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 니가 왜 거기서 나와? (2)
고급스럽지만 화려하지 않은 거실 한 가운데 놓여 있는 테이블. 그 테이블 주변을 아홉 명의 사람들이 둘러싸고 있다.
가장 상석에 할아버지.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좌우에 4주의 대표들이 앉아 있다.
나는 할아버지 뒤에, 강우현은 강 회장님 뒤에 서 있고, 오늘 처음 본 샤프한 얼굴의 남자는 차기 대권 주자로 꼽히는 이현웅 씨 뒤에 서 있다.
그렇다면 승환이는?
유 선생님 뒤에?
아니다.
승환이는 마치 칼을 연상케 하는 날카로운 인상의 중년 남자, 자신을 ‘계를 담당하는 박기준’이라고 소개했던 남자분 뒤에 서 있다.
나는 승환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승환이는 무표정한, 평소에 친구들에게 보여준 적 없는 그런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정면만을 응시하고 있다.
나는 그런 박승환의 얼굴을 훔쳐보면서 생각했다.
저 자식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아니, 물어볼 필요도 없겠지. 박승환이 저기 서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강우현이 강 회장님 뒤에 서 있는 것처럼 박승환도 미래의 기둥, 4주의 후계를 이어갈 주재목이기에 저기 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승환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물론 승환이 아버님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승환이의 말에 따르면 아버님은 어둠의 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했다. 장영호 사무실에 쳐들어갔을 때 간접적으로 확인하기도 했고. 몇 시간 전 승환이는 그런 아버지의 호출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박승환이 여기에 나타났다는 것은?
승환이의 아버님이 4주 가운데 하나이고, 그리고 승환이도 강우현과 마찬가지로 4주의 후계라고 한다면 퍼즐이 척척 들어맞는다.
아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사실은 승환이가 저기 서 있다는 것이고, 승환이도 알고 있었냐 하는 것이다. 내가 작은 어르신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조금 전 놀란 표정을 봤을 때, 모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승환이와 관련된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박승환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짧은 순간이지만 분명히 눈이 마주쳤다.
하지만 승환이는 바로 시선을 피해버렸다. 그 녀석은 다시 무감정한 눈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승환이의 모습에서 나는 이유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내가 아는 그 박승환이 아닌, 다른 사람 같은 그런 위화감을.
***
모두가 자리를 잡고, 주재목(柱材木)이라고 불린 후계들의 소개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역시 강우현이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강우현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소개한 강우현은 할아버지, 나, 그리고 다른 세 사람의 기둥에게 차례차례 고개 숙여 인사를 올렸다.
“많이 부족합니다만, 성심을 다해 작은 어르신을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내 눈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하는 강우현을 다른 사람들은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뒤에 서 있어서 볼 수 없지만, 우리 할아버지도 저렇게 흐뭇한 표정을 하고 계시지 않을까?
뭐 솔직히 강우현, 저 형님이 서현 님 오라버니라서 하는 말은 아니고, 잘나긴 진짜 잘났다.
단순히 얼굴이 잘생겼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잘생기긴 했지. 잘생기기는 했는데, 뭐랄까 한국대 프린스처럼 여자들이 한번 보면 뿅 가는 그런 잘생김은 아니고, 남녀노소 모두에게 호감과 신뢰를 주는 그런 잘생김이라고 할까?
사실 강우현 저 형님의 최고 경쟁력은 잘생긴 얼굴 같은 것이 아니다. 능력이지.
같은 나이 또래의 재벌 3세 경쟁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기업들을 운영하고 있는 반 세대 위 경영진들 중에서도 강우현만 한 인물은 없다는 것이 경제계의 평가라고 하더라.
강 회장님의 뒤를 이어 중앙그룹이라는 선대를 이끌어 나갈 다음 선장으로서 손색이 없다는, 아니, 강우현 이외에 다른 후보가 없다는 이야기고. 서현 님 이야기로는 주주단 내에서 강우현 친위대가 있을 정도라나 뭐라나.
