 낙엽이 내 발아래 마지막 수명을 다한다.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이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린다.
당황한 내가 시간아 멈춰라! 그렇게 소리 지르기 전에, 이미 두 사람의 망막에는 내가 새겨져 있다.
“하. 하하. 안녕하세요? 형. 누나.”
나는 그렇게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 손을 흔들었다.
***
어색한 얼굴에 어색한 표정을 하고서, 어색한 인사를 하는 진철이 형과는 달리 수정 누나는 전혀 부끄러울 것 없다는 얼굴로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역시. 수정 누나.
나는 둘이 벤치에서 뭐 하고 있었는지 난 전혀 모르는데요, 하는 얼굴을 하고서는 두 사람에게 날씨가 좋다느니, 배가 고프다느니,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잠깐 하고는 바로 자리를 비켜주었다.
기왕 발각이 되었으니, 뭔가 정보가 될 만한 것들을 수집하고, 약점을 잡아서 그런 것들을 이익화 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훌륭한 소속원이겠지만, 둘 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니 빨리 자리를 비켜주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수정 누나의 눈이 좀 무섭기도 했고.
아무튼 나는 그렇게 자리를 비켰다.
어디로? 도서관으로. 책이나 대출해서 집에 가려고.
집까지 지하철을 대략 40분은 타고 가야 하는데 책 보면서 가면 금방 간다. 쓸데없는 생각도 안 하고.
핸드폰 보면 되는 거 아니냐고?
참나. 나 책방 손자라니까요. 당연히 책이지. 뭐 시대에 뒤떨어졌는지는 몰라도, 나만의 미학이다.
가볍게 볼 수 있는 소설이나 보면서 가야겠다.
오늘은 첩보물이 땡기는데? 그런 거, 초능력을 가진 한 남자가 전 세계를 상대로 활약을 펼치는 그런 첩보물, 기프티….
어? 저거 이중훈 아냐? 저 녀석이 토요일에 학교에는 어쩐 일이지?
“중훈쓰!”
내가 도서관 로비에 앉아 이중훈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이중훈도 나를 보고 같이 손을 흔든다.
“어쩐 일이야? 토요일에?”
“어쩐 일은. 공부하러 왔지.”
이중훈이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공부? 토요일에?”
“할 거 없으면 공부하는 거 당연한 거 아냐? 마음도 싱숭생숭하고, 이럴 때는 공부나 하면서 머리를 비우는 게 최고지.”
이중훈이 말한다.
이런 재수 없는 한국대생 같으니! 너 임마, 어디 가서 그런 말 하면 돌 맞아! 이 자식아!
하지만 그렇게는 말 안 하지.
“그래. 공부 열심히 해라. 우리 중훈이 파이팅!”
나는 그렇게 중훈이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겨 준 다음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런 나의 팔을 이중훈이 잡는다.
이 자식 이거 순 뻥쟁이구만. 토요일인데 할 게 없으니 일단 도서관에는 왔는데, 막상 공부할라니까 하기 싫다 이거 아냐!
하지만 어쩌냐 친구야. 형은 집에 가야겠다. 책 빌려서 집에 가련다. 서현 님 곁으로.
“미안한데, 나도 놀아주고 싶지만 내가 선약이…”
“한수야. 저건 뭐야?”
이중훈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뭐야? 뭔데?
나도 중훈이가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저 멀리서 창회가 걸어오고 있었다.
엄청 예쁜 여자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