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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을 이어라-104화 (104/271)

104 :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 241번 게이트 앞 (1)

나는 다시 시간을 움직였다.

멈추었던 모든 것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바라보면서 주머니에 들어있던 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걸었다.

이 상황에서 전화를 걸 곳이라고는 한 곳뿐 아니겠는가?

-무슨 일이냐?

전화기에서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려온다.

“할아버지!”

-무슨 일이더냐?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무슨 말이냐.

“할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도록, 훌륭한 손자가 되겠습니다!”

내 말에 전화기 너머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혀 차는 소리는 보통 경고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오늘은 어쩐지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반갑다.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지 말거라. 모든 힘에는 책임이 따르….

“할아버지! 저 지금 내려갈까요?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없어요?”

-시끄럽다! 어디 방정맞게.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혀를 찬다.

“할아버지! 보고 싶어요! 사랑합니다!”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경거망동하지 않겠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손자가 되겠습니다!”

-쯧쯧쯧. 부족한 놈 같으니. 어디서 이런 놈이 나왔을꼬….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한다.

나는 아직 할 말이 남았다.

“잠깐만! 할아버지! 잠깐만요!”

-…왜 그러느냐.

나는 재빨리 손으로 전화기를 가린 채, 으슥한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할아버지, 저 부탁이 있는데요.”

-말해 보거라.

“부탁이라기보다는 요청이랄까? 허가요청?”

-말하라니까.

“저기 저, 신력을 한 번 사용했으면 합니다.”

-….

할아버지는 말이 없다.

-어디에 쓰겠다는 말이냐.

“제가 좀 갚아야 할 빚이 있어서요.”

-조금 전 내가 했던 말, 그사이 까먹었느냐?

“경거망동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경거망동이라는 단어는 도리나 사정 따위는 상관없이 경솔하게 행동한다는 의미 아닙니까? 저 이거 생각 많이 했거든요. 진짜 생각하고, 또 고민하고, 결정한 거예요. 경솔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는 말이 없다.

즉 내 말이 먹혔다는 의미다.

“그리고 이건 할아버지의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내 가르침이라?

“그러셨잖아요. 맞고 오면 질질 짜지 말고, 가서 패주라고. 복수를 할 거면 무덤 두 개를 파라고. 그래서 원수의 몸을 두 동강 내서 따로따로 묻어버리라고.”

전화기 너머에서 약한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후후후. 내가 승기를 잡았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할아버님의 가르침을 따르겠나이다. 허하여 주시옵소서.”

내 말에 할아버지는 별말이 없다.

그렇게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흐른 후.

-알아서 하거라.

윤허가 떨어졌다.

“적당히 하겠습니다!”

내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오케이! 그럼 무덤을 파러 가볼까?

***

토요일임에도 박기준 변호사는 언제나처럼 자신의 사무실, 자신의 책상에 앉아있었다.

언제나처럼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때,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세 대의 전화기 중 가장 오른쪽에 위치해 있는 전화기였다. 몇몇 사람만이 번호를 알고 있는, 사용 빈도가 가장 낮은 전화기였다.

그 말은 이 전화기를 통해 들어오는 소식은 모두 중요도가 높다는 것을 의미했다.

박기준 변호사는 서류를 내려놓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예약이 확인되었습니다.

전화기 너머에서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박기준 변호사의 오른팔인 정현식 이사의 목소리였다.

-16시 30분 시카고행 US에어웨이즈입니다.

박기준 변호사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11시 20분. 비행기 이륙 시간까지는 대략 5시간 정도가 남았다.

“위치는?”

-5분 전 파악된 위치는 목표의 주거지입니다. 아마 지금 수면 중이라고 생각됩니다.

박기준 변호사는 마우스를 움직여 메일함을 클릭했다.

메일함 안에는 오늘 아침에 들어온 보고서가 있었다.

목표, 제이슨 임은 오늘 새벽까지 청담동 클럽에 있었다. 그가 혼자 사는 수서동 아파트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7시 42분.

평소 그의 행동 패턴을 따져본다면, 아직 잠들어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누가 구매했지?”

-임원영입니다.

임원영. 주식회사 아이테크건설의 대표, 그리고 제이슨 임의 아버지.

박기준 변호사 머릿속에 그림 하나가 떠올랐다.

임원영이 드디어 알아차린 것이다.

장영호가 경찰에 출두한 것이 이틀 전, 임원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 오늘 오전, 아마도 몇 시간 전.

밤새도록 술과 약에 취해 클럽에서 흐느적거리고 집으로 들어와 이제는 잠에 취해있는 아들을 도피시키기 위해 당일 출발하는 시카고행 항공권을 구입한 것이다.

생각보다 행동이 빠르군.

박기준 변호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당황하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는 모두 끝내놓았으니까.

-바로 출국 금지를 진행하겠습니다.

정현식 이사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러들어왔다.

“아니.”

박기준 변호사가 말했다.

-게이트에서 차단하도록 하겠습니다.

정현식 이사의 대답이었다. 오랜 시간 함께 일해온 그가 박기준 변호사의 의중을 알아차린 것이다.

게이트에서 차단한다는 정현식 이사의 말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있었다.

항공사 체크인 마감 시간은 출발 한 시간 전, 그러니 시카고행 항공편의 체크인 마감 시간은 15시 30분. 체크인을 완료하고 출국심사대를 통과하면 대략 15시 40분에서 50분.

그때까지는 제이슨 임을 막지 않고, 항공기 탑승 시간인 16시 10분. 그 20분 사이에 긴급출국 금지명령을 걸어버린다는 의미였다.

