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98화 (98/271)

98 : “중앙의 힘을 이용하시길 제안 드립니다.” (1)

병원에서 퇴원하는 날, 나는 명함 한 장을 받았다.

서현 님의 친오빠, 강우현. 그의 명함이었다.

명함을 받을 때만 해도 내가 그에게 전화를 하거나 받을 일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저 한 번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서현 님의 하나뿐인 친오빠이고, 또 내가 작은어르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다고는 하지만, 뭐 개인적인 친분을 쌓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열두 살이라는 나이 차이도 그렇지만, 중앙그룹의 두뇌라고 하는 글로벌전략기획실의 팀장님과 내가 엮일 일이 뭐가 있겠는가.

하지만 전화번호는 저장해 두었다.

반쯤은 장난 같은 마음으로 ‘ㅅㅇㅊㄴ’이라는 초성으로. 아내의 오빠라는 의미의 ‘손위처남’을 의미하는 초성이었다.

나는 전화기를 손에 든 채로 승환이를 바라보았다.

내 눈빛을 읽었는지, 박승환이 작게 고개를 끄덕여준다. 전화를 받고 오라는 의미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일전에 인사드렸던 강우현입니다.

전화기에서 매력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네. 안녕하세요.”

-혹시 통화 가능하십니까?

“네. 괜찮습니다.”

-괜찮으시면 잠깐 뵈었으면 합니다. 지금 어디신가요?

만나자고? 나를?

“지금 학교 근처입니다. 혹시 어떤 일 때문에….”

-만나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런 대답이 돌아왔다. 전화로 이야기할 내용은 아니라는 말이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어디로 찾아뵈면 될까요?”

-한 시간 후에 서초역 인근은 어떠하십니까?

강우현, 이 아저씨는 강 회장님처럼 당장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사실 난 그게 좋다.

“네. 알겠습니다.”

-주소를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나는 전화기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박승환은 조금 전과 같은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다.

지금부터 이 녀석을 갈구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약속시간까지 한 시간, 서초역까지는 여유 있게 30분이면 도착하겠지만, 난 슬슬 출발하기로 결정했다.

늦는 것보다 먼저 가서 기다리는 게 성격에도 맞고, 무엇보다 서현 님 오빠라는 존재가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갑자기 누굴 좀 만나봐야 할 것 같다.”

나는 박승환에게 내가 방금 전 했던 전화통화를 그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해 말해주었다.

박승환은 누구의 전화인지, 갑자기 왜 만나는지 묻지도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나는 그런 박승환의 눈을 보며 말했다.

“일단,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 이따가 전화할게. 아니, 약속장소가 서초역이니까 끝나면 내가 너희 집 근처로 가든지 할게.”

***

나는 카페 같은 데서 만날 줄 알았다. 그런데 서현 님 오빠가 보내온 주소는 오피스텔을 가리키고 있었다.

카페라면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되는데, 오피스텔은 그러기가 좀 그래서 나는 서초역 인근에서 20분 정도 시간을 때워야 했다.

나는 편의점 벤치에 앉아 서현 님의 오빠 강우현, 그 아저씨가 왜 날 보자고 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일단 몇 가지 가설이 떠오른다.

우선, 서현 님에 관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그분이 서현 님의 유일한 오빠고, 나는 서현 님의 동거인이라는 사실이다.

뭐 동거라고는 해도 그냥 같은 집에서 사는 거지, 그게 뭐 사실혼 관계 같은 것은 아니기는 하지만, 오빠 입장에서는 동생과 같이 사는 놈이 좋게 보일 리가 없겠지.

저번에 만났을 때도 뭐랄까, 그 표면적으로 적의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좀 냉기 서린 아우라가 느껴지기도 했었다. 뭐, 나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면 그렇게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흠. 갑자기 도망가고 싶어지는데?

두 번째로 내가 작은어르신이라는 관점이다.

서현 님 말에 따르면, 그분이 앞으로 중앙그룹을 이어갈 거라고 하셨다. 미래의 강 회장님이 되신단 말이지.

