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97화 (97/271)

97 : 각목은 훌륭한 대화수단 (2)

프린스와 헤어지고, 과방으로 오니, 친구 놈들이 언제나처럼 과방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다.

박승환은 책상에서 정체 모를 책을 읽고 있고, 김창회는 과방 구석에서 열심히 덤벨을 들어 올리고 있고, 박찬희는 소파에 널브러져 자고 있고, 이중훈이는 너튜브라도 보는지,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다.

김창회 자취방에 모여서 어떻게 할지 논의할 때는 정말 믿음직스러운 친구 놈들이었는데, 과방에 널브러져 있는 이 녀석들 모습은 잉여 그 자체다.

“오빠. 오셨어요?”

노트북을 켜놓고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지연이만 빼놓고.

“응. 레포트?”

“네. 끝이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울상을 짓는데, 그 얼굴을 보니 ‘비켜봐. 내가 해줄게.’ 그렇게 말하고 싶다.

이게 보호 본능이라는 건가? 부성애라는 건가?

뭐, 아무튼, 그렇게 말했다가는 친구 놈들에게 끌려 나가겠지.

하지만 이중훈은 포기하지 않는다.

“도와줄까?”

“아니에요. 괜찮아요, 거의 다 끝났어요.”

지연이가 그렇게 거절하자, 시무룩한 얼굴을 한다.

평소 같으면 우헤헤 이 자식아. 너는 글렀어. 그렇게 말해주겠지만, 내가 그럴 입장은 아니지.

그리고 요 며칠 동안 중훈이 이 자식을 다시 봤다.

고마운 놈인데, 그렇게 도발할 수는 없지.

아니지? 고마운 거는 고마운 거고, 친구라면 도발해야 하는 게 정상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며 이중훈에게 다가갔다.

“뭐 보냐?”

그리고 이중훈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생각대로 너튜브 영상이었다.

너튜브는 너튜브인데, 거기에 예상 못 한 인물이 떠 있었다.

“프린스?”

그랬다. 몇 분 전 만났던 프린스가 휴대폰 안에 있었다. 휴대폰 안에서 한적한 공원을 걷고 있었다.

형이 왜 거기서 나와?

프린스 너튜브도 하는 거야? 채널도 있는 거야?

“어. 같이 볼래?”

중훈이가 그러면서 무선 이어폰 한쪽을 빼내어 나에게 건넨다.

나는 그걸 받아들어 귀에 끼고서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

중훈이는 프린스를 보기 위해 너튜브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뭐, 당연한 이야긴가? 프린스가 아무리 유명하고 대단하다고 해도 남자인데.

우리 나이 또래의 남자들은 기본적으로 다른 남자에게 관심이 없다. 아니, 프린스처럼 잘생기고, 잘난 남자들은 잠재적인 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프린스가 너튜브 채널을 만들면 골드버튼 따위야 순식간에 따버리겠지만, 적어도 그 구독자 명단에 나나 내 친구들은 없을 것이다.

중훈이가 보던 채널은 문화관광부 채널이었다. 한국을 소개하는 그런 영상이었고, 우리 프린스와 고마음이 공원을 걷고 있었다.

고마음,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 여배우.

6살에 아역으로 영화 첫 데뷔, 데뷔작품이 천만 영화 반열에 오르면서 사람들에게 얼굴과 이름을 알렸다.

그렇게 이름을 알렸음에도 이후에 소식이 없다가 성인이 된 20살에 다시 은막으로 복귀.

단순히 복귀한데서 끝나지 않고, 복귀 작품으로 대한민국 3대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휩쓸어버렸고, 그 다음 작품은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을 받아 20대 초반의 나이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여배우 자리에 오른다.

뭐, 나도 고마음이 나온 영화 보기는 했는데, 확실히 예쁘긴 예쁘다. 아니, 그냥 예쁘다는 말로는 좀 부족하고, 뭔가 그 애잔한, 보고 있으면 좀 슬픈? 아무튼 그런 고마음 특유의 분위기가 진짜 독보적이다. 화면 너머로도 느껴질 정도면.

그리고, 사실 고마음이 더 대단한 것이, 외부 활동이 거의 없다. 영화를 찍을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외부로 나가지를 않는다고. 어느 정도냐 하면 CF나 예능촬영 같은 외부활동이 일체 없다. 외부 활동 자체를 전혀 하지 않다보니 루머나 구설수는커녕 그 흔한 공항패션샷 같은 것도 단 한 장이 없으니 뭐 말 다했지.

