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 적의 적은 우리 편 (2)
그날은 아주 화창한 날이었지. 역설적으로 화창한 날씨만큼 끔찍한 날이었어.
니들도 알지? 오월, 초여름의 산들바람이 얼마나 학생들을 미치게 하는지. 그날도 딱 그런 날이었어.
찬희 그 자식이 유라에게 마음이 좀 있기는 했어.
그래. 솔직히 우리끼리 있으니까 하는 말인데, 유라 그 녀석이 말만 안 하면, 솔직히 예쁘긴 예쁘니까. 그 녀석 얼굴에 홀린 사람이 한둘이냐?
사실 우리 과 남자애들 전부 다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아니라고 하지 마. 만약 그런 적 없다는 놈 있으면 고자이거나, 성적 취향이 유니크한 거야.
근데, 한 며칠만 지나면 바로 알잖아. 아. 저 녀석은 여자가 아니구나. 여자의 탈을 쓴 대장부구나. 삼국시대에 태어났다면, 이 술이 식기 전에 모가지 세 개를 따오겠소. 그렇게 말하고는 말 타고 달려 나가서 적장 수의 머리 대여섯 개를 숭덩숭덩 짤라다가 말에 매달고 와서, 역시 아침 운동 후에 한 잔은 생명수로구나! 할 것 같은 녀석이라는 것을.
그렇게 다들 조금씩 유라의 실체에 대해서 알아 가는데, 찬희 그 자식은 어릴 때 뭘 잘못 먹었는지 반대로 유라 이야기를 하더란 말이지.
아. 나는 분명히 말했어. 그러지 마라. 정도가 아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러면 안 된다. 마음 줄 곳이 없으면 차라리 2D로 가라.
아무튼 다시 그날로 돌아가서, 내가 말했지? 아주 화창한 날이었다고.
그날 우리가 낮술을 먹었어. 니들은 없었고. 나랑 찬희 둘이서만.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기억 안 나. 기억나는 것은 그날 우리가 좀 많이 마셨다는 거였어.
슬슬 해가 져갈 때쯤, 우리는 완전히 꽐라가 되었는데, 그때 찬희 그 자식이 혼자서 뭘 중얼중얼거리더니 갑자기 주먹을 꽉 쥐는 거야.
그리고는 그러더라고.
그래. 결심했어.
나도 꽐라였는데, 그런데도, 본능적으로 느꼈어.
찬희 그 자식이 뭔가 사고를 치려고 한다는 것을.
그래서 내가 그랬지. 하지 마라.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하지 마라.
그랬는데, 박찬희 그 자식이 날 보며 피식하고 웃더라고.
순간 그 표정이 뭐랄까. 알지? 그 사람을 제대로 킹받게 하는 거.
다른 놈도 아니고 찬희 그 자식이 그런 표정을 하니까 제대로 킹받더라고.
박찬희가 그런 재수 없는 표정으로 날 보며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그래. 너는 항상 그렇게 안주하며 살아라. 도전도 없고, 모험도 없는 그런 재미없는 삶을 말이지.
그렇게 말했다니까.
내가 그때 꽐라되었는데도, 충격을 받아서, 그 자식 말을 토씨 하나까지 다 기억해.
아무튼 그런 말을 듣고 가만히 있으면 남자가 아니지.
그래서 내가 물어봤어. 그래. 그 대단한 도전이라는 게, 모험이라는 게 뭐냐고.
그러니까 찬희 그 자식이 그러는 거야. 유라에게 고백한다고.
그래. 나도 너희 같은 표정을 했지. 아니. 아마 그랬을 거야.
끔찍한 소리잖아. 최유라에게 고백한다니.
아. 물론 그래. 유라. 예쁘지. 몸매도 좋고. 성격도 좋고. 하지만 성격이 너무 좋잖아. 가끔 보면 형제 같다는 느낌도 들고 그렇잖아.
유라에게 고백한다고? 그건 진철이 형에게 고백하겠다는 거랑 똑같은 소리잖아.
