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 니가 왜 거기서 나와? (1)
할아버지가 거실에 모습을 보이자 미리 테이블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세 명의 중년 남성이 일제히 허리를 굽힌다.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천천히, 그리고 깊게 고개를 숙인다.
할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그리 짧지 않은 인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그들이 허리를 펴고 나서야 다시 걸음을 옮긴다.
가장 먼저 유 선생님의 손을 잡고, 악수를 하면서 ‘그동안 잘 지냈는가’ 그런 말을 하면서 어깨를 가볍게 툭툭 쳐준다.
비단 유 선생님뿐만 아니라 다른 두 분에게도 악수와 가벼운 덕담, 그리고 어깨를 툭툭 쳐준 다음에야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물론 나는 놀란 표정으로 그런 할아버지를, 아니, 정확히 말하면 왜 여기에 계시는 건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유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상석이라고 불리는 자리에 할아버지가 앉자,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네 명의 중장년 남성이 좌우에 자리를 잡았다.
할아버지 기준으로 왼쪽에 강 회장님.
강 회장님 옆자리에는 처음 보는, 어딘가 모르게 날카로운 느낌을 주는 중년 남성분이 자리를 잡았고, 할아버지의 오른편, 그러니까 강 회장님 맞은 편에는 역시 처음 보는 남자분,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후덕한? 익숙한? 아무튼 그런 인상을 주는 남자분과 우리 유 선생님이 계신다.
“앉게들.”
할아버지의 말에 강 회장님을 비롯한 네 사람이 각자 의자에 앉는다.
나는?
나는 할아버지 뒤에 뻘쭘하게 서 있다. 물론 강우현도 강 회장님 뒤에 서 있고.
테이블은 겁나 큰데, 놓여 있는 의자는 꼴랑 다섯 자리뿐이다. 애초에 나나 강우현의 자리는 없다는 이야기다.
나는 강우현을 바라보았다.
저 형님과 내가 눈빛으로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아니기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강우현, 우리 손위처남뿐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인가요?
내가 눈빛으로 그렇게 물어보았지만, 강우현은 그저 작게 미소를 지을 뿐, 아무런 말이 없다.
대신 강 회장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강 회장님은 좌중을 한번 둘러보고는, 할아버지에게로 몸을 돌린 후, 다시 깊게 허리 숙여 인사한 후 말씀하신다.
“사주를 대표해 귀한 걸음 해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허락하신다면 시작을 하겠습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 무슨 시작? 설마 식사? 나랑 우리 손위처남을 무슨 토템처럼 이렇게 세워 놓고 자기들끼리만 밥 먹겠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
아니, 그거 말고. 지금 뭐라고 하신 거지? 사주? 설마, 그 사주(四柱)?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강 회장님이 말했고, 할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몸에 힘을 불어 넣었다.
왜냐고?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었거든.
그리고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강 회장님을 비롯해 모두가 나에게로 머리를 숙인다.
***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깊게 허리를 숙여서 하는 인사를 읍(揖)이라고 한다.
엎드려 절하는 배(拜)보다는 가벼운 예법이지만, 기본적으로 읍은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 행하는 예절이다.
그리고 저분들, 회장님과 유 선생님이 나에게 읍을 하고 있다. 조금 전 할아버지에게 했던 것처럼.
내 이럴 줄 알았지. 저분들의 시선이 나를 향할 때부터 알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저분들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그때부터 직감적으로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저번에 서현 님이 말씀하셨지. 할아버지를 보필하는 네 개의 기둥이 있다고. 그 기둥을 사주(四柱)라고 부른다고.
강 회장님을 포함해 4명의 중장년인.
뻔한 이야기다. 이 네 분이 바로 그 4주, 네 개의 기둥을 담당하는 각 가문의 가주들이시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는 내가 정식으로 저분들 앞에 소개되는 자리이고.
이거였군. 이것 때문에 날 부르셨던 것이었구나.
나는 그렇게 분석하면서 그분들을 향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아니, 그냥 말해주면 되잖아. 오늘 사주 모임이라고. 인사할 거라고.
그렇게 말해주면 놀라지도 않고, 당황하지도 않았을 텐데, 할아버지는 무슨 예능 피디도 아니면서, 서프라이즈를 하겠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감춰놓는 건데?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마음속으로 다섯까지 숫자를 세었다. 다섯까지 세고 혹시 몰라서 거기에 셋을 더 세었다.
