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 카무플라주(camouflage)
감히 내 인생 최고의 디저트라고 단언할 수 있는 매실차와 다식을 끝으로 길고도 길었던 저녁 식사가 끝이 났다.
식사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인주 주재목, 고영건 판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리할 일이 남았다며, 다음 기회에 다시 제대로 인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공손하게 양해를 구하고.
듣기로는 판사 한 명 한 명에게 부여된 업무가 엄청 과중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가 보다. 이렇게 늦은 밤에 또 일을 하러 가야 한다니.
아무튼, 그렇게 판사님이 떠나신 후, 비어있는 자리를 보자 드디어 오늘 저녁 일정이 모두 끝났다는 게 실감이 났다.
나는 고개를 돌려 승환이를 바라보았다.
승환이 녀석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바라본다기보다 노려보고 있다.
저 자식 아까는 별것 아닌 일로 삐진 여중생처럼 눈도 안 마주치더니, 이제는 겁나게 노려보고 있네.
뭐, 왜 저러는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저 녀석이 오늘 저녁 동안 보여준 모습을 생각해 보면, 승환이 저 녀석도 나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여기에 끌려온 것처럼 보였다.
뭐, 그래도 나는 사전지식도 있고, 아는 사람도 있는데, 승환이 저 녀석은 그런 것도 없는 것 같다.
나는 승환이에게 눈짓을 했다.
나가자. 단둘이 이야기 좀 하자. 그런 의미로. 물어볼 것도 좀 물어보고, 설명해줄 것도 좀 해주고.
“귀가하시겠습니까?”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강우현이 물어본다.
“네. 이만 가볼까 하고요. 혹시 일정이 남아 있나요?”
“이후에 예정된 일정은 없습니다.”
강우현의 답이다.
나는 들었냐는 의미로 승환이를 바라보았고, 승환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어디 가서 이야기할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강우현이 말을 걸어온다.
“괜찮으시다면 차 한 잔 어떠십니까? 그리고 친구분도 같이.”
***
나와 승환이는 별도의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강우현이 제안한 티 타임을 위해서.
강우현은 우리 맞은편에 앉아 있다. 하지만 우리 세 사람 사이에 찻잔은 놓여 있지 않았다.
차 한잔하자는 이야기는 진짜로 가벼운 담소를 위한 티 타임을 가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허락해 주신다면 최대한 간결하게 핵심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강우현이 말한다.
고마운 말이다.
안 그래도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 있었다. 아마 승환이도 그럴 거고.
강우현, 이 형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지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짧게 해달라고 내 쪽에서 먼저 부탁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렇게 말해주신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말했고, 승환이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한다.
“이렇게 시간을 내주십사 부탁드린 이유는 계주님, 박승환 님의 부친이신 박기준 변호사님에 대한 추가 설명을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역시 그 이야기였다. 그게 아니고서는 승환이까지 붙잡을 이유가 없겠지.
강우현의 시선이 승환이를 향한다.
“말씀드리기 전에 박승환 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그리고 말씀을 낮춰주시면 더 편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승환 씨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에 대해서는 계주님으로 정리해도 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그렇게 호칭 정리가 이루어진다.
“승환 씨는 오늘 이 자리가 어떠한 자리인지 모르고 오신 것처럼도 보였습니다.”
“갈 곳이 있다는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박승환이 대답하고 강우현이 고개를 끄덕인다.
“계주님으로부터 ‘어르신’ 또는 네 개의 기둥을 의미하는 ‘사주’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계주님이 어떠한 일을 하시는지 알고 계셨습니까?”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승환이의 대답이다.
“아마, 계획이 있으셔서 그러신 것이겠지만, 계주님께서 아무런 말씀도 안 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계주님께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이 순리이겠지만, 기왕 이렇게 자리가 마련된 상황이니, 제가 실례가 안 되는 선에서 계주님에 대해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강우현이 제안했다.
하지만 승환이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말없이 강우현을 바라만 보고 있다.
나는 그런 승환이의 시선에서 어떤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제대로 읽어냈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무엇이든 자신과 관계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는 거부의 메시지와, 사실을 알고 싶다는 근원적 욕망, 거기에 더해 왜 강우현이 그런 제안을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뒤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승환이는 감정 가운데 의구심을 가장 먼저 꺼내 들기로 마음을 먹었나 보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한참을 침묵하던 승환이가 물어본다.
“두 분 사이에 무익한 오해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강우현의 대답이었다.
박승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의구심이 분노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승환이가 왜 그렇게 반응하는지 알 것 같았다.