뭐 이래저래 엄친아도 그냥 엄친아가 아니라는 말씀. 그러니 어른들이 저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것도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작은 어르신이라는 타이틀은 나보다 저 형님에게 더 잘 어울릴지도 몰라.
“준비한다고 고생이 많았다.”
할아버지가 당신답지 않게 아주 인자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준다. 친손자인 나는 들어본 적 없는 그런 인자한 말투로.
“허드렛일을 조금 도왔을 뿐입니다.”
그렇게 겸손하게 말하는 강우현에게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여 준다.
아마도 대견하다는 표정을 하고 계시겠지.
그렇게 강우현의 인사가 마무리된 것인지, 할아버지의 시선이 다른 곳을 향한다.
차기 대권 주자 이현웅 씨, 아니, 그 뒤에 서 있는 청년을 향해.
“인사드리겠습니다. 고영건입니다.”
딱 봐도 ‘공부 겁나 잘했어요’라는 얼굴을 가진 남자가 강우현과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나, 그리고 다른 어른들을 향해 순서대로 인사를 올린다.
근데 고영건? 이영건이 아니고 고 씨라고?
“작은 어르신께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시는 분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참석하실 정도면 일반인은 아니신 것 같은데, 그 ‘누’라는 것을 제가 끼칠 가능성이 더 높은 것 같은데요?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고개를 숙였다.
“잘 지냈는가. 바쁘다고 들었는데, 와주어서 고맙네.”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하자, 이현웅 씨가 대신 말을 받는다.
“하하. 우리 고판이 아무리 바빠도, 아무리 일이 많아도 어르신의 부름보다 우선시 되는 것이 있겠습니까?”
“맞는 말씀이십니다.”
고영건, 아니, 방금 고판이라 불린 남자가 작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고판? 설마 판사 할 때 그 ‘판’?
사법고시를 보는 시대도 아니고, 많아봤자 서른 초반인데, 저 나이에 판사?
나의 그런 의문이 해소되기도 전에 할아버지의 시선은 고영건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로?
아직 자신의 소개를 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 승환이에게로.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박승환에게 모인다.
박승환은 강우현이나 고영건이 보여 주었던 것처럼 할아버지를 시작으로 어른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대상에서 나는 빠져 있었다.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박승환입니다.”
작년 OT에서 저 녀석을 처음 만나 친구가 된 이후,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딱딱한 말투였다.
단지 말투만 딱딱한 것도 아니었다. 인사를 할 때 동작도,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얼굴 표정도, 내가 아는 승환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이질적이다.
“그래.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지만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처음이로구먼. 한수 할애비네.”
할아버지가 말한다. 말투는 마치 집에 놀러 온 손자의 친구를 맞이하는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저도….”
승환이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날 힐끗 바라본다.
“저도 한수로부터 할아버님 말씀을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그런가. 저 녀석이 좋은 말을 하지는 않았겠지. 아무튼, 승환 군은 조만간 시간을 한번 내어주게.”
“알겠습니다.”
승환이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마치, 자신의 연기를 전부 끝낸 배우처럼, 조금 전 무감정한 눈으로 다시 정면만을 바라보고 있다.
나에게는 단 한 번도 시선을 주지 않고서.
이상하다. 저 녀석. 오늘 확실히 이상하다.
그렇게 승환이까지, 3명의 젊은이, 주재목이라고 불리는 세 사람의 소개가 끝이 났다.
할아버지가 뒤에 아무도 없는 유 선생님을 바라보셨고, 유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셨다.
자리에서 일어선 유 선생님의 시선은 할아버지가 아닌 나를 향해 있다.
“작은 어르신께 죄송한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어르신께는 미리 말씀을 드렸지만, 저희 쪽 주재목은 사정이 생겨서 오늘 이 자리에 참석을 하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따로 인사를 올리는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작은 어르신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다시 나에게 고개를 숙이신다. 한국대 진학의 유일한 이유이자 목적이신 유 선생님께서 나에게 머리를 조아리시는 이 상황이 너무 어색했다.
