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 꼭지점이 같은 두 개의 이차함수 그래프
서울숲에서 지수와 그렇게 우연히 만나고, 보름 정도가 지난 어느 날.
나는 도서관 계단에 앉아있었다.
다음 수업까지는 공강이 애매해서, 그냥 시간이나 때울 겸, 계단에 앉아 도서관에서 대출한 소설책을 읽고 있었다.
그렇게 책을 읽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옆에 앉았다.
박승환이었다.
“오늘이네.”
갑자기 나타난 박승환이 뜬금없이 그렇게 말했다.
많은 의미가 생략된 네 음절의 단순한 문장이었지만,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승환이가 말한 ‘오늘’이 무슨 의미인지 나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별 대답 없는 내게 박승환이 물었다.
“후회 안 하겠냐?”
“무슨 후회?”
“공항에 가봤어야 했는데. 그런 후회.”
박승환의 말에 나는 작게 웃어버렸다.
읽던 책을 덮어버리고는 공항이 있는 서쪽을 향해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렇네. 숨을 헐떡이며 공항으로 달려가서, 바짓자락이라도 붙잡고서, 제발 안 가면 안 되겠냐고 질질 짜야 했는데.”
내가 그렇게 대응하자 박승환은 재미없다는 듯 ‘쳇’ 하고 혀를 찼다.
나는 그런 박승환에게 작게 미소 지어주었다.
박승환 나름의 위로 방법이다. 뭐, 옳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오늘은 지수가 출국하는 날이다.
그날, 서울 숲에서 우연히 지수를 만나 짧은 이야기를 나눈 그 날 이후, 마지막이라는 그 녀석의 말이 마치 예언이라도 되는 듯 지수를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지수는 출국 준비를 하면서도 학교에 여러 번 왔고, 정말 오랜만에 과방에도 들러 동기들하고 피자를 시켜 먹으며 오랜 시간 수다를 떨었다고 했는데, 누가 이렇게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나는 지수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비어있는 피자 박스와 지수가 조금 전까지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같은 좌표의 꼭짓점과 다른 기울기를 가진 두 개의 이차함수 그래프를 떠올렸다.
두 개의 그래프는 유일한 교점인 꼭짓점에 접근할수록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마치 겹쳐 보일 정도로.
하지만 두 그래프가 유일하게 만나는 교점을 지나면, 그 이후로 두 개의 그래프는 두 번 다시 교차하지 않는다. 단지 교차하지 않는 것만이 아니다.
두 개의 그래프 사이의 간격도 점점 멀어져, 나중에는 두 개의 그래프가 만났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 정도로 멀어진다.
지수와 나, 우리 두 사람도 그렇게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만난 적 없었다는 듯, 그렇게 멀어진다는 느낌이.
하지만 그렇게 멀어진다고 해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우리 두 사람에게는 교점이 있다는 것.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내가 지수이고, 지수가 나였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무슨 생각해?”
승환이가 물어본다.
“이차함수 그래프.”
내가 말했다.
뒤에서 갑자기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차함수 그래프?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야? 과외하려고?”
이중훈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이중훈, 박찬희, 김창회, 그리고 지연이가 서 있다.
“이차함수면 중학교 수학인데? 중학생을 노리는 거냐?”
박찬희가 그렇게 말한다.
“다른 건 용서해도 페도필리아는 용서 못 한다.”
김창회가 어깨를 풀면서 그렇게 말한다.
“오빠. 저도 그건 용서할 수 없어요.”
지연이도 그렇게 말한다.
이 미친 인간들이. 뚫린 입이라고 말을 함부로 하네?
아니. 지연이는 빼고. 지연이는 잘못 없다. 지연이에게 나쁜 물 들인 저놈들이 잘못한 거다.
소문이 확대되면 학교에서 매장되는 것은 물론, 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미친 소리를 막기 위해 막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박승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친다.
“이 자식들아! 그게 무슨 망발이야!”
나는 고개를 돌려 박승환을 바라보았다.
진지한 얼굴, 진지한 눈빛.
무언가 개드립을 치겠다는 준비 동작!
“아무리 우리 간음 한수 선생이 인간의 탈을 쓴 짐승이라고 해도! 페도는 아니야! 사춘기 중학생은 헤베필리아…켁!”
나는 주저하지 않고, 박승환의 바디에 있는 힘껏 오른손 훅을 꽂아 넣었다.
***
한바탕 소동이 끝난 후, 나를 포함해 우리 여섯 사람은 자판기에서 진철이 형의 트레이드마크인 캔커피를 하나씩 뽑아 들고, 적당한 장소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뭐? 주말에도 알바를 한다고?”
박찬희의 말에, 김창회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편의점.”
김창회가 말했다.
“야. 그 녀석.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이중훈이 말했다.
김창회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나도 기훈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는데, 괜찮다고 그러면서 고집부리는데, 확 그냥 패버리고 싶더라니까.”