그 말은 할아버지와 강 회장님의 관계가 그분과 나로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중앙그룹에 관한 이야기일까?

나는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중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중앙그룹과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없다.

내가 소유권을 주장한 것도 아니고, 그런 상황에서 중앙그룹의 뇌세포 중 하나인 그분이 나에게 중앙그룹에 대해 보고하거나 문의할 이유가 없다.

아니, 생각해보면 지금 당사자인 할아버지도 그럴 것 같지는 않은데?

할아버지가 중앙그룹 운영과 관련해 강 회장님에게 하나하나 지시를 내린다고?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럼 뭐지?

***

그렇게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 약속시간 5분 전에 나는 그분이 알려주신 오피스텔로 향했다.

문 앞에 사서 잠시 숨을 고른 후,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벨 소리가 들리고 몇 초도 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얼마 전에 보았던 서현 님 오빠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가 서현 님 오빠 아니랄까 봐, 겁나 잘생긴 얼굴에 명품 양복 카탈로그에서 볼 법한 남성모델의 핏을 가진 사람이 문을 열어준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현 님 오빠는 그렇게 말하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다.

나도 질 수 없지. 더 깊숙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무튼, 서현 님 집안은 방심하고 있을 수가 없어.

서현 님 오빠의 안내를 받아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하나, 방 하나인 구조의 오피스텔은 깔끔했다.

아니, 깔끔했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다. 황량하다. 그 표현이 더 적합한 것 같다.

대충 한 여섯 명 앉을 수 있을 크기의 책상 하나, 책상 위에 커다란 모니터 하나, 의자 몇 개. 거실에 있는 물품은 그 정도뿐이었다.

마치 국정원 요원들이 임시로 사용하는 안전가옥?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내가 국정원 안전가옥을 가본 건 아니지만.

날 의자로 안내한 서현 님 오라버니는 냉장고를 열고, 생수 한 병을 꺼내 내 앞에 놓으며 말한다,

“임시로 사용하는 공간이라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역시 안가가 맞았군. 국정원이 아니라 중앙그룹의 안전가옥.

서현 님 오빠는 그렇게 물병을 내려놓고 내 맞은편에 앉는다.

확실히 눈앞에 앉아 있는 이분은 강 회장님이나 서현 님과는 좀 다르다. 정중하지만 과하지 않다.

뭐랄까? 나쁘게 말하면, 사무적으로 대한다? 그런 느낌이랑 비슷한데, 나는 그게 싫지 않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신가요?”

나는 뭐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쩐지 서현 님 오라버니께서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작은어르신께 고언을 드리기 위해서 이렇게 뵙자고 했습니다.”

고언? 쓴소리?

“장영호를 어떻게 해결하실 생각이십니까?”

서현 님 오라버니께서 나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

“그럼 회장님,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강서현은 서류 파일을 받아들며 강민철 회장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할아버지가 아닌 그룹 회장님에게 하는 인사였다.

회사에서 강서현은 철저하게 비서실 소속 직원으로 행동했다. 단 둘뿐이더라도, 절대로 강민철 회장을 할아버지로 대하지 않았다.

“잠깐 시간 괜찮으냐?”

그렇게 사무적인 태도로 몸을 일으키는 강서현에게 강 회장이 말을 걸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던 강서현의 몸이 멈추었다.

“추가로 지시할 사항이 있으십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하자꾸나.”

강 회장의 말에 강서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지시를 기다린다는 표정으로 강 회장을 바라보았다.

강 회장은 그런 강서현을 보고 작게 미소 지었다. 손녀를 보는 할아버지의 미소였다.

“잘 마무리되었느냐?”

강 회장이 물었다.

강서현은 대답하지 못했다.

잘 마무리되었느냐고? 무엇에 관해 물어보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도 그것이었지만, 지금 회장님이 그룹 회장님으로서 물어보는 것인지, 아니면 할아버지로서 물어보는 것인지도 헷갈렸다.

“오늘 새벽, 성남에 갔던 일 말이다.”

강 회장이 말했다.

