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118화 (118/271)

118 : Pseudoreligion

저택을 나온 나와 승환이는 아무 말 없이 어둠이 깔린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 내려갔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다 골목 으슥한 곳에 자리 잡은 놀이터로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들어갔다.

밤의 자식인 어둠과 고요함이 내려앉은 놀이터 한쪽에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고, 그 가로등 아래 벤치가 있었다.

마치 연극무대에서 유일하게 핀 조명을 받고 있는 무대 소품처럼. 우리가 이야기를 나눌 장소라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 벤치에 앉았고, 여전히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서로의 발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 하고 싶은 말도 있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시작이고 뭐고 머릿속이 복잡해 죽겠다.

마치, 마치 살아있는 생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단어와 문장들이 내 머릿속에서 합쳐졌다 떨어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

법무법인 철주는 위장기업이다. 민간정보기업이라는 본체를 감추기 위해, 사람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더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고작 위장용 기업일 뿐인데, 실제 매출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매출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매출이.

두 명의 파트너 변호사, 한 명의 시니어, 그리고 세 명의 주니어 변호사로 이루어진 법무법인 철주는 그리 큰 규모의 로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변호사 수 고작 여섯 명, 그중 반이 주니어. 영세하다는 이야기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규모이다.

하지만 법조계 구성원 중 그 어느 누구도 법무법인 철주가 영세한 소형 로펌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바로 비공식적으로 국내 로펌 중 1인당 매출액이 가장 높은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 어마어마한 매출의 3분의 1 이상, 어쩌면 절반 이상을 법무법인 철주의 대표 변호사인 박기준 변호사가 만들어 낸다. 오직 위장의 목적으로.

강우현의 설명이었다.

“어떠한 업무를 하시는지, 세부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습니다. 설사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씀드리기 곤란한 입장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한 강우현은 대신 민간정보기업이 어떤 포지션인지 설명하기 위해 민간정보기업에 의뢰를 맡길 수 있는 고객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민간정보기업에 의뢰를 맡기기 위해서는, 즉 고객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민간정보기업이 가진 정보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금전적인 능력, 그리고 상호 거래할 유지할 수 있는 신뢰.

그 두 개의 조건을 모두 갖추어야지만 고객의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것.

강우현은 그 예로 두 곳을 들었다. 중앙전자, 그리고 국가정보원.

전 세계 전역에서 수천억 달러 규모의 매출액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중앙전자와 같은 글로벌 기업, 또는 대한민국 정부라는 담보를 가지고 있는 국가정보원, 소위 첩보 기관만이 민간정보기업의 고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강우현의 설명이었다.

‘민간’, ‘정보’, ‘기업’. 각각 분리해 놓으면 이상할 것도, 그리 수상할 것도 없는 세 개의 단어가 하나로 합쳐진 ‘민간정보기업’은 첩보 세계의 구성원 중 하나였던 것이다.

***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승환이었다.

“담배 있냐?”

“없어. 그리고 있다고 해도 여기 놀이터야. 임마.”

“누가 여기서 핀대? 나가서 핀다는 얘기지….”

박승환은 그렇게 말하고는 아쉽다는 듯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담배 이야기하니 담배 땡기네.”

나도 그렇게 말하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끊었어?”

승환이가 물어본다.

“끊을라고.”

“왜?”

“그냥.”

서현 님이 담배 싫어하시는 것 같으니까 한번 끊어볼까 생각해 보겠다는 건데, 그렇게는 말 못 하지.

“너는? 너는 왜 담배 없는데?”

내가 승환이에게 물었다.

“담배 안 피니까.”

박승환이 말한다.

“너 담배 안 피냐?”

“내가 담배 피는 거 본 적 있냐?”

…없는 것 같다.

“그런데 담배는 왜 찾아?”

“딱 타이밍이다 싶어서.”

“타이밍이긴 하지.”

아. 그 생각했더니 진짜 피고 싶네.

내려가면서 살까? 사 버릴까? 아니, 지금 당장 피고 싶은데, 사 올까?