나도 유 선생님을 마주 향해 최대한 예의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한편으로 궁금하기는 했다. 유 선생님의 후계자가 과연 누구인지, 혹시 또 내가 아는 사람인지, 오늘 왜 참석하지 못했는지.
그렇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어느 누가 나온다고 해도 그리 놀랄 것 같지도 않다.
누구라고 하여도 유 선생님과 승환이. 이 두 사람의 임팩트를 뛰어넘을 수는 없을 테니까.
***
그렇게 모든 인사와 소개가 끝나고, 나를 포함해 ‘주재목’이라고 불린 네 명의 젊은이들은 거실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편하게 젊은 사람들끼리 저녁 식사를 하라는 어르신들의 배려였는지, 아니면 자기들끼리만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겠다는 꼼수인지 모르겠지만….
설마 그렇겠나 싶다가도, 이런 고급주택을 숨겨놓은 할아버지의 음험함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수 있겠다 싶다. 전례가 있는 합리적인 의심이다.
어찌 되었든, 우리 네 사람은 거실에서 쫓겨나 구석진 어딘가로 안내를 받았다.
물론 구석진 어딘가라고 해서 갑자기 신분이 격하된 소공녀가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는 허름한 다락방은 아니고, 고급주택에 걸맞은 크기의 방 중 하나였다.
나름 고급스러워 보이는 테이블 위에는 네 세트의 식기가 세팅되어 있었는데, 애초부터 우리들은 여기서 밥을 먹기로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무언가를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저녁 시간이었고, 배가 고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배고픔보다는 정신적 피로가 더 크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먹어 허기를 메우는 것보다는 지금은 당장 머리를 쉬게 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침대에 누워 유튜브나 보다가 잠든다던가.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나는 일단 얌전히 식탁에 앉기로 마음을 먹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버릇없이 내 멋대로 행동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뭐, 실질적인 관계는 우선 뒤로 미뤄두고, 형식적으로만 봤을 때, 지금 이 저택에서 내 서열은 할아버지에 이어 두 번째라고 볼 수 있다. 지금 이 공간에서는 가장 높고.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난 밥 안 먹어. 바로 갈래’라던가, ‘친구랑 내가 할 이야기가 있으니 다들 기다려라’ 같은 싸가지 없는 행동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렇기에, 더더욱 함부로 행동하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강약약강은 내 미학과는 맞지 않아. 강강약약이 내 스타일이지.
아무튼 버릇없이 굴지 않겠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
두 번째 이유도 첫 번째 이유와 관계없는 것은 아닌데, 딱 봐도 오늘 이 모임, 아니, 행사에는 많은 준비가 들어갔다. 예를 들어 오늘 이 모임에 참가한 인원들의 면면을 봐도 그렇고, 또 오늘 모임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강 회장님. 그리고 강우현이 오늘 모임의 준비 위원장과 실행위원 역할을 수행한 것이 분명한데, 그런 상황에서 내 멋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은 두 분의 얼굴에 먹칠을 하게 된다는 이야기.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두 분에게 그러면 안 되지. 처조부와 손위처남이신데 말이야.
세 번째로, 오늘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를 확실히 확인하고 싶었다. 조금 전 거실에서 소개와 인사를 통해서 오늘 모임의 성격을 대충은 파악했지만, 아직 모르는 사실이 많았다. 그리고 내가 예상하건대 지금의 저녁 식사 시간에서, 젊은 사람들끼리의 있는 자리에서 강우현이 내 궁금증을 해소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승환이. 승환이 저 녀석과 나눌 이야기가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질문이 있었다.
알고 있었는지, 알고 있다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그 질문을 하고 싶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저 녀석도 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을 테고.
하지만 박승환 저 녀석은 여전히 날 바라보고 있지 않다. 아는 체는커녕, 눈조차 마주치려 하지 않고 있다.
아까 전부터 계속 저 상태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승환이 저 녀석이 나에게 적의(敵意)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