김창회가 그렇게 말하는데, 말과는 다르게 얼굴은 웃고 있다.
아주 대견해 죽으려고 하네.
우리는 윤기훈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경찰서에 가서 모든 진실을 밝힌 기훈이는 무혐의로 풀려났다. 뭐, 기훈이가 내 폭행 사건하고 아주 관계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히 전화로 불러내는 역할이었고, 그 전화가 내 폭행으로 연결될지 몰랐고, 또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고 나, 그리고 우리 말 잘 듣는 장영호 싸장님과 말을 맞췄다.
물론 나도, 윤기훈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 이렇게 탄원서를 제출했고, 또 중앙그룹이나 승환이 아버님께서 손을 쓰셨는지, 윤기훈에게는 더 이상 죄를 묻지 않는 것으로 확정이 되었다.
그렇게 자유의 몸이 된 윤기훈은 그동안 방황했던 자신에게 벌을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미친놈처럼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윤기훈은 새 직장을 구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스카웃을 당했다.
박승환의 아버님 회사. 법무법인 뭐라고 하던데, 아무튼 거기서 박승환의 삼촌 같은 분이 윤기훈을 키워보겠다고 데려가도 되겠냐고 물어보셨단다.
솔직히 나는 반대했던 게, 승환이가 그랬잖아. 아버지 깡패 비슷한 거라고.
혹시라도 기훈이 녀석을 데리고 가서 또 깡패 비슷한 거로 만들면 어떻게 하나 그런 걱정이 드는 게 사실이지.
근데 승환이는 한번 맡겨보라고 하더라.
그 삼촌 같은 분, 나는 몰랐는데, 그날 장영호에게 전화를 걸었던 분이 바로 그 분이라더만. 아무튼 그 삼촌 같은 분은 아버지와는 달리 본성이 선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람이라서 기훈이를 무슨 인간 흉기 같은 걸로 키우지는 않을 거라고 하더만. 그리고 그 삼촌 같은 분도 한국대 선배라고도 하고.
뭐 동문 선배님이라고 좋은 사람이라고 믿을 정도로 순진한 건 아닌데 말이지.
아무튼, 그건 넘어가고, 결국 선택은 윤기훈이 했는데, 일단 월급도 주면서 공부도 시켜서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따게 한 다음 대학까지 보내준다고 하고, 또 기훈이 녀석이 싫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약속까지 해줬으니 일단 해보자는 생각이었나 보다.
승환이 이야기로는 지금 출근해서 공부만 하고 있다고 하는데, 운동부 출신이라 기초가 부족해서 문제지, 머리가 나쁜 놈은 아니어서 빠르면 올해 8월, 늦어도 내년 봄에는 고졸검정고시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더라.
그래도 대학에 가려면 한 1~2년은 기다려야 할 듯싶다. 원서만 내면 합격하는 그런 대학교 말고 진짜 힘들게 공부해야 갈 수 있는 그런 학교에 가려면 말이지.
뭐 아무튼, 그냥 조용히 주는 돈 받고 공부만 하면 될 텐데, 윤기훈 이 멍청한 놈이 지금 오바를 하고 있단 말이지.
일단 새벽에 일어나서 우유 배달을 한다는 거다. 매주 월, 수, 금. 주에 세 번, 새벽 4시부터 7시까지.
알바가 없는 화요일, 목요일에는 유도장에 가서 운동을 하고.
그게 전부가 아니다. 퇴근하면 바로 헬스장에 가는데, 이게 운동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알바 하러 가는 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알바 겸 운동이라고 해야 하나?
창회가 자기 헬스장에 윤기훈이 녀석을 데려갔는데, 관장님이 윤기훈이 마음에 들었는지, 너 할 거 없으면 저녁에 와서 잠깐 카운터 좀 보고, 정리 좀 하면서, 운동도 배우고 하라고, 많지는 않지만 근로기준법에 저촉되지 않을 만큼의 시급도 주겠다고 제안을 했단다.
윤기훈은 당연히 받아들였고, 그래서 7시부터 10시까지 헬스장에서 운동 겸 알바를 한다는 말이지.
뭐, 창회 말로는 관장님이 그 녀석을 마음에 들어 해서 잘 키워 간판 트레이너로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 하던데….
아아주 좋겠어. 윤기훈이. 아저씨들의 사랑 듬뿍 받아서.
아무튼, 안 그래도 그렇게 빡씨게 사는데, 주말에 편의점 알바도 구했다는 이야기다.
이러면 돈 빌려준 내가 나쁜 놈 같잖아. 아. 진짜. 그 자식 오바하고 난리야.
그런 내 생각을 반영하듯, 창회가 말한다.
“뭐. 한수에게 최대한 빨리 갚겠다고….”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마치 악덕사채업자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이다.
“뭐야? 내 잘못이야?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그렇게 항변했다.
그리고 내 항변에 대응하고 나선 것은 박찬희였다.