“그 작은 어르신이라는 건 뭐야?”

승환이가 묻는다.

“그게. 설명하자면 긴데….”

“얼마나 긴데?”

사실 길지는 않다.

할아버지가 이 땅의 수호신이고 어르신이라고 불리고, 내가 할아버지 후계자고, 그래서 작은 어르신이라 불린다.

이렇게 깔끔하게 설명할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복잡하달까?”

“얼마나 복잡한데?”

사실 복잡하지도 않지.

말해주는 건 쉽다. 문제는 말해준다고 해서 승환이 저놈이 믿겠냐는 이야기지.

“그 사람이 너희 할아버지를 모시는 거지?”

승환이가 다시 물어본다.

“그 사람?”

“박기준.”

박승환이 그렇게 아버님의 이름을 함부로 말했다.

할아버지에 의해 유교 탈레반 전사로 성장한 나에게는 매우 불편한 상황이었지만, 승환이 이 녀석이 이러는 데에는 또 뭔가 합당한 이유가 있겠지 싶은 생각에 꼰대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 것… 같지?”

내가 그렇게 얼버무렸다.

밤하늘을 바라보던 승환이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그렇게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한다.

“지금 말하든가. 영원히 하지 말든가.”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다.

나는 이 녀석을 안다.

저 말은 진심이다.

에휴. 어쩔 수 없지.

“할아버지를 모시는 네 개의 가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어. 그중에 한 가문이 오늘 너도 본 것처럼 강민철 회장님, 그쪽 가문이고, 그래서 회장님이나, 아까 그 형님. 강우현, 그렇게 몇 명을 알고는 있었는데, 다른 가문이 어딘지, 무슨 일을 하는지, 그런 이야기는 듣지 못했어. 듣지 못하기도 했고, 사실 관심도 없었고.”

나는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너도 갑자기 아버님 전화 받고 여기 온 거잖아. 나도 할아버지가 갑자기 전화해서 여기로 오라고 했다니까? 나는 뭔지도 모르고 왔다가 봉변당한 거고. 야. 아까 너 거실에 들어오면서, 나 처음 봤을 때, 내 놀란 표정 못 봤냐? 너만 놀란 거 아냐. 나도 놀랐다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열 받네?

“그리고. 임마. 말 나온 김에 마저 이야기하면, 내가 뭐, 널 속였냐? 내가 승환이 저 자식은 박기준 변호사님 아들이고, 박기준 변호사님은 계주시라네. 우리 할아버지 쫄따구라네. 그러니까 승환이 저 자식도 내 쫄따구로구나! 그 사실을 꽁꽁 숨겨 놓고 친구 코스프레를 하다가 나중에 결정적인 상황에서 사실은 너 내 쫄따구였다. 신발이나 핥아라!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냐고! 이 자식아! 어? 내가 그런 놈이야? 어?”

내가 생각해도 나름 언변도 있고, 순발력도 나쁘지 않다.

고 두 개가 잘 조합만 되면 웬만한 놈들은 내 앞에서 이빨로는 버텨내지를 못한다.

예를 들어 찬희라든가, 중훈이라든가, 창회라든가.

하지만, 그런 녀석들과는 달리 승환이 이 자식과의 말싸움에서 우위에 서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오늘 어쩌면 내가 1승을 기록할지도 모르겠군.

“나도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끌려와 이게 뭔 상황이냐 하고 있는데, 너는 임마. 무슨 내가 널 속이기라도 한 것처럼, 어? 삐져서는 눈도 안 마주치고. 난 씨바. 무슨 여중생인 줄 알았네.”

승환이 눈동자가 흔들린다. 미세하지만 분명 흔들렸다.

먹혔다. 이건 확실히 먹혔다.

“뭔가 오해가 생길 것 같으면. 어? 물어보면 되잖아. 물어보고, 서로 아는 거 비교해서. 어? 오해 안 생기게. 아까 그 형님 말 기억 안 나? 무지가 오해를 만들고, 오해가 반목과 대립을 만든다잖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물어 보고, 확실해지면 그때 시시비비를 가리든가….”

