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 힘이여 솟아라!
강민철 회장은 서재에 앉아있었다.
강 회장은 전화기를 들고 있었는데, 전화기가 붙어있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렇게 일단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여러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해보아도, 작은 어르신이 대견하시고, 또 대견하시어, 이 노복이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 참으로 곤란한 지경입니다.”
강 회장이 평소보다 높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내가 그러지 않았던가. 자네는 어찌 그리도 마음이 가벼운가.
전화기 너머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이 나이를 먹고도, 이리 마음이 가벼운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참 좋습니다. 너무 대견하시지 않습니까?”
강 회장이 말했다.
그러나 전화기 너머에서는 혀 차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쯧쯧쯧. 대견하기는 뭐가 대견한가. 그놈이 뭐 한 것이 있다고. 자네하고, 기준이 아니었으면 그놈이 뭐 제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마지막에 이 노복이나 박 계주가 아주 작은 힘을 보태기는 했습니다만, 그래도 작은 어르신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결정하시고 실행하셨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무엇보다 작은 어르신의 친우분들이 작은 어르신을 위해서 그렇게 발 벗고 나서주셨다는 것이 저는 그렇게 기분이 좋습니다.”
-뭐, 유유상종이라고, 그 우둔한 녀석의 친구라 우둔해서 그런 것이지.
전화기를 타고 흘러오는 어르신의 말씀에 강 회장은 작게 미소 지었다.
말은 저렇게 하셔도, 어르신도 나름 이번 일을 좋게 평가하고 계심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인데, 이제 벌을 거두어주심이 어떠하신지요.”
강 회장이 물었다.
-벌을 거두라?
“주제넘은 말임은 잘 알고 있습니다. 불경에 대한 벌은 따로 받도록 하고 고하겠습니다. 이번에도 그렇고, 저번에도 작은 어르신께서 가지고 계신 신력이나, 저희의 미약한 힘을 본인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물론 아예 사용하지 않으신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모두가 다른 이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이번에도 서현이나 저의 힘을 빌렸다고는 하지만, 그게 전부 다 윤기훈이라는 소년을 위해서였지, 작은 어르신, 본인을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흐음.
“미욱한 제가 어르신의 깊은 뜻을 어찌 알겠냐마는, 작은 어르신은 신력이나, 종들의 힘을 함부로 사용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라 사료됩니다. 무엇보다 작은 어르신의 신체에 위해가 가는 것이 걱정스러우니, 이 노복을 위해서라도 작은 어르신의 벌을 거두어주심을 감히 간청드립니다.”
강 회장은 그렇게 말했다.
-자네는 나이를 먹더니 마음도 가벼워지고, 쓸데없는 걱정도 늘었구먼.
“이제 죽을 때가 되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허허.”
-쓸데없는 소리도 늘었고.
“그저 송구할 따름입니다.”
-그건 그거고, 어찌 준비는 어찌 잘 되어 가는가?
어르신이 그렇게 물었다.
“네.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그래. 내 조만간 올라가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강 회장은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배어 있었다.
***
토요일 오전,
나는 망우동에 있었다. 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김창회, 박승환, 박찬희, 이중훈, 그리고 지연이까지 모두 출동해 있었다.
오늘이 바로 윤기훈이 새로 구한 집으로 이사 들어오는 날이었으니까.
윤기훈은 며칠 전부터 이미 이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이 딸랑 이불 한 채뿐이었다. 잠만 자는 상태였지.
정확히 말하면 오늘이 제대로 이 집에 자리를 잡는 날이다. 다시 말하면 할머니와 살림살이가 들어오는 날이다.
성남집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 할머니가 왔다 갔다 하시며 두 집을 다 돌보시기로 하셨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망우동에서 더 많은 시간을 계실 테니, 할머니 세간살이도 가져와야 했고, 따로 살림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오늘 중고가구점 가서 이런저런 가구도 좀 마련하고, 다있소에서 생활용품도 구입해서 망우동 집에 풀 세팅을 하는 날이었다.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오늘 팀원들이 소집된 것이다.