역시 이 타이밍이었어.
저분들과 내 머리가 정확한 타이밍에 동시에 올라간다.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궤를 담당하고 있는 강민철입니다.”
강 회장님이 자신의 소개를 하며 다시 허리를 숙이신다.
물론 나도 다시 읍! 길고 깊게 파워 읍!
이걸 최소 네 번은 해야 한다는 이야기지? 오늘 척추 기립근 단련되겠는데?
그건 그렇고, 궤. 궤를 담당하신다 했다. 아마도 함을 의미하는 그 ‘궤(櫃)’이겠지?
옛날 우리 조상들은 집안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놓은 함에다가 가문의 보물을 보관했다고 한다. 뭐 패물이나, 토지문서 같은 권리문서 말이지. 그리고 그 궤의 열쇠는 가장이 들고 다니거나, 아니면, 가장 신뢰하는 사람에게 맡겼다고 하던데, 강 회장님이 바로 궤의 열쇠를 가지고 계시다는 이야긴가 보다.
뭐, 쉽게 말하면 재정과 경제 부분을 담당하신다는 의미인 것 같다.
중앙그룹을 운영하고 계시니 당연한 이야기인가?
나를 향하던 강 회장님의 시선이 움직인다. 맞은편에 있는 어딘가 익숙한 얼굴의 중년 남자에게로.
나도 그분을 바라본다.
“작은 어르신.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인을 담당하고 있는 이현웅입니다.”
기본적으로 호감 가는 인상에 부드러운 미소를 담아 그렇게 말하고는 허리를 굽힌다.
나도 당연히 그분을 향해 같이 허리를 굽히며 생각했다.
인을 담당한다? 인? 무슨 의미일까?
사람 인(人)? 어질 인(人)? 도장 인(印)? 설마 혼인 인(姻)은 아니겠지? 커플매니저 하시면 돈 많이 버실 인상이시기는 한데….
잠깐만. 이현웅? 설마…. 그 이현웅?
깜짝 놀란 나는 고개를 들어 그분의 얼굴을 다시 확인해보았다. 역시 그분이 맞았다.
저분 유명하다. 전 경제부총리 이현웅.
아니, 경제부총리여서 유명한 건 아니다. 사실 우리 나이대의 대학생들은 경제부총리가 누군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지.
하지만 저분은 유명하다. 정확히 말하면 저분이 쓰신 공부법 책이 진짜 유명하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학생이 있는 집에 저분의 책이 적어도 한 권은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당장 먹고살기 위해 12살의 나이에 허드렛일을 해야만 했던 가난한 집 장남이 중학교 검정고시에서부터 행정고시까지 모든 시험을 단 한 번에 합격한 노하우가 녹아 있는 책이니까.
나도 읽어봤지만, 어떻게 공부해야겠다는 스킬적인 부분보다는, ‘아. 나도 진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멘탈적인 부분에서 도움이 되는 책이다.
중학교 검정고시, 야간 상업고등학교, 입법고시 수석만으로도 이미 대단한데, 고졸이라는 학력의 한계를 극복하고, 한국대 엘리트들이 드글드글한 재경부에서 오직 실력 하나만으로 고위직, 단순히 그냥 고위직도 아니고 장관 자리까지 올라갔다는 스토리는 수많은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보통은 몇 시간 만에 꺼질 불이기는 했지만.
경제부총리에서 물러난 지금의 이현웅이란 사람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면, 여당, 야당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인물 중 가장 대권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정치에 1도 관심 없는 내가 알 정도면 어느 정도 상식을 가진 사람들은 다 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저 양반이 어째서 여기에?
그 질문에 답을 얻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 선생님이시다.
나는 재빨리 자세를 바로 했다.
다음 대권 주자고 뭐고, 유 선생님이시다.
“이렇게 인사드리는 것은 처음이군요. 유주원입니다. 서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유 선생님은 그렇게 자신을 소개하시고 고개를 숙이신다.
나도 당연히 유 선생님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다른 분들보다 조금 더 깊고, 조금 더 길게.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로부터 독실한 유교 탈레반 전사로 육성되어 온 나이기에, 하늘 같은 스승님으로부터 인사를 받는다는 것은 매우 거북스러웠지만, 지금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듣도록 하고,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존경하는 스승께 표했다.