“그 작은 어르신이라는 것의 정체가 뭔데?”

갑작스러운 승환이의 카운터.

“어?”

“물어보라며?”

“…어.”

“뭔데? 그 작은 어르신이?”

오늘도 1승 힘들겠네.

***

나는 결국 설명해 주었다.

물론 사실 그대로, 우리 할아버지가 수호신이고, 뭐 그런 이야기는 안 했다. 안 믿을 게 뻔하니까.

최대한 각색해서. 뭐랄까? 그 판타지 소설을 드라마화하면서, 촬영이 가능하도록 각색을 하는 것처럼, 그럴싸하게, 믿을만하게, 그렇게 설명을 해주었다.

할아버지가 뭐 이제 중요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고, 그래서 그 네 가문이 할아버지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면서 보필하는데, 내가 할아버지의 유일한 혈육이라 후계자 비슷한 대접을 받고 있고, 그래서 작은 어르신 어쩌구 하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 같은데,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대충 그런 식으로.

잠자코 듣고만 있던 승환이는 내 이야기가 모두 끝났는데도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사이비.”

한참 동안 날 바라보던 승환이의 첫 마디.

“뭐?”

“너가 해준 이야기로만 판단했을 때. 사이비 종교. 그렇게 들려. 흠. 이거 말조심해야겠네. 일단 오해하지 말고. 너의 이야기가 어떤 느낌이냐 하면, 너희 조부님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이시고, 너는 그 후계자고, 그리고 강민철 회장님을 비롯한 네 사람은 사이비 종교의 교주에게 홀려 재산이고 가족이고 다 가져다 바치는 광신도. 그렇게 들려.”

승환이의 말이다.

내가 설명을 잘못했나? 수호신 이야기를 빼서 그런가? 아니, 그 이야기를 넣으면 사이비 종교 빼박캔트 확정인데?

뭐 그리고 승환이 말이 틀린 말도 아니다.

예전에 어떤 책(*)에서 읽었다. 교주는 전지전능하다고 주장하고. 그런 교주에게 신도들이 저의 재산이고 가족이고 모두 교주님 것입니다! 그러면 사이비 종교라고.

딱 우리 할아버지와 강 회장님 모습이네.

“아니. 너의 조부님께서 그 사이비 종교의 교주라는 이야기는 아니야. 너의 설명이 그렇게 들렸다고. 그러니까. 좀 제대로 설명을 해봐.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제대로?”

“그래. 제대로.”

“사실대로?”

“그래. 사실대로.”

승환이가 그렇게 말한다.

뭐, 이제 방법 없지. 사실대로 말하는 수밖에.

“맞아.”

“뭐가?”

“사이비 종교.”

내가 인정했다.

“뭐?”

“아니. 일단 사이비는 빼자. 종교 비슷한 건 맞아.”

내가 그렇게 말해주었다.

승환이는 말없이 날 바라보고 있다.

그 시선이 ‘드디어 미쳤구나.’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할아버지. 수호신. 이 땅의 수호신. 그리고 너네 아버님을 비롯해 네 분이 할아버지 모시는 네 개의 기둥. 사천왕이나 청룡, 백호, 현무, 주작처럼. 그리고 나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다음 후계자. 이게 진실이야. 너 지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박승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안다. 나도 경험 있다.

처음에 할아버지에게 ‘가업을 이어라. 우리 가업은 수호신이다.’ 그런 이야기 들었을 때, 우리 할아버지 노망났다고 생각했더랬지.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지.

“그래. 당연하겠지. 그럼 지금부터 내가 증명해 줄게. 눈 똑바로 뜨고 잘 봐.”

나는 그렇게 말하고, 처음으로 그 문장을 육성으로 말해 보았다.

“시간아. 멈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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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chael Shermer, '왜 사람들은 이상한 것을 믿는가', 류운 역, 바다출판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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