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 신기한 날 (1)
수업을 마치고 강의실을 나왔는데, 강의동 복도 한쪽에 모여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 시선을 끌었다.
아는 사람들이었거든.
동기들. 정확히 말하면 여자 동기들이 복도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다.
작년만 해도 저 녀석들, 여자 동기들하고 잘 놀았다. 밥은 자주 먹었고, 가끔 술도 먹었고.
뭐, 당연한 이야기다.
1학년이었고, 동기였고, 당시 내 여자친구였던 신지수가 저 멤버 중 하나이기도 했었고.
뭐, 그다음부터는 다 아는 이야기다.
신지수랑 깨지고, 자연스럽게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
길 가다 만나면 인사하고, 안부 묻고, 같은 수업 들으면 수업 관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작년처럼 같이 밥을 먹는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아. 유라는 빼고.
축제 때 같이 요리팀에서 고생했던 최유라하고는 가끔 커피도 마시고. 밥도 먹는다.
유라 그 녀석은 다른 여자애들하고는 좀 다르니까.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 녀석들이 내 시선을 끈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심각한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보통 여자애들이 저런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은 멤버 사이에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였다.
저 모습을 캐롤 길리건이 보았다면 ‘자아와 타인에 대한 책임감이 도덕성의 요소입니다’라고 설명하겠지.
아무튼, 뭐 모르는 사람들도 아니고, 무슨 일인지 궁금하기도 하지만, 나는 여자애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알아야 하는 사실이라면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고, 몰라도 되는 사실이라면 다음 주 저녁쯤에는 내가 저 녀석들을 만났다는 사실을 까먹게 될 것이고.
그렇게 생각하며 슬쩍 지나가려 하는데, 공교롭게도 최유라와 눈이 딱 마주친다.
“어? 한수야.”
유라가 내 이름을 부르자, 다른 동기들이 날 돌아본다.
그 녀석들이 날 바라보는 눈빛에서 사실 하나를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저 녀석들이 하던 이야기가 나와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 말이다.
***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여자 동기들에게 자연스러운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다.’를 시작으로 두어 마디 쓸데없는 안부 인사를 전한 다음, 우리나라에서는 아무 의미 없이 사용되는 ‘언제 밥이나 한번 먹자’를 시전한 후 자리를 비켜주었다.
그렇게 여자 동기들의 어색한 미소와 인사를 받으며 걸어가는데, 느낌이 뭔가 좀 싸하달까?
뒤통수가 근질근질한 걸로 봐서는 저 녀석들, 내 뒷담화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당황하는 게 딱 그런 눈치였단 말이지.
하지만 뭐, 물증도 없이 ‘내 욕했냐’고 몰아붙일 수는 없고, 그냥 찜찜한 기분을 안고 그 자리를 벗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지. 최유라, 저 녀석은 내 뒷담화 같은 거 안 깔 것 같은데?
저 녀석이 생긴 건 그래도 나름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그 내면에는 상남자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내가 아는 유라라면 남 뒷담화 하고 그럴 녀석이 아니긴 한데….
모르지. 뭐, 내가 24시간 저 녀석을 감시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튼, 없는 데서는 나라님 욕도 한다고 하는데, 그깟 동기 뒷담화야. 뭐. 한두 번 당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 나온 김에, 대학 들어온 이후 내가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던 적이 몇 번 있었다.
우선 내가 신지수랑 사귀는 걸 들켰을 때.
내가 신지수의 약점을 잡았다느니, 흑마술을 익혔다느니 하는 소문이 잠깐 돌았었다.
뭐, 인정은 한다. 신지수 그 녀석이 워낙 예뻤어야지.
아니, 그래도, 보통 여자 쪽이 예쁘면 남자가 돈 많다는 소문이 나지 않나?
죽어도 ‘내가 부자였다더라’라는 소문 같은 건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열 받네.
두 번째 구설수도 신지수와 관련되어 있다.
깨졌을 때, 그때도 이상한 소문이 잠깐 돌았다.
뭐 요약하면 내가 신지수랑 깨지고 얼마 안 되어서 머리를 좀 짧게 잘랐는데, 충격에 못 이겨 군대로 도망간다는 소문이 잠깐 돌았다.