“욕심이 과하면 큰 벌을 받게 될 것이야. 샤일록 봐봐. 괜히 욕심부리다 재산도 다 잃고 딸도 떠나고.”
어쭈? 박찬희답지 않게 고급스러운 디스다?
하지만, 넌 임마. 아직 멀었다.
“샤일록이 무슨 잘못 했는데? 정당하게 계약서 작성했고, 안토니오 그 멍청이가 ‘분명 배 들어옴 ㅋ.’ 이러면서 계약서에 사인했고, 지들이 불리하니까, 우루루 떼로 몰려와서 ‘여러분! 여기 악랄한 유대인이 선량한 기독교인을 속여서 목숨을 위협하고 있어요’ 하면서 다구리 친 거 아냐. 너 이 자식. 베니스의 상인 제대로 안 읽었지?”
갑작스러운 내 반격에 박찬희가 움찔한다.
“이게 다 입시 위주 교육이 문제라니까. 문제를 풀기 위해서 주제, 소재, 줄거리만 대충 외우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니야. 책을 말야. 제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을 해야 그 안에 담겨있는 정수를 발견할 수 있는 거란 말이다.”
“그 책의 정수가 뭔데?”
박찬희가 발끈하며 물어본다.
“뭐긴 뭐야. 인종차별주의에 쪄들어 있는 베네치아 놈들이 정당한 권리를 가진 불쌍한 유대인 상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거지. 집단 따돌림의 위험성. 불건전한 사회가 얼마나 개인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경고!”
“와! 오빠. 엄청 그럴싸해요!”
지연이가 말한다.
“한수 승리.”
박승환이 선언한다.
박찬희는 고개를 떨구고, 이중훈은 그런 찬희의 어깨를 감싼다.
나는 승리자의 시선으로 패배자를 내려다본다.
이 자식아! 넌 아직 멀었어! 그런 시선으로 말이지.
“아무튼,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윤기훈이 그 멍청한 놈에게 오바하지 말라고 좀 이야기해 봐. 지금이야 어리니까 몸이 쌩쌩 돌아가겠지만, 그러다 나중에 한 번 망가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이야.”
내가 창회에게 그렇게 말했다.
창회 녀석도 내 말이 틀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그렇고. 뉴스에도 나왔더라.”
이중훈이 그렇게 말하며, 휴대폰을 내민다.
휴대폰 액정에는 며칠 전 뉴스가 떠 있다.
-檢, 아이테크건설(주) 본사 긴급 압수수색, 대표이사 구속영장 신청 뭐, 간단히 말해서 대한민국 검찰이 제이슨 임의 부친 임원영 대표이사께서 운영하시는 아이테크 건설에 칼을 들이밀었다 이거다.
제이슨 임 때문이냐고?
설마, 대표 아들이 폭행 사건을 벌였다고 본사 압수수색이 들어갔을까?
그건 아니고, 비자금 조성이 딱 걸린 거다.
장영호와 거래한 계좌를 추적하다 보니, 아이테크건설 임원영 대표의 차명계좌가 나온 거고, 그걸 파고 들어가다 보니, 비자금 계좌가 나온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네.
제이슨 임은 어찌 되었냐고? 지금 구치소 들어가 계신다.
공항에서 바로 입건되어서 경찰서 유치장 간 것을 제이슨 임 아버지가 12시간 만에 빼냈는데, 검찰이 재빨리 구속영장 신청해서 구치소에 처넣었고, 얼마 전에 기소되어서 재판을 준비 중이다.
제이슨의 훌륭한 변호사께서 보석을 신청하셨지만, 법원에서는 죄증 인멸, 도주의 우려가 있다는 예외사유가 있다고 ‘꺼졍 ㅋ.’ 그렇게 말씀하셨고.
아. 그리고 나에게도 찾아왔었다. 합의하자고.
그래도 제이슨의 아버지 임원영 대표께서는 장영호보다 통이 크신지 합의금도 5천만 원이나 제시해주셨다.
물론 난 거부했지. 나는 금전적인 이득보다 사회정의를 추구하는 깨어있는 시민이니까.
내가 거부하자 3천만 원을 더 보태 8천만 원을 공탁 걸었다고 하던데, 뭐, 수백억을 공탁 걸어봐라. 내가 눈 하나 깜짝 하나.
아니. 잠깐만. 수백억이면 깜짝해도 되지 않을까?
아무튼 8천만 원 정도에는 꿈쩍 안 한다.
장영호나, 제이슨이나, 제이슨의 부친이나, 내가 신경 쓸 필요 없이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
윤기훈은 뭐, 지금까지는 잘하는 것 같고. 서현 님 돈도 다 받았고, 이제 나의 복수는 거의 다 끝났구나 하고 생각하는 찰나, 박승환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 자식이다.”
그 말에,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의 시선이 박승환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움직인다.
그곳에는 김민우가 있었다. 우리가 있는 방향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