중국의 한 부동산 기업에서 고마음을 광고모델로 기용하겠다고 고마음은 물론 고마음의 증손자까지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베팅했다고 하던데, 그것도 단숨에 거절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뭐, 아무튼 고마음 특유의 그런 애잔한 분위기에 신비주의까지 더해지니, 인기는 더욱 치솟아서, 대한민국 건국 이래, 아니 한반도 반만년 역사 이래 가장 사랑받는 여배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외부 활동이 없는 고마음이라고 해도 한국을 소개하는 공익광고 같은 데에는 나오나보다.

머리 잘 썼네. 인지도 더 올라가겠어.

아무튼, 이중훈은 고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프린스가 아니라. 이 녀석도 고마음 팬이었나?

그나저나 프린스. 진짜 대단하다. 대한민국 최고 탑스타 앞인데도 얼굴이 밀리지를 않네.

다른 사람 같았으면 그냥 오징어 돼버렸을 텐데. 아니, 오징어도 힘들고 쭈꾸미.

“프린스가 잘생기긴 했네. 그림이 되네. 둘이 잘 어울리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이중훈이 날 째려본다.

뭐야. 이 자식 진짜 팬이야?

그만둬라. 차라리 2D는 어때? 2D는 너만 바라봐 줄 텐데. 다른 놈 안 만나고.

그나저나 조회 수 뭐야? 어디 보자. 일십백천만…천만? 조회 수가 천만 단위야?

인기 있다고 하기는 하는데, 진짜 대단하긴 한가 보다. 무슨 조회 수가 천만 단위야?

그런 생각을 하는데 뒤에서 말소리가 들린다.

“진짜 예쁘긴 예쁘네.”

어느새 뒤에 찬희가 뒤에 붙어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누군데?”

열심히 덤벨을 들고 있던 창회가 물어본다.

“고마음.”

박찬희의 대답에 김창회가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를 끄덕인다고?

김창회가 ‘누군데?’라고 안 물어보고 고개를 끄덕인다고?

김창회가 안다고?

“예쁘지. 특히 그 분위기가 장난 아니지.”

머릿속에 운동과 단백질밖에 없는 김창회가 알 정도면 전 국민이 다 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마음은 누구랑 결혼할까?”

박찬희가 중얼거린다.

그 중얼거림을 받은 것은 박승환이었다.

“그레이스 켈리.”

“응?”

“그레이스 켈리가 팬하고 결혼했지. 앤 해서웨이도 팬하고 결혼했고.”

박승환의 그 말에, 이중훈과 박찬희가 승환이를 돌아본다.

그 눈이 반짝반짝하다.

팬하고 결혼했다는 박승환의 말이 그 녀석들의 어딘가를 건드린 거겠지.

아서라. 이 녀석들아. 그거 다 허튼소리다.

“그레이스 켈리의 팬은 모나코 공이잖아. 모나코의 왕.”

내가 말했다.

“앤 해서웨이 남편도 유명한 사람 아니었어요?”

지연이가 말한다.

“애덤 슐만. 보석디자이너.”

박승환이 그렇게 말해주자 중훈이와 찬희의 눈에 실망이 깃든다.

“신 포도다. 너튜브 안에 저 포도는 신 포도다.”

박중훈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책에 시선을 주었다.

***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와 박승환은 학교 근처, 사람 없는 카페에 앉아 있었다.

“진철이 형, 그 양반 뭐 알고 있는 거 아냐?”

몇 시간 전, 진철이 형하고 나눴던 대화를 전해들은 박승환이 말한다.

“설마. 진철이 형이 어떻게 알겠어. 그냥 원론적인 이야기를 한 거겠지.”

내 말에 박승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수정 누나가 자기 좋아하는 것도 모르는 사람이 너의 일까지 어떻게 알겠어.”

응? 이게 무슨 소리야?

“수정 누나가 진철이 형을 좋아해?”

내가 그렇게 묻자 승환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몰랐어?”

“몰랐지.”

“진철이 형하고 너 빼고 과 사람들 모두가 알 거다. 교수님들도 아실 것 같은데.”

“고백 안 했나?”

“고백 안 했어.”

“의외네. 수정이 누나 성격 같아서는 진철이 형 멱살 잡고 너 내 남친 해라. 오늘부터 1일이다. 그럴 것 같은데.”