아무튼, 그때 내가 죽기 직전까지 패서라도 말렸어야 했는데, 아까 얘기했듯이 나도 꽐라 상태였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그랬어. 그래. 네가 남자다. 진짜 남자다. 불가능한 목표야말로 남자의 로망 아니겠냐.
악마의 열매를 먹어 바다의 저주를 받은 루피가 원피스라는 목표를 위해 바다로 나아갔던 것처럼, 인술의 재능이 없어, 남들은 단번에 통과하는 아카데미 졸업 시험을 세 번이나 본 나루토가 호카게라는 목표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듯, 너도 한번 나아가봐라. 최유라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위해서!
알아. 내가 잘못했다고. 해야 하는 장난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장난이 있다는 것도 알아. 아는데, 그때 너무 취했었다고. 이성적으로 판단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고.
아무튼 내가 옆에서 그렇게 뽐뿌를 넣었더니, 찬희 그 자식이 바로 휴대폰을 뽑아 들었어. 그리고 유라에게 전화를 걸었지.
우리 여기 어디 있는데, 지금 와 달라.
솔직히 그때는 찬희 그 자식이 좀 멋져 보였어. 상남자의 아우라가 부처님 뒤의 광배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고 할까?
맞아. 많이 먹기는 먹었지.
아무튼, 그렇게 유라를 불러내고, 우리는 술을 더 먹었어. 성공을 기원하면서.
그렇게 한 서너 잔을 더 마셨을 때, 유라가 도착했지.
유라가 우리에게 다가오자, 찬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유라 쪽으로 몸을 돌렸어.
공교롭게도, 마침 유라가 다가오는 방향이 해가 지는 쪽이었어.
찬희의 뒷모습이 석양을 배경으로 딱 서 있는데, 나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뭔가가 울컥하고 올라오더라고.
뭐랄까. 남자의 뒷모습. 그런 느낌이랄까?
아무튼 그렇게 서 있는 찬희에게 유라가 다가와서 물었어.
왜 불렀어?
찬희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어.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를 쓸어 올린 다음, 석양을 바라보며 말했어.
최유라.
왜.
나 술 많이 먹었다.
그런 것 같다.
이거 술 먹었다고 하는 이야기 아니다.
거기까지 말하고, 찬희의 시선이 드디어 유라를 향했어.
그리고 말했어.
나랑.
***
박승환은 끔찍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김창회도 마찬가지였다.
거울이 없어 당장 확인할 수는 없지만, 나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우리 세 사람은 그렇게 끔찍한 얼굴을 한 채로, 이중훈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이중훈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슬픈 눈으로 눈앞의 커피잔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건데? ‘나랑’ 그다음에 뭐라고 말했는데?”
김창회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결국 물었다.
“…말하지 못했어.”
이중훈이 말했다.
“못했다고?”
“유라의 라이트 훅이 제대로 들어갔거든.”
나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온다.
상상이 간다.
깔끔하게 복부에 꽂힌 최유라의 라이트 훅.
반나절 내내 알코올에 쩔은 찬희의 위는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온몸에 오한이 든다.
“토했겠네.”
박승환이 말했고, 이중훈이 고개를 끄덕인다.
“유라는 나를 쳐다봤어. 나는 손을 입으로 가져가 지퍼를 채우는 제스처를 취했고. 그 덕분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런 거였군. 고백은 아니지만, 까인 것은 맞다. 정확히 말하면 고백도 못 해보고 까였구만.”
“장렬한 구토와 함께.”
“소문이 확대되지 않은 이유를 알겠네.”
“사회적인 죽음이 뒤따랐을 테니까.”
우리 네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잠시 박찬희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잠깐만. 잠깐만. 그러면 오늘 그 모습은 뭔데?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데?”
내가 논리적인 허점을 지목하고 나섰다.
정통으로 보디 카운터를 먹일 정도로 박찬희를 거부했던 최유라가 갑자기 박찬희를 받아주었다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현대인의 사고체계로는 도저히 도출할 수 없는 결과 아니겠는가.
“찬희 집이 부잔가?”
박승환이 물어본다.
“아니.”
이중훈이 답한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호동 토박이인 찬희네 집은 뭐, 가난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집안 재산의 대부분이 천호동의 단독주택이 차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이다.