친구끼리 있을 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박승환 저 자식은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저렇게 컸는지 모르겠다.’며 놀리고는 했지만, 나뿐만 아니라 다른 녀석들도 승환이와 아버님 사이가 일반적인 부자 사이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승환이에게 먼저 가정사를 물어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녀석이 먼저 이야기한다면 들어줄 의향은 있었지만, 친구라는 이름으로 선을 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강우현의 제안은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승환이와 아버님 사이에 개입할 명분이 될 수 없으니까.
자신을 노려보는 박승환의 시선을 담담히 받으며 강우현이 말을 이었다.
“잘못 이해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말씀드린 오해는 계주님, 아버님과의 사이를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두 분 사이를 말씀드린 거죠.”
그러면서 강우현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응? 나와 박승환 사이?
“작은 어르신. 몇 가지 여쭙겠습니다. 이전에 계주님을 만나신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 처음 뵈었습니다.”
“오늘 처음 소개를 받으셨을 때, 계주님이 친구인 승환 씨의 부친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몰랐습니다.”
나는 재판정(裁判廷)에 불려 나온 증인처럼 질문에 성실하게 답하면서, 이러한 질문을 하는 강우현의 의도가 무엇인지 대충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우현도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 내내 승환이가 나에게 적의를 보였다는 사실을.
오해로 인한 승환이의 적의가 이후에 이어질 우리 대화에까지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일종의 사전 작업을 하려는 것. 그것이 강우현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분, 승환 씨가 사주의 후계 자격으로 오늘 참석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습니까?”
질문을 받은 나는 승환이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눈은 나를 향해 있었다.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알고 있었어?
나는 그런 승환이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몰랐습니다.”
내가 답했다.
그렇게 나에 대한 증인신문을 마친 강우현이 승환이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승환 씨도 친우가 작은 어르신이라는 사실을,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다는 사실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맞습니까?”
“…네.”
승환이가 말한다.
강우현은 우리 둘을 바라보며 빙긋 웃는다.
“무지는 오해를 불러오고, 오해는 반목과 대립으로 이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두 분 사이에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주제넘지만 개입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두 분이 대화를 나누실 때, 조금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전해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승환 씨에게 물어본 이유입니다.”
강우현이 그렇게 정리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둘 다 몰랐으니까 서로 의심하지 말고, 앞으로 둘이서 대화하는 건 좋은데 기왕이면 제대로 알고 이야기를 해라. 뭐 그런 이야기다.
“이제 계주님에 관해 설명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강우현이 승환이에게 물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승환이가 그렇게 말하며 작게 고개를 숙인다.
강우현이 날 바라본다.
나도 작게 고개를 숙였다.
“두 분은 민간정보기업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강우현의 이번엔 우리 둘에게 동시에 물어본다.
나와 승환이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둘 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라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아니 강우현이 말해주기 전까지 그런 단어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들어 본 적 없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강우현은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참나. 그런 표정 할 거면 물어보지를 말던가.
“민간군사기업, PMC라는 약자로 더 많이 불리우는 민간군사기업에 대해서는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민간정보기업은 정보 세계에서 활동하는 PMC라고 생각하시면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예전에는 국가만이 보유할 수 있는 군대의 영역이었던 군사 임무의 일부를 PMC가 수행하는 것처럼, 민간 차원에서 접근할 수 없었던 영역의 정보를 취급하고 있다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서방세계와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약 10여 개의 민간정보기업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는, 아니, 나와 승환이는 눈만 멀뚱멀뚱 뜬 채로 강우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계주님, 그러니까 승환이 아버님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그러지 않았나?
그런데 왜 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10여 개의 민간정보기업 중 한반도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민간정보기업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민간정보기업의 수장이 바로 계주님이십니다.”
나는, 아마 승환이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그저 강우현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니. 한국말이니 당연히 알아는 들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멀뚱멀뚱 쳐다보는 우리를 보면서 강우현이 말했다.
“제가 조금 전, 식사를 하면서 계주님의 역할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계주님에게 부여된 역할을 단순히 하나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나만 꼽는다면 정보를 다루는 임무라고 말씀드렸었습니다. 계주님이 운영하시는 민간정보기업은 계주님의 역할 수행을 위한 도구입니다.”
나는 그제야 내가 강우현의 말을 왜 이해하지 못하는지를 깨달았다.
낮에 회사 다니고, 밤에 편의점 알바로 투잡 뛴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변호사와 정보상이 겸업이 가능한 직업인가?
“아버님 변호사시라며?”
내가 승환이에게 물었다.
승환이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우리 두 사람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강우현이 말했다.
“제가 두 분께, 특히 승환 씨에게 말해주고 싶은 부분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승환 씨가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던 모습,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무법인 철주, 그런 법무법인 철주를 이끄는 변호사 박기준이라는 모습은 민간정보기업, 그리고 계주님의 본모습을 감추기 위한 일종의 위장, 카무플라주(camouflage)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강우현이 승환이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