“원래, 수정이 누나 같은 사람이 마음 안에 소녀 감성을 품고 있는 거야. 아무튼, 그건 넘어가고, 진짜 진철이 형이 그렇게 말했다 이거지?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하라고?”

“어. 뭐. 그렇다고 해서 진철이 형에게 도움 받을 게 없다.”

“각목 하나 쥐어주면 되지 않을까?”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승환이를 바라보았다.

물론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장영호. 해결해야지.”

박승환이 그렇게 핵심을 파고든다.

뭐, 사실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다른 놈들 다 빼놓고 승환이하고 둘이서만 만난 것이긴 하다.

다른 녀석들은 장영호라는 존재에 대해서 모른다.

아. 서현 님은 아시는 구나. 하지만 이미 충분한 도움을 받은 서현 님을 이번 일까지 끌어들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 해결해야지.”

“방법은?”

박승환이 그렇게 물어본다.

“…각목?”

내가 그렇게 말하자 박승환은 조금 전 자신이 받았던 눈빛을 그대로 나에게 돌려주었다.

“내 이야기 한번 들어봐.”

박승환이 그렇게 말하고는 이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

승환이가 해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승환이 아버님. 법조인이라기보다 깡패에 가까운 변호사라는 승환이 아버님의 이름을 빌려 장영호를 압박하자는 그런 내용이었다.

승환이의 말에 따르면 아버님은 어둠의 세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보유하고 계시기에, 장영호 같은 잔챙이들은 절대로 그 이름을 거역할 수 없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제이슨 그 자식이 어떠한 카드를 제시하든, 절대로 아버님의 이름을 넘어설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만 들으면 시카고 타자기를 들고 도심을 활주하는 금주법 시대의 마피아 보스가 떠오른다.

솔직히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지나가는 이야기로 어찌저찌 아는 사람이 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는 밤의 대통령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게 넘어가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구 아버님, 그냥 친구도 아니고, 대학에서 만난 베프 중 한 놈인 박승환의 아버님이 그런 분이시라는데 실감이 안 나는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었다. 증거가 있었으니까.

제이슨 임의 마약 거래 장면이 포착된 사진, 계좌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오는 서류.

승환이가 묘사한 것처럼 밤의 대통령까지는 아니시더라도 어둠의 세계에 깊숙하게 관여되어 계신다는 증거가 우리 손에 있었다.

뭐 승환이 말처럼, 아버님이 그렇게 영향력이 있으시다고 치고, 그리고 장영호라는 큰 고비를 단번에 해결해주실 수 있다고 치자.

하지만 내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안 돼. 절대로.”

“왜?”

박승환이 물어본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예상하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야. 당연하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친구 아버님이다. 뭐 네가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건 친구 아버님이잖아. 뭐 친구 아버님에게 도움 받을 수도 있지. 받을 수 있는데, 적당한 수준이라는 게 있잖아. 지금 이게 무슨 알바 자리 부탁드리는 것도 아니고. 아니, 취업 청탁만 해도 민사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지금 시대에, 장영호를 끌어내기 위해 아버님께 부탁을 드린다고?”

내 말에 박승환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저 날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다.

“알아. 나를 위해서 네가 그런 이야기하는 거. 나도 잘 알고는 있는데, 솔직히 그건 아닌 것 같아. 아니, 아닌 것 같은 게 아니고, 아니지.”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던 박승환이 말했다.

“다른 방법이 있어?”

“뭐?”

“다른 방법이 있냐고. 다른 방법이 있다면 나도 이런 이야기 안 해.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

내 눈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차라리 그냥 패버렸으면 패버렸….”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박승환이 내 말을 중간에서 잘라버린다.

“차라리 패버렸으면 패버린다고? 그래서 제이슨 그 미친놈을 패버리고 감옥에 가겠다고?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박승환이 강한 어조로 말한다.

“그러면, 네 말은 뭐, 말이 되는 소리냐? 그렇게 아버지 이야기할 때마다 싫다는 표정 팍팍 지으면서, 그러면서 아버님에게 부탁하자고?”

내가 그렇게 박승환에게 안 되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조목조목 말하려 하는 타이밍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내 전화기가 힘차게 진동하면서 대화를 방해한다.

나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수신 거부를 하기 위해서.

하지만 액정에 떠 있는 이름을 보자 전화기를 향하던 내 손가락이 멈추었다.

전화기에는 ‘ㅅㅇㅊㄴ’이라는 초성이 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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