강서현은 그제야 무엇을 잘 마무리했냐고 묻는 것인지 알았다.

새벽, 성남에 갔던 일.

윤기훈의 부친을 입원시킨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강 회장이 아는 것이 당연했다. 고모부가 이야기를 했을 테니까.

아니, 설사 고모부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작은어르신에 관련된 일이니까, 보고를 받고 있을 것이다.

“…네. 잘 해결되었어요.”

강서현의 말투가 바뀌었다. 비서에서 손녀로.

“어떻게 되었는지 이야기해줄 수 있겠느냐.”

강 회장이 할아버지의 얼굴로 그렇게 물었다.

강서현은 전날 일부터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었다.

윤기훈의 할머니를 모시고 가서 집을 계약한 이야기부터, 계약하고 점심을 대접해드린 일, 윤기훈의 아버지를 어떻게 입원시켜야 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한 이야기, 그리고 강제입원이 아닌 설득을 하면 어떠하겠냐는 의견을 제시했고, 기훈 학생이 받아들여 새벽에 모두 출동했다는 이야기까지 어느 것 하나 빼먹지 않고 말해주었다.

강 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녀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해주었다.

“기훈 학생은 더 이상 아버지를 미워하고 싶지 않다고, 더 미워하게 되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러면서 작은어르신이 해주신 이야기를 말해줬어요.”

“…작은어르신께서 무어라고 하셨더냐.”

“기회를 주겠다고 하셨대요.”

“기회?”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그 기회를 주겠다고 말씀하셨대요.”

***

윤기훈은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다 틀렸다고 생각했어. 돌이키기에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 생각했어. 앞으로 내 인생은 감옥이나 폭력조직 말고는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그때 그 형이 말했어. 기회를 주겠다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고.”

윤기훈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윤기훈의 부친은 말없이 그런 아들의 눈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어. 기회를 준다고? 고작 나보다 한두 살 더 많은 저 사람이 무얼 해줄 수 있는데? 미친 헛소리 하지 마!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어. 그런데 그럴 수 없었어. 왜 그런지 알아? 진짜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라서. 이 기회를 놓치면 진짜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윤기훈이 강하게 외쳤다.

윤기훈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있는 강서현은 그런 윤기훈의 외침이 마치 영혼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형이 보증금을 마련해줬어. 사람을 때리고 백만 원을 받았는데, 내가 때린 사람이 나를 위해 삼천만 원을 마련해줬어. 아니! 돈이 문제가 아니야. 그 바보 같은 형은, 바보 같은 그 형 친구들은 같이 집을 찾아봐 주고, 할머니를 어떻게 모셔올지, 어떻게 설득할지를 고민해주고, 아빠를 어떻게 치료할지에 대해 설명해줬어! 그 모습을 보고 나도 확신할 수 있었어.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바로잡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윤기훈의 목소리는 말이라기보다 울부짖음에 더 가까웠다.

“나는 당신이 싫어. 정말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당신이 싫어! 하지만 지금보다 더 싫어하면 더는 돌이킬 수가 없을 것 같아. 돌아올 수 없을 것 같다고!”

강서현은 자신의 손을 힘주어 잡아 오는 할머니의 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의 손을 조금 더 힘주어 잡아줬다.

***

새벽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손녀의 눈에는 물기가 묻어 있었다.

“기훈 학생 부친은 한마디 말도 없이 기훈 학생이 하는 말을 듣고만 계셨어요. 기훈 학생의 이야기가 모두 끝났을 때, 아들에게 고개를 숙이셨어요. 미안하다고. 면목이 없다고. 그러면서 그 마지막 기회를 자신도 놓치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말씀하시고 자진해서 입원을 선택하셨어요.”

“고생했구나.”

강 회장은 따뜻한 시선으로 손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작은어르신이 다 하신 거예요. 저는 뭐,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강 회장은 그렇게 말하는 손녀의 눈에, 작은어르신에 대한 강한 신뢰가 담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더냐?”

강 회장이 물었다.

자신이 한수에게 했던 질문이었다.

장영호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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