아니, 군대야 뭐 그럴 수 있다고 치고, 속세의 모든 은원을 버리고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된다는 소문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거야? 범인이 누구야?
그리고 세 번째가 얼마 전, 하숙집에서 성수동으로 이사를 갈 때 돌았던 소문.
뭐랬더라?
신지수랑 깨지고 정신 못 차린 내가 도박장을 전전하다, 사채를 쓰게 되었고, 채무를 감당 못 해 도망을 쳤는데, 사채업자들이 하숙집에 찾아와 하숙집 할머니에게 내 빚을 추심하려 했다던가?
그 소문의 진원은 금방 밝혀졌지.
박승환, 그 자식이 범인이었다.
잠깐만. 혹시, 앞에 소문도?
세상 은원을 모두 버리고 사찰에 들어가 수도승이 됐다는 이야기. 어쩐지 박승환 작곡의 느낌이 나는데?
“무슨 생각해?”
그런 생각을 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드니, 가장 유력한 용의자인 박승환이 날 바라보고 있다.
마침 잘 만났다.
“너였지!”
“아니야!”
박승환이 즉각 반발했다.
“뭐가 아닌데.”
“누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아니야.”
“모르겠는데 아니라고?”
“…아닐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데, 그 시선에서 ‘도대체 뭘 걸린 거지?’라는 의미를 읽어낼 수 있었다.
언젠가 날 잡고 한번 제대로 털어야 하는데.
털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더니,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이 녀석에게 물어볼 게 있었지.
신지수가 그렇게 말했었다.
-승환이가… 이야기 안 했어?
나는 박승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 최근에 지수 만났냐?”
내가 그렇게 묻자, 승환이 녀석의 눈빛이 바뀐다.
장난기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진지함이 메운다.
“어. 얼마 전에.”
승환이가 그렇게 인정한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아서는 멱살을 틀어잡고 무슨 이야기 했어? 그렇게 다그치고 싶은데, 사실 뭐, 내가 그럴 자격은 없지.
나와 신지수가 껄끄럽다고 해서 승환이와 지수가 만난다는 걸 만나라 말라 이야기하기는 좀 그렇잖아.
사실 둘이 사귄다고 해도 뭐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자격은 없지.
아니지. 사귀는 건 좀 그런데. 그건 좀 기분 나쁜데?
그런 생각을 하는 내게 승환이가 물어본다.
“지수가 무슨 이야기 했어?”
“아니. 뭐 별 이야기는 없었고, 너한테 이야기 들은 거 없냐고. 그렇게 물어보더라.”
내 말에 박승환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심각한 얼굴을 한다.
뭐야. 이 자식.
진짜 둘이 사귀나?
“헤어졌다고 하더라.”
박승환이 말했다.
“응?”
“헤어졌다고. 김민우 그 자식이랑.”
***
수업이 모두 끝나고, 집에 가기 전에 책을 넣어 놓으려 사물함으로 갔는데, 거기서 최유라를 딱 만났다.
“뭐야. 너도 지금 수업 끝난 거야?”
“아니. 이제 들어가야 해.”
유라가 쓸쓸한 표정으로 말한다.
“…고생하는구나.”
내가 그렇게 최유라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한수야. 잠깐만. 혹시 커피나 한잔할래?”
유라가 날 불렀다.
“수업 간다며?”
내 질문에 유라가 손가락으로 라운지의 자판기를 가리킨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녀석과 커피 자판기가 있는 라운지로 걸어가 진철이 형이 생명수처럼 마시는 저가 캔커피보다 더욱 달달한 자판기 커피를 두 잔 뽑았다.
“자판기 커피에는 담배가 딱인데.”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최유라가 말한다.
“복학생 같은 소리 한다. 자판기 커피 마시면서 담배 피우면 입에서 똥내 나. 아니. 그건 그거고 너 담배 펴?”
“아니.”
“근데 무슨 담배 타령이야.”
“오빠들이 커피 마실 때마다 그러니까.”
유라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담배 피우는 시늉을 하며, ‘크으 이거지’ 같은 소리를 한다.
“야. 그런 개그 하지 마. 나중에 시집 못 간다.”
