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 중도상환수수료
오전에 장영호를 설득(?)한 나는 오후에는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유 선생님의 명강의를 들으니 영혼까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아무튼, 그렇게 열심히 수업을 듣고 언제나처럼 그 벤치에 앉아있는데 뭔가 기분이 묘하다.
뭐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는 장영호 건도 해결된 것 같고, 늦지 않게 학교 도착해서 수업도 들었으니, 오늘 해야 할 일은 모두 계획대로 잘 처리한 거다.
그러니까 후련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뭔가 좀….
찝찝하다? 그런 감정은 아닌데….
뭐랄까? 점점 평소의 나에게서 멀어져 가는 불안감?
하긴, 어느 대학생이 오전에 조직폭력배와 유사한 곳에 단독으로 쳐들어가 5천5백만 원을 뜯어 오겠어. 그러고선,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학교에 와서 열심히 수업까지 듣고.
그런 이야기 하면 빨리 병원 가라고 하겠지.
아무튼, 그런 요상한 기분을 느끼며, 벤치에 앉아있었다.
에휴. 오늘은 피곤하다.
피곤한 게 당연하지. 성수에서 경기도 광주로, 경기도 광주에서 다시 학교로. 이동 거리도 길었다.
직접 자동차를 운전했다면 그렇게 피곤할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는데, 전부 다 대중교통을 이용했더니 그것만으로도 지친다.
아. 그때, 서현 님이 삼각별 준다고 했을 때 눈 딱 감고 받아버릴 것을, 괜히 멋있는 척한다고 거부해 가지고.
아니지! 아니야! 한수 이 자식아! 너 시골에서 땅 파먹던 한수야!
벌써부터 해이해져서 말야!
서현 님이랑 회장님이 우쭈쭈해 준다고 자꾸 그런 걸 당연하게 여기지 말란 말이다!
솔직히 이번 일도 그렇다.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회장님의 힘을 빌리고야 말았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냥 일반 대학생이었다면 나는 이번 일을 해결하기는 쉽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불가능했겠지.
기훈이에게 빌려준 보증금 3천만 원도, 장영호 그 사람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다른 방법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이번처럼 쉽게 해결이 되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니 또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렇다. 나는 그저 일반인일 뿐이다.
내 주먹이 닿는 범위는 그저 내 팔을 뻗을 수 있는 범위 안이다.
운이 좋아 이번 일은 어찌저찌 해결할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진중하게 행동해야겠다.
뭐, 지연이를 도운 것을 후회한다는 말은 아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나는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지연이 녀석 얼굴만 예쁜 것도 아니고 마음도 참 깊다. 그런 녀석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당연히 힘이 되어야지.
아무튼 끝났다. 일단 집에 가서 밥 먹고 오늘은 일찍 자자.
안 그래도 서현 님이 오늘 저녁은 기대하라고 했었다.
조금 전에 장영호 사무실에서 나와 서현 님에게 제일 먼저 보고를 드렸다.
걱정하실 게 뻔하잖아?
우리 서현 님. 목소리는 좀 가라앉아 있었지만, 아무튼, 잘 해결되었다는 말에, 수고 많았다고,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거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우후후. 빨리 집에 가야지. 집에 가서 서현 님이랑 맛있는 저녁밥 먹고, 맛있는 차 마시면서 알콩달콩 놀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니, 불길한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친다.
이 벤치는 저주받았다. 여기 앉아있으면 사람들이 찾아와 말을 건다.
그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고 간다.
그렇다면?
재빨리 튀는 게 상책이다.
누군가 찾아오기 전에 재빨리 튀자. 서현 님에게로 튀자.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 막 몸을 일으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나에게 들린다.
“저기….”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아직 얼굴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내 전 여자친구, 신지수를 바라보았다.
***
커피 한잔할 수 있겠냐는 신지수의 말에, 나는 약속이 있으니 할 이야기가 있으면 여기서 하자고 말했다.
비슷한 기억이 있다.
아마도 서현 님을 알게 되고 얼마 되지 않았던 그때, 서현 님과 같이 장을 보러 가기로 약속했던 그때.
그때도 신지수를 만났다. 아니, 나를 찾아왔었다.
나는 서현 님을 바람맞히고, 우리가 자주 가던 카페에 가서, 얼굴을 마주 보고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분노했고, 그 분노를 날카로운 말에 담아 그녀를 찔렀다.