서. 책 서(書)겠지?
그렇게 유 선생님의 인사가 끝나고, 남아 있는 마지막 한 분을 향해 몸을 돌렸다.
확실히 처음 뵙는 분 마지막 신사분을 향해.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박기준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인사.
나도 같이 고개 숙이면서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얼굴과 이름을 되새긴다.
날카로운, 마치 잘 벼려낸 명검 같은 이미지도, 박기준이라는 이름도 내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계를 담당하신다고 하셨다.
계? 경계의 계(界)? 형틀의 계(械)? 계약의 계(契)? 설마 닭 계(鷄)는 아니시겠지?
아무튼 그렇게 각각 궤, 인, 서, 계를 담당하신다는 네 분의 인사를 받았다.
그렇게 인사가 끝나자, 기다렸다는 듯 할아버지가 말한다.
“이 녀석이 내 뒤를 이을 걸세. 보다시피 많이 부족한 녀석이라, 과연 이놈에게 내 뒤를 맡겨도 되는지 아직 확신이 들지를 않네. 하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자네들이 이 녀석을 쓸만한 재목으로 한번 만들어보게.”
할아버지의 말에 네 분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말씀하신다.
“신명을 다하겠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런 네 사람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마치 자네들이라면 내 부족한 손주 녀석을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뭐 그런 표정을 하고 있다.
***
일단 상황을 정리해보자.
오늘은 사주(四柱)모임, 그리고 나를 소개하는 자리.
사주라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선 강 회장님. 중앙그룹을 이끄시는 강 회장님.
전 경제부총리, 차기 대권 주자 중 한 명, 가능성은 둘째 치고, 일단 다음 대통령 후보 중 한 명.
잠깐만. 저번에 서현 님이 그런 말을 했었다. 예전에 왕조를 이루려면 할아버지의 허락이 필요했다고.
그럼 설마 현재 대통령 선거에도 할아버지가 개입하고 그러고 있었던 건가? 이현웅 저 사람이 그 증거고? 우리 할아버지 비선 실세? 아니지. 비선이 아니고, 수렴청정에 더 가까운데?
민주주의를 교육받은 민주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친족이라는 이유로 우리 할아버지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위협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나는 슬쩍 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여기 왜 계신 거죠? 왜 거기 앉아 계신 거죠? 선생님께서도 네 개의 기둥 중 하나이셨던 건가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도대체 내가 모르는 곳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눈치 없이 그런 질문을 할 수는 없지.
마지막으로 날카로운 검 같은 이미지의 남자분을 바라보았다.
누구실까? 처음 보는 분인데, 분명 나는 모르는 사람인데, 나는 왜 이렇게 저분이 신경 쓰이는 것일까?
***
강 회장님이 말씀하신다.
“주재목을 들이겠습니다.”
할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고, 할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치 시나리오라도 써놓은 것처럼 강우현이 움직였다.
느낌상, 딱 그거다, 누군가를 데려올 것 같은 딱 그런 느낌.
강 회장님이 그러셨지. 주재목을 들이겠다고.
들이다. 밖에서 안으로 가거나 오거나 한다는 의미를 가진 ‘들다’의 사동사.
‘주재목’이라는 무언가를 가져온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주재목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주재목의 주는 기둥을 의미하는 주(柱)라고 치고, 그렇다면 재는?
그거다. 그것일 수밖에 없다.
내가 거기까지 생각을 했을 때, 계단을 타고 강우현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금 뒤 강우현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내 예상대로, 강우현 뒤에 젊은 남자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재는 재목을 의미하는 재(材)일 것이다.
주재목, 기둥의 재목, 다시 말해 다음 4주를 이끌 후계라는 것이 나의 추리였고, 강우현이 두 명의 젊은이를 데리고 옴으로써 내 추리가 맞았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하지만 내가 예상하지 못한, 아니, 절대로 예상할 수 없었던 결과가 내 눈앞에 있었다.
강우현을 따라 거실로 들어오는 두 사람 중 한 명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그냥 아는 사람도 아니고 굉장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거실로 들어오던 그 사람도 걸음을 멈추고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나보다 더 크게 뜬 눈으로, 나보다 더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는 저 녀석.
박승환이었다.
임마! 니가 왜 거기서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