내가 그렇게 핀잔을 줬지만, 사실 난 유라의 이런 털털함이 싫지는 않다.
그러고 보니까 찬희가 1학년 때 유라를 좀 좋아했었는데, 찬희는 부정했지만, 고백했다가 제대로 까였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아무튼,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유라, 이 녀석이 무슨 할 말이 있는 건가? 수업 들어간다는 녀석이 커피를 마시자고 하고.
“뭐 할 말 있어?”
내가 물었다.
유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한다.
“아. 별거는 아니고, 오해하지 말라고.”
“오해? 무슨 오해?”
“아까.”
“아까?”
“강의동에서 만났을 때.”
“아. 어. 그때.”
“너 욕하고 있던 것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라고.”
유라는 그렇게 말하며 종이컵을 들어 커피를 홀짝인다.
나는 유라의 말에서 두 개의 의미를 이끌어 낼 수 있었다.
하나는 유라 말 그대로 내 욕은 아니었다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나와 관련이 있다는 것.
관련이 없고서야 유라가 이렇게 커피를 마시자고 했을 리가 없으니까.
나는 유라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지수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유라가 말했다.
그 녀석들의 대화 주제 중 나와 관련이 있는 주제라면 전 여자친구인 신지수뿐이겠지.
“지수가 휴학했거든.”
나는 고개를 돌려 유라를 바라보았다.
“유학 간다고.”
유라가 말했다.
“아는지 모르겠다. 지수, 그 남자랑 정리했거든.”
나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모른 척을 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라는 의미였을 뿐.
“그게 이유는 아닐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갑자기 휴학하고 유학 간다고 하니까.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닌가 싶어서, 그래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그때 마침 한수 네가 지나간 거고, 그래서 분위기가 이상해졌던 거고.”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거였군. 그래서 날 보는 눈빛이 흔들렸던 거였구만.
“뭐, 아무튼, 뭐랄까. 그냥, 너도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달까. 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가 뒤에서 너 욕하고 있었던 거 아니라고. 그래서.”
유라가 그렇게 말한다.
그래. 이런 녀석이었다. 마음이 큰 녀석이었다.
“으이구. 소심한 녀석.”
나는 그렇게 말하며 유라의 어깨를 툭 하고 쳐주었다.
***
신기한 날이었다.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날이었다.
마치, 누군가 이렇게 짜놓기라도 한 것처럼 신지수의 이야기를 두 번이나 들었다.
헤어진 여자친구, 이제는 더 이상 곁에 머물지 않는, 아니, 어쩌면 타인보다 더 멀어져 버린 사람의 이름이 하루 종일 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한 것이, 승환이나 유라에게서 그 녀석의 소식을 들었을 때는 크게 마음의 동요 같은 것은 없었다.
완전히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느낌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 그랬구나. 그 정도의 느낌이었달까.
그랬는데, 마치, 옷에 묻은 얼룩처럼,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신경이 쓰였고, 살짝 찝찝하고 우울한 기분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그렇지. 신경이 쓰인다고 해서 내가 뭐 어쩌겠어?
가락시장으로 찾아가? 찾아가서 갑자기 왜 휴학을 하는지, 왜 유학을 가는지, 그게 김민우랑 관계있는 것인지 물어봐?
웃기는 이야기다. 평생 이불킥 각이다.
아무튼, 뭐,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시간이 흐르면 이런 감정도 시간에 풍화되어 옅어지겠지.
우리 서현 님과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 이런 찝찝한 생각은 다 날아가 버릴 거라는 생각으로 집에 왔는데, 갑작스러운 회사 일 때문에 늦게 온다는 서현 님의 전화를 받았다.
뭐 어쩔 수 없지. 서현 님에게 회사일 열심히 하라고 이야기 한 사람이 바로 나 아니던가.
혼자서 대충 저녁을 챙겨 먹고, 집 앞에 있는 서울숲으로 산책을 나왔다.
선선한 초저녁의 바람과 함께 느릿한 걸음으로 산책로를 걸으며 마음을 달래고 있던 내가 걸음이 멈춘 것은 산책을 시작하고 15분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대략 10여 미터 앞에서, 나와 마찬가지로 걸음을 멈춘 채,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다.
신지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