그리고 집까지 터덜터덜 걸어왔었더랬지.
찌질했었네. 진짜 찌질했구나.
물론 지금도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시의 내가 진짜 찌질했다는 것 정도는 알아챌 정도로 안정된 상황이다.
그래서 신지수가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데 그다지 우울하지도 않다.
“…잘 지냈어?”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신지수가 묻는다.
“어. 뭐. 그렇지. 뭐.”
나는 그렇게 대충 말했다.
후배를 도와주다 제이슨과 엮이고, 두들겨 맞고…. 그런 설명을 할 수는 없잖아. 따지면 신지수가 아예 관계없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아?”
신지수가 말한다.
슬쩍 옆을 보니, 그 녀석의 시선이 내 팔에 깁스로 향하고 있다.
‘병원 갔을 때, 풀어버릴 것을 그랬나?’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고, 그런 생각을 한 내가 우스워서 피식하고 웃어버렸다.
“괜찮아.”
나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향했다.
“이야기 들었어.”
신지수가 말한다.
“…혹시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을까 싶어서.”
나는 신지수를 다시 돌아보았다.
여전히 예쁜 녀석이었다. 그 예쁜 얼굴에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슬픈 표정을 담고 있다.
예전에는 미안하다는 표정을 담고 있었다. 그렇게 나를 떠난 이후, 신지수는 나를 보면 미안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음에 어둠이라는 것이 없는 사람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슬픈 표정을 하고 있다.
친구였을 때, 연인이었을 때, 그리고 미움이었을 때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신지수가 누구에게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걸 묻는 대신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내가 말했다.
“…응.”
신지수가 그렇게 말한다.
나는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 지을까 하다가, 무슨 생각에서인지 조금 더 말을 보탰다.
“너의 도움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야. 다 해결되었다는 의미지.”
그런 나의 말에 신지수는 한동안 말이 없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조용하게 말한다.
“…고마워. 그렇게 말해줘서.”
그리고 다시 침묵.
나는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예전처럼 아프지도, 괴롭지도, 스스로에게 분노하지도 않았지만 편한 자리는 아니었으니까.
막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는 말을 꺼내려는데, 지수가 먼저 말한다.
“승환이가… 이야기 안 했어?”
신지수가 말한다.
나는 신지수를 바라보았다.
내가 마음을 빼앗았던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들은 거 없어.”
그렇게 말하고 그녀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신지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다.
나는 그런 그 녀석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특별히 할 말 없으면 난 먼저 갈게. 약속이 있어서.”
내 말에 신지수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작게 끄덕인다.
“갈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천천히 발을 옮겼다.
“저기!”
그렇게 몇 발자국 걸어갔을 때, 뒤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신지수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미안해. 그렇게….”
나는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천히 셔틀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어 나갔다.
***
맛있는 걸 만들어주시겠다는 서현 님의 말에 나는 웨스턴 스타일의 음식들을 떠올렸었다.
왜 티본스테이크라던가, 요즘 유행하는 토마호크라던가, 아무튼, 서양 형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거.
그런데 집에 오자 전혀 상상도 못 한 음식이 식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휴먼최강록체로 표현하자면, ‘묵은지찜으로 하겠습니다. 근데 이게 훈제 삼겹살을 곁들인.’
묵은지찜이라니요! 아니, 이렇게 귀한, 아니, 어려운 요리를 우리 서현 님이?
“압력밥솥이 있으면 쉽게 만들 수 있어요.”
서현 님이 별것 아니라는 듯 그렇게 말씀하신다.
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저 같은 요리 똥손은 압력밥솥이 아니라 압력 고든 램지가 있어도 안 될 것 같은데요? 아니. 애초에 고든 램지에게 김치찜은 무리려나?
아무튼, 김치찜과 맑은 콩나물국, 그리고 몇 가지 밑반찬으로 이루어진 정찬이 차려졌다.
진짜 체면도 모르고 정신없이 먹고 있는데, 서현 님이 물어보신다.
“드실 만하세요?”
서현 님의 질문에, 나는 밥그릇을 들어 보였다.
벌써 네 번이나 밥을 리필한 밥그릇이었다.
***
배가 터질 것 같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언제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하는데, 오늘의 내가 딱 그 짝이다.
밥을 네 공기나 먹었다. 그것도 꽉꽉 눌러 담아서.
인간적으로 너무 맛있었다.