출입국관리법상 긴급출국 금지명령의 승인자는 법무부 장관이었다. 다시 말해 법무부 소관이었다. 법무부에서 모든 것을 처리하는 것도 아니었다. 긴급출국 금지를 신청하는 수사기관과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 그리고 공항 관리기관과의 긴밀한 업무협조도 필요했다. 간단히 말하면 긴급출국 금지명령에는 여러 기관의 협조와 복잡한 업무절차가 필요했다.

민간영역에 법무법인이 관여할 수 있는 범주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현식 이사는 그런 복잡한 절차를 마치 간단한 서류작업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었다.

오직 법무법인 철주만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반도에서 최고라고 평가를 받고 있는 민간정보기업 ‘검계(劍契)’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었다.

“그분께서는?”

박기준 변호사가 물었다.

-소계주 님과 함께 망우동에 계십니다. 알려드립니까?

박기준 변호사는 잠시 생각했다.

“지금 말고. 16시 정도가 좋겠군.”

박기준 변호사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정현식 이사의 대답이 들려왔다.

***

오후 3시 56분 인천공항.

제이슨 임은 인천공항 2터미널 출국장 241번 게이트 앞 의자에 앉아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그의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지금 출국은 그의 예정에 없던 일이었다.

만약 오늘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전날 클럽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클럽에서 새벽까지 달렸다.

비싼 샴페인, 영혼까지 울려대는 비트, 정신을 뒤흔드는 조명과 기분을 고조시켜주는 파티 약물에 절어 새벽까지 달리고 또 달렸다.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도 못 한 채로, 그는 아침에서야 잠이 들었고, 해가 지기 전까지 계속 잠들어있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12시 정도에 걸려온 전화가 그의 단잠을 깨웠다.

아버지의 전화였다.

-너 당장 미국으로 가라.

뜬금없는 아버지의 말이었다.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

무슨 문제인지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만, 최대한 빨리 미국으로 떠나라고 했다.

제이슨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미칠 듯이 피곤했지만, 나중에 가겠다고 떼를 쓰기에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무거웠다.

뭐, 그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어차피 비행기에서 자면 되니까.

문제는 아버지가 구해준 티켓이 이코노미 클래스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출국 당일 날, 몇 시간 전에 티켓을 힘들게 구했다는 것도 모른 채, 제이슨은 이코노미라는 사실에 분노를 터트렸다.

미국까지 그 닭장 같은 이코노미에 끼어서 가라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마일리지 업그레이드를 요청했지만 불가하다는 답을 들었을 때, 이미 모든 비즈니스석이 다 차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제이슨은 오늘 가지 않겠다고 결정을 내렸고,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게 이 티켓을 구했든,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오늘 못 가겠다고 통보를 하고 나서야, 아버지에게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장영호가 배신했다.

술과 약에 절은 제이슨의 뇌는 장영호라는 사람을 바로 떠올리지 못했다.

장영호? 장영호가 누구였지?

그렇게 잠시 기억을 뒤져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신림동에서 그 멍청한 자식에게 벌을 내릴 때, 도와주었던 깡패. 그가 장영호였다.

그 장영호가 배신했다고?

그 말은 제이슨에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일단 한국에서 몸을 피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렇기에, 지금 제이슨은 이코노미 티켓을 들고 241번 게이트 근처에 앉아있는 것이다.

이게 다 그 년놈들 때문이다.

제이슨은 한수와 유지연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를 빠득하고 갈았다.

부족했어. 제대로 박살을 내버렸어야 하는데.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겠어. 제대로, 아주 제대로 박살을 내주지.

제이슨이 그렇게 복수의 일념을 활활 불태우고 있을 때, 비행기 탑승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터미널 내에 울려 퍼졌다.

제이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비즈니스 탑승객들이 서는 줄에 섰다.

그가 든 티켓은 이코노미였지만, 우선 탑승이 가능한 항공사 회원등급을 가지고 있었다.

다음에는 진짜로 죽여버려야겠어.

제이슨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티켓을 항공사 직원에게 넘겼다.

티켓을 받아든 직원은 티켓에 찍힌 바코드를 스캔했다.

삑삑삑.

제이슨의 항공권을 인식한 기계는 날카로운 경고음을 토해냈다.

이상함을 느낀 직원은 다시 티켓을 기계에 인식시켰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직원은 곤혹스럽다는 얼굴로 화면에 표시된 메시지로 얼굴을 가져갔다.

당황하기는 제이슨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시민권자인 자신에게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랬는데, 티켓에 문제가 생겼다?

무언가 나쁜 일이 생겼다는 의미였다.

“죄송합니다. 손님. 잠시만 이쪽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다른 직원이 제이슨에게로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제이슨의 티켓을 쥐고 있는 직원은 무전기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좋은 시그널이 없었다.

하지만 제이슨은 물러나지 않았다.

“이런 씨발.”

물러나는 대신 그렇게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뭐야! 씨발 뭔데!”

제이슨이 그렇게 직원에게 막 소리치는 그 순간.

그가 살면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위화감이 그를 찾아왔다.

마치, 제이슨을 둘러싼 모든 세계가 천천히 멈추어버리는 그런 느낌이었다.

사람들도, 공기도, 소리도, 모든 것이 천천히 느려지더니 멈추어버렸다.

제이슨을 제외하고 모든 것이 멈추어버렸다.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 버리는 그의 귀에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렸다.

“뭐긴 뭐야. 긴급출국 금지지.”

제이슨은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자신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제이슨도 아는 얼굴이었다.

한수.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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