형제도 많아서 찬희가 그 집을 상속받을 것 같지도 않고, 경제적으로 봤을 때, 태생에 따른 재산은 그리 큰 기대를 할 수 없다.
“잘생겼나? 찬희가?”
“아니지.”
“키는?”
“유라가 더 클걸?”
“에이. 그건 아니지. 찬희도 자존심이 있지. 비슷하다면 몰라도, 유라가 더 크다는 말은….”
“힐 신으면?”
“….”
“미래가 전도유망하다던가?”
“유라가 돈 더 많이 벌 것 같은데?”
거기까지 말한 우리는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술.”
“최면술.”
“약점을 잡았다던가.”
“몰래카메라 같은 거는?”
우리 모두는 하나씩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 어느 것 하나 지금의 아이러니를 명확하게 해결해 주는 놈이 없었다.
“일단 지켜보자.”
내가 말했다.
“그러는 수밖에 없겠지.”
이중훈이 말한다.
“일단 준비는 해야 되겠네.”
김창회가 어깨를 풀면서 말한다.
“아버지 힘을 빌려야 하나.”
박승환이 그렇게 중얼거리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승환이의 전화기가 울린다.
휴대폰을 들어 번호를 확인한 박승환의 표정이 굳는다.
뭐지? 무슨 전환데, 저 자식답지 않게 감정을 드러내는데?
“잠시만.”
박승환은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기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승환이 전화 받겠다고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처음이었다.
여잔가?
“뭐지? 저 자식? 냄새가 나는데?”
이중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박승환이 사라진 쪽을 보며 중얼거린다.
“일단 잡아다가 고문하면 다 불 거야.”
김창회가 목을 풀면서 그렇게 말한다.
“일을 시작할 때는 일단 내부의 위험 요소부터 정리하는 게 기본이지.”
내가 그렇게 말하는데, 이번에는 내 전화기가 울린다.
나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쓰여 있는 이름을 읽었다.
-할아버지 휴대폰
액정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그 순간 나는 휴대폰을 바라보는 내 시선 위로 따갑다 못해 뜨거운 시선들이 맹렬히 꽂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들어 친구 놈들에게 누구의 전화인지를 확인시켜주었다.
친구 놈들은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서야 어서 전화를 받으라며 손짓을 해주었다.
아…. 분위기 살벌하구만.
***
나는 통화버튼을 누르기 전에 짧게 지난 며칠을 되돌려 보았다.
능력을 썼던가?
제이슨 임에게 교훈을 내린 것은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문제 삼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러면 김민우? 김민우에게 준 선물이 너무 과했나? 한 1년 정도만 할 걸 그랬나?
그 외에는? 딱히 걸릴 것이 없다.
일단 받아보자. 일단 들어보고 변명하면 되겠지.
할 수 있어. 한수야. 21년의 노하우가 있잖아!
나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힘을 불어넣으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넵! 할아버님! 손자이옵니다!”
-…말투가 왜 그러느냐.
“언제나 할아버지를 생각하는 저의 마음이 반영된….”
-시끄럽다. 요즘은 문제 일으키지 않았겠지?
“제가 어찌 감히….”
-흐음.
할아버지의 ‘흐음’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지금이라도 불까? 그때는 2년이면 적당하다고 생각했다고, 사실 마음속으로는 내심 발기부전이 영구적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염두에 뒀음을 자백할까?
-됐고. 잠깐 시간을 좀 내거라.
일단 넘어갔다. 휴우. 뭐 완전면책은 아니겠지만, 일단은 넘어갔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그런데 시간을 내라고?
“넵. 내려가겠습니다. 언제 갈까요?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내려갈까요?”
-내려올 필요 없다.
응? 내려올 필요 없다고?
-주소를 보낼 테니 당장 오도록 하여라.
응? 당장? 불금인데?
“네? 지금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
뭐야. 갑자기 뭔데? 불금인데! 오늘 불타는 금요일인데!
그렇게 속으로 울분을 터트리는데, 내 손에 들린 전화기가 부르르르 진동을 한다.
문자 메시지였고, 메시지에는 주소가 적혀 있었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대사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