아직 올해가 끝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만, 단언하건대 올해 최고의 식탁 포디엄에 한 자리를 차지할 만한 저녁 식사였다.
“차 드세요.”
힘들게 씩씩거리고 있는데, 서현 님이 내 앞에 찻잔을 내려놓는다.
지금 상황에서는 차는커녕, 물도 한 방울 못 마실 것 같은데요.
그런 생각을 하며 찻잔을 보니 캐모마일이 아니네?
“매실차예요. 소화에 도움 되니까 조금이라도 드세요.”
역시. 우리 서현 님은 다 계획이 있으시다.
새콤달콤한 매실 맛이 느껴진다.
서현 님은 그런 내 모습을 옆에서 바라보고 계신다.
나는 매실차를 마시며, 서현 님께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승환이를 만났고, 깡패소굴로 쳐들어갔고, 장영호를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방송심의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순화해서 최대한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는 서현 님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지만, 결국 내가 자백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고, 돈도 5천5백만 원이나 뜯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칭찬해준다는 듯 미소를 짓는다.
“약속은 받았는데, 잘 될까 모르겠어요.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언제 변할지 모르니.”
내가 말했다.
“오빠가 잘 마무리 할 거예요. 그런데 왜 5천5백만 원이에요?”
서현 님이 물어보신다.
“일단, 3천만 원은 서현은행에 상환하려고요.”
내 말에 서현 님이 작게 웃는다.
“빨리 안 주셔도 돼요.”
“제가 안 돼요.”
“부담되세요?”
“아니요. 부담은 안 되는데, 그 돈 가지고 있으면 허튼 데 써버려요. 할아버지가 말씀하시길 돈이라는 것은 모래와 같아서 그냥 들고 있으면 손에서 슝슝 빠져나간다고 했거든요.”
“한수 씨 쓰세요. 비상금으로 가지고 계시던가.”
“비상금은 따로 만들 수 있어요. 그러니 상환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하지만 중도에 상환하면 중도상환 수수료가 있는 것 아시죠?”
응? 그런 것도 있었어?
나는 몰랐지. 내가 뭐 대출을 받아봤어야 알지.
아니, 그건 그거고, 빨리 갚는데 왜 수수료를 내야 하는 거지? 이자를 덜 내니까 수수료라도 내라 이건가?
“알죠. 당연히 드려야죠. 어떻게 드릴까요?”
나는 철판 깔고 그렇게 말했다.
설마 돈 달라고는 안 하시겠지?
“영화 보여주세요.”
“영화요? 어떤 영화요? 보고 싶은 영화 있으세요?”
“고어만 아니면 상관없어요.”
서현 님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고어만 아니면 상관없다? 그럼 공포는 괜찮다는 말씀?
아니지. 영화를 볼 게 아니고, 우리 영화 하나 찍어볼까요? 로맨스, 로맨틱 코미디? 격정 멜로? 에로스?
그런 생각을 했더니, 미니미가 나 불렀어? 하며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다.
아니야. 일단 들어가.
“넵. 제가 영화 골라볼게요. 언제가 좋으세요?”
“전 언제든 괜찮아요. 하지만 주말이 좋지 않을까요? 토요일은 어떠세요?”
토요일에 영화관이라. 이건 흡사 데, 데, 데이트 아니던가?
그런데…. 생각해보니 토요일에 일정이 있다.
“토요일은 좀 그렇고, 일요일은 어떠세요?”
“네. 일요일 좋아요.”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고 날 바라본다.
그 눈빛이 묻고 있다. 토요일에 무슨 일이 있어요? 그렇게.
“죄송해요. 토요일에 다른 게 아니라. 그게….”
“괜찮아요. 한수 씨 일정을 하나하나 저에게 말씀해주실 필요는 없어요.”
서현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
자. 주목.
만약에 여자친구나, 썸 타는 사이거나, 뭐 아무튼, 호감을 얻어야 하는 상대가 이렇게 말했다 치자.
그럴 때, ‘역시! 내 여자친구는 이렇게 이해심이 많아요.’하고 생각하면 큰일 난다. 정말 큰일 난다.
진짜다. 이거 시험에 나옵니다.
“아니에요. 하나하나 다 말씀드리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라 이겁니다!
내가 정답을 말하자, 서현 님이 작게 웃는다.
“그럼 토요일에 뭐 하시는데요?”
“이사요.”
내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