열심히 짐을 나르던 나는 잠시 담배도 피울 겸 해서, 편의점에 가서 이온 음료를 사 왔다. 그리고 막 물건 하나를 올려놓고 내려오는 윤기훈을 불러 세웠다.
“야.”
윤기훈이 발을 멈추고 날 바라본다.
“받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이온 음료 하나를 건넸다.
윤기훈이 자식은 음료를 받아들고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뚜껑을 딴다.
이 자식. 창회랑은 무슨 20년 만에 되찾은 형제라도 된 것처럼 살갑게 굴더만, 나에게는 아직 낯을 가린다.
뭐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어찌 되었건 나에게 제일 미안해서 그런 거겠지.
어제 이 녀석하고 경찰서에 다녀왔다. 물론 장영호도 함께.
경찰 아저씨는 놀랬다. 아주 많이 놀랬지.
별것 아닌 사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수했던 녀석이 자수를 철회했다. 단지 그것뿐인가? 우락부락한, 딱 봐도 주먹세계에 속해 있는 것 같은 장영호가, 사실은 자기가 일을 저질렀고, 윤기훈은 자신의 지시에 따라 억지로 자수했다고 자백을 했으니.
그뿐만도 아니었다.
사실 그 배후에는 제이슨 임이라는 개자식도 있어요. 한국의 중견 건설사인 아이테크건설 임원영 대표이사의 사랑해 마지않는 외동아들이 사주해서 이번 일이 일어났고요, 직접 각목을 들어 피해자의 팔을 부러트린 것도 제이슨 임 그 개자식이에요.
말 잘 듣는 장 사장이 그렇게 경찰 아저씨에게 일러바쳤을 때는 경찰 아저씨가 입을 쩍 벌리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 내가 CCTV 영상도 제출했고, 우리 말 잘 듣는 장영호 사장님도 내가 말한 대로 계좌내역, 통화목록, 문자 메시지까지 제대로 준비해오셨다.
그렇게 한바탕 폭풍이 휘몰아치고 나서 강우현 형님이 준비해주신 변호사가 딱 등장해서 제이슨 임에 대한 정식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제 남은 건 인실조… 뿐이라 이거지. 인생은 실전이야 조….
아무튼, 어제 윤기훈 이 녀석도 일단 마음의 짐을 덜었다.
아마 앞으로 추가 조사과정에서 증언을 하거나, 재판에서 증인으로 설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이제 감옥 갈 일은 없게 된 것이다.
뭐, 앞으로의 인생을 어떻게 살지는 이 녀석에게 달렸다.
이온 음료를 적당히 마신 윤기훈은 나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짐을 나르기 위해 달려간다.
그렇게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느새 기훈이 할머니가 날 발견하고 다가오신다.
물론 오늘 하루종일 할머니를 보필하는 지연이도 함께.
지연이는 앞치마에 머릿수건까지 두르고 있다.
이 녀석이! 누가 그렇게 귀엽게 하고 있으래!
“할머니. 이거 드세요.”
나는 재빨리 편의점 봉투에서 홍삼 음료수 하나를 꺼내 뚜껑을 따고 할머니에게 드렸다.
지연이에게는 바나나우유에 빨대 꽂아서.
“아이고. 뭐 이런 걸 다.”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셨지만, 이미 뚜껑을 따버렸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 드신다.
지연이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빨대를 입으로 가져가고.
“새 동네에 사시는 거 괜찮으시겠어요?”
내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에게는 친구가 중요하다고 했는데, 괜히 친구분들에게서 멀어지게 된 것이 아닌가 걱정이다.
“아니에요. 나는 그저, 우리 기훈이만 잘 살 수 있으면….”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더니 손가락으로 눈물을 훔치신다.
“학생에게 이렇게 신세만 지고,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아야 할지….”
“아니에요. 그저 할머니는 건강히 행복하게 사시면 돼요. 그리고, 그거는 기훈이에게 비밀인 거 아시죠?”
내가 말했다.
기훈이에게 비밀인 ‘그거’가 뭐냐 하면!
장영호에게 합의금으로 5천5백만 원을 받았다. 그중 3천만 원은 서현 님께 상환했고, 1천 5백만 원은 할머니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 드렸다. 1천만 원은 비상금, 5백만 원은 월세 1년 치.
내가 말했던 것처럼 기훈이 녀석이 알바 열심히 해서 월세 꼬박꼬박 잘 내면 문제없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니까.
그 녀석이 정신 못 차릴 거라는 걱정을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뭐, 경기적 실업, 마찰적 실업, 계절적 실업 같은, 뭐 그런 거 있잖아.
아무튼 그런 돌발상황에 대한 대비인데, 혹시라도 윤기훈이 녀석이 그 사실을 알고 ‘팽팽 놀아도 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할까 봐 나와 할머니는 그 통장의 존재를 비밀로 하기로 했다.
보증금 삼천, 할머니 비상금 1천 5백 하면 장영호에게 받은 5천5백만 원 중에서 1천만 원이 남는다.
그건 내 비상금으로 하면 좋겠지만….
그건 원장님, 즉 서현 님 고모부에게 드렸다. 기훈이 아버님 치료비로 처리해달라고.
아마 병원 측에서는 내가 특별히 돈을 드리거나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처리해 주었겠지만, 미안하잖아. 자꾸 부탁만 하는 게.
돈이 없으면 모를까, 합의금 받은 게 있으니,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럼 남는 게 없다고?
아니다. 나도 남는 게 있다.
일단 기훈이 보증금 3천만 원. 저거 내 꺼다. 차용증도 있다.
10년 후가 되겠지만, 뭐 그때 가서 받아야 내 수중에 들어오는 거지만, 아무튼 내 돈은 내 돈이다.
든든하구만. 후후후.
그리고 또 받을 돈이 있지.
우리 제이슨 임.
제이슨 임은 기소가 될 거다. 다시 말해 형사재판을 받을 거다.
있는 집안의 사랑받는 외동아들이니 합의하자고 할 게 뻔하고, 난 합의해주지 않을 거다.
공탁 걸고 뭐 난리를 치겠지. 뭐 내가 원하는 돈이야 그깟 공탁금 몇 푼이 아니다.
형사소송 뒤에는 민사소송이 따른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
민사소송에서 다 받아낼 거다.
중앙의료원 특실 입원비에다가, 상해에 대한 위자료까지. 아. 그리고 내 변호사 비용도 그쪽에서 부담해야 하고. 승소 백 퍼센트 자신 있다.
서현 님에게 말해서 비싼 변호사 선임해 달라 해야지!
우후후.
아주 제대로 금융치료 해줄 생각을 하니 신난다.
아무튼, 그렇게 할머니에게 다시 입단속을 시킨 후, 나는 커다란 옷장이 놓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건 절대 혼자서는 못 든다. 창회, 그 괴물이라면 모를까, 나 같은 일반인은 절대 혼자서 못 든다.
아니, 부피 때문에 김창회도 안 될 거야.
아무튼, 나는 다른 놈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옷장을 슬쩍 잡아보았다.
아오. 신력만 있다면 이까이 꺼 껌인데.
힘이여 솟아라!
그렇게 말하고 들면….
어?
들리네?
들렸다.
커다란 2단 옷장이 초등학교 책상처럼 가볍게 들린다.
나는 재빨리 옷장을 내려놓았다.
누가 보았나 싶어서 재빨리 주변을 돌아보았는데, 다행히도 아무도 눈치를 못 챈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다시 한번 주변을 살펴보고, 천천히 생각을 정리했다.
돌아온 건가? 벌이 끝난 건가?
모르겠다. 할아버지에게는 특별히 무슨 말이 없었는데?
쓰읍. 그러면 한번 시험해볼까?
자고로 신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때는 이게 최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속으로 읊조렸다.
시간아 멈춰라.
그리고 익숙한 느낌이, 나를 둘러싼 세계가 천천히 멈추는 느낌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